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락서 Dec 10. 2020

어느 여름날의 묘사

고가도로 왼편, 오랜 시간 속에서 방치된 듯 계단은 울퉁불퉁하고, 여기저기 돌이 깨진 틈으로 초록빛 잡초는 자란다. 계단 왼쪽에는 아래부터 위까지 이어진 실버크롬색의 손잡이가 뻗어있다. 그늘이 져 뜨거운 햇빛이 들어서지 못하는 그 길은 약간 서늘한 느낌마저 준다.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등에는 땀이 흐르고 있다. 계단의 그늘에도 불구하고 경사가 너무 가팔라 숨이 가빠온다. 계단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가장 높은 곳을 경계로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남자의 시선에 짙은 회색빛의 그늘진 계단은 조금씩 내려가고 밝고 파란 하늘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운다.

계단을 마저 오르자 남자의 앞에는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걸음을 떼기 전에 남자는 몸을 살짝 돌리고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자신이 올라온 계단을 바라본다. 생각보다 심한 경사가 아찔했다. 남자는 방향을 고치고 앞으로 걷는다. 좁은 인도는 오른쪽으로 조금씩 휘어져 나아가고 있다. 오른쪽에서 쏟아지는 햇빛에 건물의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다. 백 보 즈음 걷자 남자의 왼편으로 5층 높이의 새하얀 건물이 나타난다. 1층은 예술 전시관처럼 보였는데 조명은 켜져 있지 않았다. 남자는 건물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계단 입구로 들어서 층별 안내문을 살펴본다. 그리고 역시 새하얀 내벽에 둘러싸인 계단을 천천히 오른다. 아직 밝은 오후였고, 계단에는 약하게 빛나는 비상등만이 켜져 있었다.

계단이 끝나는 5층에 이르러 낮은 철문을 통과하자 옥상이 나왔고 띄엄띄엄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남자는 오른편에 있는 미닫이문을 옆으로 밀고 카페로 들어섰다. 몇 개의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내부를 비추고 있었는데 아무런 조명 없이도 밝기는 적당했다. 남자는 마실 것을 주문하고 카운터 옆에 자리를 잡았다. 정면에 브라운관 티비 크기의 창을 마주 보는 자리였다. 창문 너머로 고층 오피스텔이 보였다. 바깥의 햇살은 아직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고, 오피스텔은 조용하고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마실 것이 나왔다. 남자는 주문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목을 타고 흘러들어 가는 맥주의 냉기와 탄산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잔을 내려놓고 입가에 얇게 묻은 흰 거품을 손등으로 걷어냈다. 그리고 몸을 조금 뒤로 젖혀 등받이에 기대고 다시 눈앞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지나가는지 맞은편 오피스텔이 잠시 회색빛으로 변했고, 왼편으로 구름이 빠져나가자 이내 다시 희게 빛났다. 남자는 그러고도 한참을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맥주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맥주잔 밑에 깔린 코스터에는 잔 모양을 따라 물기가 반짝였다.

맥주의 잔거품이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났다. 남자는 마른 목을 축이는 느낌으로 아주 천천히 한 모금씩 맥주를 입에 머금었다. 창문 밖의 오피스텔은 옅은 노랑으로 반짝였고, 카페 실내는 전보다 조금 어두워졌다. 노래도 흐르지 않아 조용한 카페에 남자는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냈다. 어느 여름날의 오후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자가 찾던 장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