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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락서 Dec 18. 2020

마주치는 모든 불행에 손을 뻗을 수는 없지만

낱장 일기27

고용센터를 나와 지하철로 향하는 길. 유니세프 후원 부스가 눈에 보였다. 그러자 즉각 지난날의 수치가 떠올랐다. 복합터미널 앞에서 후원 이야기가 나오자 도망쳤던. 그 날의 글에서도 썼듯이 나는 다음번 이런 기회를 마주친다면, 지난 도망침이 수치로 남지 않게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라도 후원하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오늘 내게 그런 기회가 왔다. 스티커를 붙여 달라고 공허하게 외치는 직원 분이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선뜻 스티커를 받아 들어 판넬에 붙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지나가고 있었다. 설문과 후원을 부탁하는 공허한 외침을 반복하는 직원과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보편적 무관심. 나는 먼저 그러한 상황에 마음이 아팠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나쁜 것은 결코 아닌 것을 알고, 내가 스티커를 붙이고 후원을 한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켜켜이 누적되는 무관심을 마주하는 것은 조금씩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도 알기에.

예상대로, 직원 분 입장에서는 매뉴얼대로 후원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이미 후원을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은 이미 지난달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후원을 하였지만, 결코 마음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나는 또다시 내 자신의 슬픈 고민을 보고 말았다. 직원 분이 내게 건넨 용지에는 정기 후원에 대한 안내가 적혀 있었다. 매달 얼마간의 금액을 꾸준히 후원하는 형태였다. 실제로 일시적인 후원보다는 정기적인 후원이 더 유의미하고 효과적이라고 한다. 그렇다. 내 머릿속은 여기서 제동을 걸었다. 나는 정기후원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직 무직에 불과하다는 생각, 빠른 시일 내에 동이 날지도 모르는 통잔 잔고, 그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눈앞의 후원에 앞섰다. 이런 생각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 후원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이어야 하기에 현실적인 이유를 고려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후원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서도 다시 한번 그 앞에 서서 망설이는 모습이 나 자신에게는 다소 비참하게 느껴졌다. 내가 여유가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흔쾌히 정기 후원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만, 순간의 망설임이 그 확신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나는 다시 당황했고, 직원 분에게 일시 후원 방법에 대해 문의했지만,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후원 방법은 정기 후원뿐이었다. 나는 직원 분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고 직접 홈페이지를 통하여 일시 후원을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돌아섰다. 마음속 어딘가 찝찝함을 남기고.

직원 분이 내가 진짜로 후원을 할 것이라고 믿으셨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유니세프에 만 원을 후원했다. 그 자리에서 뒤도는 순간부터 집에 이르기까지 후원을 하겠다는 마음을 계속 되풀이했었고, 그건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나는 마음이 괴롭다. 오늘의 망설임, 마지막까지 얼마를 후원할 것인지 일순간 고민했던 것,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그때의 나의 생각들. 여전히 나는 척을 하고 있을 뿐이고, 깊은 곳에서부터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실망감. 후원을 결심할 때만 하더라도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후원을 하고 나서도 마음에 불편함을 느끼는 아이러니.

다음번에 나에게 오늘 같은 기회가 다시 찾아온다면, 나는 후원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여 잘 모르겠다. 후원이 꺼려져서가 아니다. 그때에도 현실적인 고민이 앞설 것을 알기 때문이다. 거기에 아마 지난번에 내가 이미 후원했다는 얄팍한 속내를 더하겠지. 그래. 세상 모든 사람을 후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주치는 모든 불행에 손을 뻗을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했다. 그 괴리로부터 발생하는 고뇌. 그것이 나의 현주소이다. 뒷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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