자기 주도적인 삶 속에 재미가 파닥거리는 법
여태 자각하지 못한 일상의 패턴 중 하나가 직장에서 ‘혼자 밥 먹기’였다. 남을 의식하며 행동거지를 신경 쓰는 나에게, ‘나 홀로 밥 먹기’는 기행이자 도전이며 돌출행동(?)이 아닐 수 없다.
오전 업무가 파하고 삼삼오오 식당으로 향할 때, 나는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20분가량 산책길에 나선다. 곳곳에 부품들이 산재된 제조업 현장이 꽤나 낭만적이진 않지만, 팟캐스트를 들으며 오가는 발걸음은 경쾌하기만 하다. 분명 그 시간만큼은 해방(?)의 자유를 만끽한다. 볕 좋은 날은 사물의 해상도가 올라가서 좋고, 비 오는 날은 청승맞은 분위기를 연출하며 꽤나 낭만을 곱씹는다.
구내식당에 도착해 메뉴를 고르고, 빈 테이블에 앉아 트레이에 담긴 밥과 반찬을 눈으로 스캔한다. 가끔씩 마주치는 팀원들과 눈인사를 건네기도 하지만, 혼밥은 사실 속도에 구애받을 필요 없는 최적의 여유를 선사한다.(전광석화로 밥알을 삼키는 상사와 밥 먹는 것은 고역 중 하나다.) 밥과 환상의 케미로 어우러진 반찬의 향연에 흠뻑 취하기도 하고, 때론 어떻게 하면 부실한 콘텐츠(반찬)를 풍성하게 만들지 고민하며 내어놓는 창작물(반찬 간의 비빔과 콜라보)은 놀랄 만큼 미각의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직장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그 이유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고 싶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생의 새로운 여백의 빗장을 연 느낌이다. 단순히 ‘그러고와 그렇게’라는 주된 인생의 문장에서 홀대받던 형용사를 소환했을 뿐인데, 미처 몰랐던 메인 서사를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중이다. ‘자기 주도’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을 거머쥠으로써, 직장은 한결 가볍고 때론 즐거운(?) 곳으로 탈바꿈한다. ‘혼자’라는 자유와 ‘자기 주도’라는 이방인을 자처함으로써 삶은 확장된다.
물론 직장에서 관계라는 것이 모종의 구속으로 수렴된다. 즉 인간은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며,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성장을 도모한다. 더구나 직장은 ‘일’을 중심으로 이뤄지기에 관계는 선택이 아닌 필수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혼자만의 시간을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용기는 분명 관계라는 구속에 자유를 부여하는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혼자만의 곱씹는 시간이 많을수록 그 건강하고 응축된 에너지는 타인에게 선한 방향으로 이어진다. 자기 주도라는 확실한 무기를 지닐 수 있고, 타인의 부조리한 영향으로부터 스스로 격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춤으로써, 직장생활은 한층 자신감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물론 혼자만의 산책, 혼밥의 음미와 별개로 나이가 들수록 점증하는 꼰대(Boomer)의 정석인 독단과 독선은 부지런히 검열하고 항상 조심해야 할 태도다. 되려 혼자만의 시간과 별개로, 집단 속에서 요구하는 책임과 역할은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팀 미팅에서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는 싣대, 다른 팀원의 의견을 존중하는 에티튜드, 팀이 원하는 방향에 확실한 지원, 그리고 팀원의 고충에 공감하며 역지사지로 해석하는 든든한 아군의 역할까지, 자기 주도작 삶이란 이런 조화 속에서 진화하고 완성한다.
요컨대, 직장에서 관계의 구속된 삶을 거부하며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곳이 늘고 있다. 멀리 보면 일견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때론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다 보면 쉽게 마음을 다칠 수 있다. 특히 꼰대들은 여전히 이런 성향을 못 견뎌한다. 그들의 잣대는 그들이 지금껏 살아온 진리이자 역사이기에 더더욱 용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용기 있는 행동들이 지금껏 살아온 삶의 궤도에서 살짝 벗어난 작은 일탈일 수 있지만, 분명 박수받을 일이다. 관계라는 사슬에 묶여 힘들어하기보다, 방전된 에너지를 셀프 충전하는 방식이 회사 차원에서도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