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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무 Jun 08. 2020

밀레니얼 며느리의 해외 출장기

나를 해방시키는 시드니의 햇살

 '밀레니얼'과 '며느리'. 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가. 그렇지만 한국 사람과의 결혼을 선택한 밀레니얼들은 결혼과 동시에 며느리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고, 이 부조화의 간극을 줄이는 과정을 결혼 초반 한 번쯤은 겪게 되는 것 같다. 나는 그 과정이 남들보다 더 요란했는데, 개인주의자인 나의 성향과 효를 중시하는 시가의 성질이 만났기 때문이었다. 밀레니얼인 나는 '효'라는 사상에도 동의하기 무척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개인주의자로서 우리 부부의 결혼이 양가의 도움이나 간섭 없이 온전히 우리가 감당하는 것이길 원했다. 이를테면 둘만의 벌이로 집값이 충당되지 않았지만 도움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도움의 대가로 시작되는 부모 간섭은 불가피한 경우가 많아서였다. 그래서 '도움 안 받고 효도 안 하자'가 밀레니얼 며느리인 내가 찾은 차선책이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안 받고 안 하자'는 현실성이 없는 선택이었다.  안 받을 수는 있어도 안 할 수는 없게끔 만드는 시가나 남편의 기대와 주변의 눈총. 특히 사위가 아닌 '며느리'에게만 주어지는 의무라는 강요. 불행히도 나의 시가는 전통적이고 나의 남편은 효자였기에, 결혼 초반 나는 안부 전화나 명절 방문 따위로 크고 작은 싸움에 시달려야 했다. 내 부모에게도 카톡이나 전화를 주기적으로 하지 않는데 시부모에게 왜 연락을 해야 하는지, 게다가 그것을 강요하고 마치 내가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는지 나는 정말로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것이 설사 기성세대가 이야기하는 '효'라면 아들에게만 기대하면 될 것을 왜 본인들이 키우지도 않은 며느리에게까지 효를 기대하는가. 또한 당시 나는 업무 특성상 매년 설날쯤에 해외 출장을 가야만 했는데, 그것도 마치 내가 명절 방문이라는 의무를 다하지 않는 죄인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것인지 이 역시 납득하기 어려웠다.




 남편, 시가, 한국 사회로부터 도망치듯 떠나와서 출장지 시드니에 도착했다. 나는 한국처럼 며느리라는 자아가 아닌, 직장인의 자아로만 살 수 있는 그곳이 좋았다. 출장지에서의 나는 이를테면 주방일을 얼마나 잘하는지로 평가받지 않았으며, 내가 잘하고 싶은 일을 얼마나 잘 해내는지로 평가받았다. 나는 콘텐츠 마케터였고, 콘텐츠를 촬영하고 편집하여 유튜브 채널에 발행하는 업무를 담당했는데, 제법 소질이 있어서 성과를 냈을 뿐 아니라 업무를 꽤나 즐기기도 했다. 대행사나 출연진과의 관계도 좋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경험이었다.

 

시드니의 햇살 덕분인지 나는 행복했다


 출장의 기쁨 중 하나는 자유시간이 아닐까. 현지에서 매일 콘텐츠를 발행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자유시간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짧게나마 최대한 시드니를 즐기기도 했다. 숨을 곳 없이 내리쬐던 시드니의 햇살은 한국에서 가져온 고민과 걱정을 마치 소독하듯 박멸해주었고, 내 몸과 마음도 해방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드니의 밤은 또 어떤가. 산들바람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유치하지만 달링 하버 놀이기구에 몸도 실어보고, 미래에 대한 낙관도 잠시나마 갖게 되었다. 해결책은 아니어도 타협점을 찾을 수는 있을 거야, 따위와 같은.


잠깐 기분 내려다가 된통 멀미에 시달렸다

 



 일탈은 짧고 일상은 길다. 일상으로 돌아온 한국에서의 나는 때때로 며느리의 자아로 살아가야 한다. 다행히도 시가와 남편은 본인들의 기대치를 낮추었고, 의무를 강요받는 일이 적어져서 일탈 말고 일상도 견딜만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 사회는 왜 여성들에게 100점짜리 며느리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 혹은 이 것을 달성하지 않았을 때의 죄책감을 조장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을까. <며느라기>, <B급 며느리> 등 다양한 콘텐츠들을 통해서 문제 제기가 되었지만, 현실에서는 밀레니얼 세대에서는 이 문제들을 100% 해결했다고 보기 어렵다. 언제쯤 며느리들은 자유인이 될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나는 얼마나 기여하고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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