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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린 Aug 02. 2019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시집 비평

미망(迷妄) 혹은 미망(未忘)의 시인,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심보선 시인의 첫 시집으로, 그가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후 14년 만에 펴낸 작품이다. ‘슬픔’이란 인간이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감정이며 ‘십오 초’의 정적은 시간이 흘러감을 느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렇기에 이 시집에는 시간이 흐르고, 그에 따라 인간의 상념과 정서가 촘촘히 엮여있다. 이 시집에 실린 첫 작품은 「슬픔의 진화」라는 시다. 그의 시는 슬픔이 진화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이 시에서 그는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고 말하며 ‘나는 더 이상 슬픔에 대해 아는 바 없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시 자체는 세계이며 그의 언어들은 세계의 슬픔을 다루고 있다.


심보선은 미망(迷妄) 시인이다. 미망이란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상태이다. 미(迷), 그의 시와 삶은 길을 찾지 못하는 ‘헤맴’이다. 그와 동시에 망(妄), 어떠한 ‘허무함’이기도 하다. 미망은 문 밖에 쏟아진 길을 꼭 안았다가 곧 내버려 그를 ‘헤매게’ 한다(「아내의 마술」). 따라서 그 길을 떠도는 시인에게 삶이란 마치 전날 벗어놓은 바지와 같은 ‘허무함’(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이다.


'헤맴’은 어디로 가야할지 정하지 못할 때, 혹은 갈 곳을 정했다고 하더라도 길을 찾지 못할 때 찾아온다. 삶에는 특정한 노선이 없다(「미망 BUS」). 가끔씩 버스 정류장에 서있을 때면 정차하는 아무 버스에 무작정 올라탄 뒤 마음이 가는 아무 곳에나 내리기를 반복하여 얼마나 먼 곳으로 떠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우리 삶에도 성공에 다다르는 보편적인 노선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잘 짜인 버스 노선도를 보고서도 길을 잃을 수 있듯 삶은 헤맴의 연속이다. 따라서 ‘나의 근황은 한때의 방황이고 나의 방황은 유일한 정황’ (「멀어지는 집」)인 것은 어쩌면 심보선 작가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연적으로 해당하는 말이다.


 ‘허무함’은 어두움의 이미지와도 통한다. 실제로 심보선 시인의 시에는 ‘어둠’ 혹은 ‘암흑’이라는 시어의 사용이 잦다. 「狂人行路」라는 시에서 그는 ‘대낮인데도 어둠이 날 찝쩍댔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심보선 시인에게 ‘어둠’이란 진실을 가리거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서의 어둠이 아니다. 시인에게 창밖의 어둠을 응시하는 것은 마치 오래된 습관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확률적인, 너무나 확률적인」). 밝은 빛이 있을 때는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대상들이 오히려 어둠 속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상의 숨겨진 본질을 인지하는 순간은 허무하지만 시인은 그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심보선 시인이 미망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살아온 삶과, 그의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그의 슬픔의 근원은 아버지의 부재이다. 심보선은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동시에 집안의 장남이기도하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방황 속에서도 그를 짓누르는 책임감이 느껴진다. 심보선 시인은 아버지와 유년 시절에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은 기억이 별로 없다고 한다. 따라서 그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상실’이 아닌 ‘부재’의 개념에 더욱 가깝다. 그가 아버지를 생각할 때의 슬픔은 통탄이나 죽을 만큼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은 아니다. 그가 아버지, 하고 속으로 부를 때는 슬픔이 미더덕처럼 터져 맘 한구석이 크게 데였다고 한다(「실향(失鄕)」). 마치 미더덕을 씹을 때처럼, 누군가의 부재를 실감하고 슬픔을 느끼는 것은 예기치 않는 순간에 찾아오기도 한다. 그것은 그리운 대상을 생각나게 하는 매개체를 우연히 떠올린 순간일 때가 많다. 그러한 이미지는 「아버지, 옛집을 생각하며」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살던 집의 리모컨, 장롱 벽, 지하실 그리고 안방을 생각하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시인은 자신의 집 안방에는 깊은 절벽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그의 가슴 한편에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아득한 절벽처럼 항상 자리를 잡고 있다.


두 번째로, 그의 사회학도로서의 이상과 염세주의자로서의 현실이 공존하는 것에서 오는 괴리감 또한 그가 미망하고 슬퍼하는 이유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리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그는 그 과정 속에서 깃발, 조국, 사창가 그리고 유년의 골목길과 같은 혁명, 그리고 혁명의 대상들을 믿어왔다. 그러나 그는 그와 동시에 ‘내가 믿었던 혁명은 결코 오지 않으리. 차라리 모호한 휴일의 일기예보를 믿겠네.’라고 말하며 혁명의 불확실성과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착각」). 그러한 이중적인 모습은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도덕적이고 미적인 명상」이라는 시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그는 현 자본주의나 사회상황에 대하여 끊임없는 질문들을 던지고 심지어는 좌파 사회운동가들과도 자주 교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혁명은 나 같이 게으른 인간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자신의 육체 속에서는 사회학적인 이상이 가끔씩 덜그럭거리지만 그것은 이내 현실 앞에서 억눌리고 그를 미망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를 미망하게 하는 원인은 지난 사랑에 대한 기억이다. 그에게 과거의 사랑은 채워도 채울 수가 없는 허기진 감정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먼지 혹은 폐허」)에서의 ‘내가 원한 것은 단 하나의 완벽한 사랑이었네.’라는 시인의 한마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심보선의 시집에는 이별하는 순간의 상황을 담은 시들이 몇몇 있다. 첫 번째는 바로 「식후에 이별하다」이다. 이 시에는 남녀관계가 끝이 날 때, 그리고 그 끝이 한 쪽의 식어버린 마음 때문에 일방적일 때의 심리가 잘 드러난다. 남녀가 함께 죽을 먹으러 가는 일은 흔치 않다. 더욱이 ‘죽’이란 대개 사람이 아플 때 원기회복을 하게하는 것과 관련된 소재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죽을 다 먹은 후 그 관계가 끝나고 오히려 한 상대를 아프게 하는 독특한 상황 전개가 설정되어있다. 특히 죽이라는 소재의 밍밍함은 사랑을 대하는 심보선 시인의 마음을 대변한다. 즉, 아무리 먹어도 쉽게 배부르지 않는 죽은 마치 심보선 시인이 사랑을 떠올릴 때의 감정과 유사하다.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기근’ 같은 것이 시인의 사랑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두 번째 시는 (「평범해지는 손」)이다. 사랑은 ‘가장 뚜렷한 손금인 줄 알았는데’, 뒤돌아 생각하면 ‘깊이 파인 흉터’이다. 이 시의 모티프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그 유명한 시와 대척점에 놓여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남자의 손도 이별 후에는 그 의미를 잃고 평범해진다. 심보선 시인이 사랑을 할 때 이별을 고하는 사람이었는지 혹은 이별의 통보를 받고 힘들어 한 쪽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느끼는 슬픔의 심연 한 가운데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야기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는 미망시인 심보선이 어떻게 삶에 임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시들이 많다. 그의 시의 가장 큰 특징은 쿨한 감정처리와 해소이다. 따라서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 또한 상당히 쿨해 보인다. 그는 시에서 ‘견뎌내어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그러나 아주 담담하게 반복한다. 「웃는다, 웃어야 하기에」에서 그는 ‘여생이란 가을, 겨울, 봄, 여름을 몇 번 더 반복한다는 거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모호한 정념들을 견뎌낸다. 그래야만 하기에. 오히려 그는 그러한 정념들을 향해서 어서 오라고 외치기까지 한다.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불어오는 바람도 평안으로 안으려 한다(「불어라 바람아」).


그러나 시인은 때로 미망하는 삶을 그만두고 싶어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감정은 아주 소박한 시 「장 보러 가는 길」에 잘 드러난다. 그는 인생의 세목들이 아내가 종이 위에 적어준 장거리들처럼 평화롭고 단순했으면 좋겠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은 「전락」에서 보다 격화되어 나타난다. 이 시의 이미지는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 중 ‘나는 무얼 바라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라는 구절과 무척 유사하다. 전락이란 아래로 굴러 떨어짐을 뜻한다. 시인은 ‘스스로를 견딜 수 없다는 것만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겠는가.’라고 외치면서, 견디는 일이 말 만큼 쉽지 않음을 털어놓는다. 이러한 양상은 「구름과 안개의 곡예사」와 「어찌할 수 없는 소문」의 대비에서도 잘 드러난다. 전자의 시에서 그는 ‘타인들의 칭송과 멸시와 무관심에 연연치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후자의 시에서는 ‘나는 나에 대한 소문’이기에 자신은 늘 전전긍긍 살아간다고 말한다. 이처럼 삶을 대하는 심보선 시인의 태도는 혼란스럽다.


미래를 인식하는 그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날 은행에 갔었네」에 나오는 ‘어느 날 우리는 많은 돈을 갖겠네.’라는 구절이 극명히 보여주듯이, 사람들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살아간다. 그러나 심보선 시인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모든 미래가 오늘의 치명적 오역이라고 믿는 사람이다(「최후의 후식」).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지만 어디로든 끝간에는 그 길은 사라지기 마련이다(「슬픔이 없는 십오 초」). 이렇듯 그의 시에는 그의 염세주의적인 태도가 곳곳에 묻어난다.


어쩌면 그는 미망(迷妄)의 시인인 동시에 미망(未忘)의 시인일 것이다. 그가 헤매고 방황하는 이유는 아직 잊지 못한 것들이 많이 남아있어서이다. 그것은 우그러진 맥주 캔 같은 애인과의 추억이나(「Rubber Soul」),「나를 환멸로 이끄는 것들」에 나열된 목록들과 같이 사소한 대상일 수도 있다. 혹은 「그때, 그날, 산책」에서와 같은 단편적인 과거의 장면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것은 어쩌면 과거의 순수했던 시절, 혹은 열정으로 가득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순수한 감정으로 서로를 좋아하고, 동물원의 이국적인 동물들과 같이 기이한 꿈을 꾸기도 했던 어린 시절이 있다(「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던 시절도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은 같은 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가 바로 청춘이라고 생각한다(「청춘」). 하지만 심보선 시인은 자신이 잊지 못하는 대상을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감상에 젖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리운 대상을 떠올리면서도 ‘다 자랐는데 왜 사나’라고 말하는 그의 태도는 너무나 처연하여 애처롭기까지 하다(「삼십대」).


따라서 심보선이 말하는 ‘추억’은 감상주의에 젖어 과거의 기억을 미화하는 추억과는 다르다. 그에게 추억은 그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어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어두운 골목길의 끝에 기대서 능숙하게 담뱃불을 붙이고 있던 존재이다(「금빛 소매의 노래」). 그만큼 익숙한, 자기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자취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가장 먼저 등 돌리데. 가장 그리운 것들.’ 혹은 ‘가장 먼저 사라지데. 가장 사랑하는 것들.’이라고 냉소적으로 내뱉는다. 역겹고 지겹다는 말로 욕을 하기도 하고 추억을 뒤집으면 시커먼 단면이 드러남을 인정해버리기도 한다. 따라서 그는 뒤돌아서서 자신의 발자국을 돌아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 발자국을 더 세게 짓밟으며 부르튼 발로 미래를 향해 내딛는다(「나는 발자국을 짓밟으며 미래로 간다」).


우리는 심보선 시인의 삶과 그의 시 세계를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는 염세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이다. 그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나 동시에 자기 자신이 타인의 소문에 의하여 정의 내려진다고 생각한다. 그는 끊임없이 방황하고, 헤매고, 허무해하면서도 시를 쓴다. 그러나 그의 미망은 아무런 의미 없는 미망이 아니다. 또한 그가 인식하는 세상의 어둠과 그로부터 느끼는 허무함은 세상의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자 하는 체념이 아니다.


그의 삶은 기다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정념에 시달리고, 잊어야 할 대상들을 잊지 못하며 이곳저곳을 헤매지만, 그런 마음으로, 그 상태 그대로 자신의 미래를 기다린다. 그는 「풍경」에서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고 말했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그것이 심보선 시인을 가장 잘 드러내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심보선 시인은 미망하면서도 의미 없이 발을 내딛으며 걷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러한 방황의 시간을 미래를 맞이하는 혹은 자신의 꿈을 기다리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대물림」이라는 시에서 그는 ‘생은 균형을 찾을 때까지 족히 수십 번은 흔들린다.’고 말했다. 흔들리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가는 삶은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옮겨지는 물품들과 같은 삶이다. 안정되었지만 그 길의 끝은 모두에게 하나로 정해져있고, 스스로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흔들림은 우리가 살아있는 주체로서 고민하고 나아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심보선 시인은 삶이란 몇 번의 암전(暗轉)을 겪고도 남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암전(暗轉)이란 연극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무대를 어둡게 하여놓고, 그 동안에 무대나 장면을 바꾸는 일을 일컫는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여러 개의 막으로 구성된 연극에 비유한다. 심보선 시인이 자주 언급하였듯이,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마주하여 좌절한다. 삶은 때때로 암흑이며 낮마저도 어둠으로 가득 찰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둠 속에서 방황을 하고 계속해서 헤맨다. 하지만 마치 연극 속 한 장치처럼 어쩌면 그 어둠과 방황은 삶을 아주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계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망 시인 심보선의 시 세계에서 어둠과 방황은 필연이며 그 자체로 발전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그가 떠돌아다니고 혼란스러워하고 방황하면서도 계속해서 시를 쓰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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