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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라 Mar 03. 2017

농담 같은 인연, 그 타이밍

002. 서로의 농담이 되기까지. 





A와의 만남, 그 절묘한 타이밍




나는 자존감은 눈에 씻고도 찾기 힘들고 그냥 자존심과 열등감 덩어리였던 시절을 겨우 견디며 아주 단단한 철벽녀로 성장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졸업을 하고 나서도 늘 무언가 부족하여 내 길은 늘 엉망이었는데, 그러다 겨우 내 인생도 피나 싶게 들뜬 마음으로 입사한 회사에서 나는 반 년도 못 버티고 스스로 나와야했다. 소위 말하는 필요스펙은 얼추 맞추어 입사했으나 전공자도 아니고 반짝 수료하고 반짝 벼락치기해서 입사한 나는 일을 하지 못한 건 둘째고 너무 정신적으로 괴로웠다. 흔히 말하는 남초사회였고 일 외에 마음 붙이고 얘기할 사람도 없었던 나는 그 일을 하기 위해 꽤나 오래 빚을 지고, 당연시 되는 여자들의 입사 나이 커트라인을 그 때 넘겨버리며 인생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고향으로 내려와 여기저기 눈을 낮춰 이력서를 넣었으나 고향에 있는 작은 회사에선 내 이력을 부담스럽다며 더 큰 곳으로 가라고 하거나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이냐며 묻기 시작했고,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햇수로 4년이 지났는데 그간 나는 내 일을 스스로 만들었고 당연히 고정적으로 나가는 돈에 비해 들어오는 돈은 적었으며 마지막으로 받은 월급의 반의 반 도 안 되는 돈으로 하루살이처럼 살아가고 있다. 


내 인생에 가장 자존심 상하고 스스로 부끄럽고 괴로웠던 때가 아마 그 회사를 그만둔 후 자취방을 정리하고 내려오던 때인데 타이밍이라는 게 참으로 신기한 건 그때 쯤 A와 연인이 되었다. 아마 어설프게 사귀게 되고 한두 달 만에 고향으로 내려온 것 같다. 그때는 월세도 밥값도 폰요금도 손 떨릴 때였기 때문에 데이트비용은 커피값도 부담스러웠다. 그것에 관해 말하긴 했지만 그는 돈 걱정을 크게 하고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아무리 들어도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답답하고 더 괴로워졌고 그렇게 우리는 5시간 거리로 떨어지게 되었다. 


위에 말했듯이 나는 엄청난 철벽을 가진 여자사람이었기 때문에 늘 인연을 피하는 노력만 했지 누군가를 오래 만나본 적이 없었고, 그건 A도 마찬가지였다. A는 지옥 같던 그 회사 생활 중에 3개월 정도를 같은 출장지에 있었으나 대화를 한 기억도 손에 꼽을 정도였고, 내 뒷담화를 하는 것을 어떻게 전해들은 적도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부인하고 있다). 그런 사람과 어쩌다 사겨볼까? 그러던지! 정도의 쿨한척 내기 같은 대화로 이어진 인연이 1000일이 넘고 곧 3주년이 된다. 내 인생이 고꾸라지며 나는 점점 더 가진 게 없어지고 자신감을 잃고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부담스러워지는 그 모든 과정을 그는 다 보았다. 하지만 늘 나를 안정적인 것만을 찾지 않고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아 도전하는 멋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주고, 줄어들 미동도 보이지 않는 내 대출금에 대해 연탄을 씹어먹은 듯이 까만 한숨을 쉬면, 그건 니가 뭘 사거나 놀기 위해 쓴 게 아니라 니가 살기 위해, 배우기 위해 생긴 거니까 전혀 나쁜 게 아니라고, 그리고 그렇게 큰 금액이 아니니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최근엔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엔 그 빚이 정말 너무 무겁게 느껴지면 결혼하자고 갚아준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말이 바뀌어서 결혼해서 같이 갚으면 1년이면 된다 로 퉁치고 있다. 그냥 말일 뿐인데 그냥 하던 말 그대로 하지. 




          





아무튼 사람과 사람 사이의 '타이밍'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나는 늘 A와의 시작이 떠오른다. 왜 하필 그때, 내가 가장 초라할 때 만나게 되었을까. 서로 조금 더 어리고 조금 더 살만할 때 만났으면 더 즐겁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길다면 긴 시간인 3년을 꽉 채우는 동안 나는 늘 걱정더미에 살았고 앞으로도 나아질 거라고 확신을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여전히 5시간 거리에 살며 격주로 주말에만 만날 수 있는 연인이고 남들의 기준에선 이미 애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인연에 약하고, 사람에 약하고, 또 스스로에 약해서 마치 그동안 살아왔던 시간들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아주 어렸던 때에 다시 살고 있는 것 같다. 서로에게 아이 같이 굴고, 약한 모습을 기꺼이 보이며, 아팠던 날들을 가장 먼저 고백했다. 살면서 죽고 싶었던 날이 살고 싶었던 날보다 많았던 내가 A를 만나면서는 살고 싶은지 죽고 싶은지 생각하는 것을 멈추게 되었다. 계절은 이렇게나 빠르고 봄은 봄이라서 즐겁고 가을은 가을이라서 좋았던 날들의 연속이어서 내가 나이 먹고 있다는 것까지 잊게 했다. 


이상한 타이밍에 생긴 우리의 인연은 아직 이어지고 있고 또 어떤 타이밍에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내가 느낀 하나는 내가 어떤 상상을 하며 살든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될 타이밍이나 인연은 장난스럽게 찾아온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그 타이밍부터 농담처럼 살고 있다. 그리고 이 농담 같은 인연이 좋다. A도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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