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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권 Apr 12. 2024

<에디토리얼 씽킹>의 문장들


최혜진, <에디토리얼 씽킹>, 터틀넥프레스(2023)



'에디토리얼 씽킹'이 뭐예요?


나는 에디토리얼 씽킹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보와 대상에서 의미와 메세지를 도출하고, 그것을 의도한 매체에 담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편집하고 구조화하는 일련의 사고방식'. (...)


캐롤라인 냅은 <드링킹>에서 '통찰은 사실을 재배열하는 일'이라고 썼다. 비즈니스 전략 컨설턴트 데브 팻나이크는 <Needfinding>에서 '이전까지 전체적인 연관을 갖지 않던 막연한 사물이 새롭게 다른 사물과의 연관을 가지고 하나의 체계적인 맥락, 분절된 전체로서 파악되는 것이 인사이트'라고 했다. 편집은 결국 의미의 밀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다. 데이터를 이야기로 바꾸고, 사실에서 통찰을 끌어내는 행위이다. 에디토리얼 씽킹에는 우리를 더 높은 차원의 의미로 데려가는 힘이 있다.


먼저 외부의 감각 입력을 감지하고(지각), 그 안에서 패턴과 구조를 인식해야 한다. 패턴을 인식해야만 서로 다른 정보를 연결하거나 기존 지식과 경험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무엇과 연결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보이면 그때부터 정보를 소화할 맥락이 생긴다. 원래 가지고 있던 범주의 틀을 기반으로 새로 들어온 정보를 분류하거나 기억에 저장된 관련 정보에 접속해서 이해의 실타래를 만든다. 나아가 수집한 정보와 인식한 패턴을 기반으로 추론이나 예측을 할 수 있고, 의미 형성에 작동하는 다양한 요인 -문화적 규범, 사회적 환경, 개인적 상황 등- 을 두루 살필 줄 알게 된다. 기억에 스며 있는 감정적 색채를 알아보고 활용하는 일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새로운 의미를 빚어가는 행위는 지각, 패턴 인식, 연상, 범주화, 기억 검색, 추론, 맥락화 같은 복잡한 인지 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저는 이 사안/작품/현상/데이터를 이렇게 읽고 해석했습니다. 제가 가진 입장은 이것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소중하고 가치 있다.




연상 - 새로운 연결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


연상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대상의 내연적 의미를 풍성하게 발굴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연적 의미를 풍성하게 떠올리는 일에는 어떤 이로움이 있을까? <와이어드Wired> 매거진 객원 에디터이자 과학 저술가 스티브 존슨은 구텐베르크 인쇄 혁명부터 GPS까지 700년 동안 세상을 바꾼 혁신적인 아이디어 200개를 연구해 공통적인 패턴을 발견했다. 그 결과를 담은 책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와 동일 제목의 TED 강연에서 그는 강조한다. "아이디어는 네트워크!An Idea is a Network" 새로운 연결이 새로운 생각을 만든다는 것이다.


칵테일 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라는 인지심리학 개념이 있다. 산만하고 소란스러운 환경 안에서도 자신에게 중요한 정보를 우선으로 알아보고 선택하는 뇌의 기능을 뜻한다. 파티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떠들면 우리 귀에는 청각 정보가 대량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우리 뇌는 자신에게 중요한 정보 - 예를 들어 대화 상대의 목소리, 누군가 부르는 내 이름 - 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다른 소리를 잡음으로 처리해버린다. 자동차를 새로 구입하면 내가 산 모델이 갑자기 길에 많아진 기분을 느끼는 것, 이사를 앞두고 가구를 장만해야 하면 어딜 가도 가구만 눈에 들어오는 것 모두 같은 맥락의 인지 작용이다. 비슷한 원리로 질문은 지금 내가 어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짚어준다. 질문을 품고 있으면 정보는 딸려온다. 질문이 지식이라면 정보는 철가루다. 

철학자 에릭 호퍼는 <길 위의 철학자>에서 이렇게 썼다. "언어는 질문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대답은 투덜대거나 제스처로 할 수 있지만 질문은 반드시 말로 해야 한다. 사람은이 사람다운 것은 첫 질문을 던졌을 때부터였다. 사회적 정체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할 충동이 없는 데에서 비롯된다." 




범주화 - 유사성과 연관성 찾기


연상을 통해 재료의 가능성을 두루 살핀 이후에 해야 할 작업은 '정리'다. (...) 정리란 정확히 뭘까? (...) 사전은 이렇게 정의한다.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함',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종합함'.

정리는 혼돈에서 질서를 만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이고, 정리하기 위해선 분류 기준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책꽂이 정리만 해도 저자 이름 가나다순, 책 제목 가나다순, 책 크기순, 구입 연도순, 책등 색깔순, 만족도 별점순 등 선택할 수 있는 분류 기준이 많다. 이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개별 책의 배치 순서를 정할 수 있다. 에디터가 하는 일도 비슷하다. 일단 풍성하게 재료를 모은 다음 분류 기준을 고안해서 재료를 정리하고 배치한다.


범주화는 우리 뇌가 정보와 세상을 인지하는 핵심 프로세스다. 이에 대해 촘촘하게 설명한 <사고의 본질>이라는 책을 매우 즐겁게 읽었는데, 책의 공동 저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와 에마뉘엘 상데는 유사성을 인식하고 라벨을 붙여 머릿속 서랍에 정리하는 범주화가 '지성의 연료이자 불길, 원천이자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 기존의 앎의 체계(머릿속 서랍들) 덕에 새로운 대상을 빠르게 이해한 것이다. 범주화의 효용에 대해 <사고의 본질>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범주는 여러 현상을 통해 그것을 머릿속에 구축한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가령 대상과 행동 그리고 상황이 보이지 않는 측면을 '보이게' 만든다. 범주화는 명확한 관점을 제시하고, 숨겨진 항목이나 속성을 감지하게 하고, 미래의 사건을 예측하게 하며, 행동의 결과를 예견하게 하여 자신이 속한 상황을 이해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판단을 하고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 추측할 수 있게 돕는다.


(...) 유사성을 지렛대 삼아 도약하는 아이디어는 어디에나 있다. 제임스 웹 영은 <아이디어 생산법>에서 이렇게 썼다. "오래된 요소들을 가지고 새로운 조합을 만드는 능력은 관계를 알아보는 능력에 크게 의존한다." 관계를 알아보는 능력이란 결국 자신만의 언어로 본질을 규정하는 능력, 유사성과 연관성을 알아차리는 능력, 분류 기준을 정하는 능력일 것이다.




컨셉 - 인식과 포지셔닝을 위한 뾰족한 차별점


이렇듯 '내가 보는 OO의 의미는 OO'라는 관점이 세워지면 형식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컨셉이 필요한 이유는 '하고 싶은 말의 내용what to say과 그것을 담는 그릇how to say'를 잘 정렬시켜서 궁극적으로 아직 누구도 선점하지 않은 빈 땅에 내 콘텐츠를 위치시키기 위함이다. 내가 만든 콘텐츠는 기억되고 선택받도록 하기 위해서. 컨셉은 톡톡 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식과 포지셔닝을 위해 필요하다.




프레임 - 입장과 관점을 정하고 드러내기


프레임은 인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나와 타인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외부 세계를 인식할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인시갈 때도 프레임은 힘을 발휘한다. (...)


프레임이 의미 형성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뭘까? 구체적으로 내 삶에 이롭게 적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글에서는 세 가지 원칙으로 정리하려 한다.

첫째, 같은 정보도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늘 머릿속에 새긴다. 그래야 정보가 가진 가능성을 최대한 발견하는 연습, 연결고리를 풍성하게 만들어내는 연습을 할 수 있다. (...)


두 번째 원칙은 자신의 아이디어나 타인의 창작물을 검토할 때, 무의식적으로 전제하는 준거기준frame of reference이 무엇인지 살피는 습관을 갖는 것이다. 아이디어는 거의 언제나 어떤 믿음을 딛고 서 있기 때문이다. (...)

아이디어 수면 아래에서 은밀하게 흐르는 믿음, 그것이 곧 관점이고 입장이다. 그런데 우리가 당연시하는 생각 중에는 별다른 검증 절차 없이 머릿속으로 들어온 것도 많다. 사회가 주입한 관점이나 타인에게 들은 말이 프레임이 되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 영향을 미친다. 독창적인 관점을 갖고 싶다면 이런 프레임을 의심하고 바꿔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요령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당연시하는 전제를 찾은 뒤에 "정말 그럴까?"라고 덧붙이면서 가급적 많은 문을 열어보는 것이다. (...)

이런 검증 과정을 통해 아이디어가 얼마나 자기 안에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주워온 생각은 쭉정이처럼 허약해서 살이 붙기 힘든 반면 자기 것은 검증할수록 강해진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원칙이 있다. 스스로 개념을 정의하는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카페란 무엇인가? 요즘 뜬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멋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편집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취향이란 무엇인가? 일이란 무엇인가? 질문하면서 인식의 심해로 내려가보는 경험, 원형질의 알맹이를 손에 쥐려 노력하는 시간.




객관성과 주관성 - 주관적인 것의 힘


<정희진처럼 읽기>의 한 꼭지에서 정희진 선생은 객관성의 신화를 꼬집는다. 흔히 객관적 세계라 여겨지는 과학도 그 역사를 살펴보면 자기 입장에 대한 독단적 믿음으로부터 출발한 개종의 역사라는 것이다. (갈릴레오 사례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이어지는 퍼즐 조각을 김정운의 <에디톨로지>에서 찾았다.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joint attention'로 서로 약속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에 결과라는 것이다.




생략 - 군더더기를 알아보고 배제하는 판단력


생략은 첨가보다 용감하고 힘 있다. 무언가를 하기로 선택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지만,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일은 극악무도할 정도로 어렵다. 어릴 때는 더욱 그랬다. 어떻게든 개성을 표출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늘 '무엇을 더 할까?' 질문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오랜 시간 종종걸음하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명확한 아이덴티티, 일관된 맥락과 서사, 날렵한 각을 가진 이들은 '무엇을 하지 말까?'라는 질문을 자주 던졌고, 자기만의 대답을 가지고 있었다. 일에서도, 삶에서도 그랬다. 생략은 때때로 그 자체로 메시지이자 주장, 초대장이자 질문이 되기도 한다. 




시각 재료 - 메세지와 비주얼 사이의 거리 감각


많은 사람이 비주얼 센스를 비문자적인 무언가로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비주얼 재료를 다룰 때도 문자 언어에서 출발하는 연상 활동이 중요했다. (...)

앞서 설명했듯 편집은 재료들 사이에 존재하는 미적, 심리적, 논리적 거리와 간격을 조정하는 일이다. 정보 사이의 간격이 좁으면 이해하기 쉬운 대신 지적, 미적 흥미나 자극을 느끼긴 어렵다. 반대로 정보 사이의 간격이 넓으면 독자가 유추력을 발휘해야 하므로 신선한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소통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비주얼 재료도 마찬가지다. 말하려는 메세지와 비주얼 요소 사이의 거리 감각이 중요하다. (...) 에디터에게 필요한 비주얼 감각은 탐미적인 센스가 아니다. 텍스트와 이미지 정보 사이의 거리와 간격이 자신의 기획 의도에 맞는지 감각할 줄 아는 가늠자가 있는가 없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흔히 비주얼 감각은 타고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경우의 수에 대한 앎이 쌓일수록 센서가 정확해지는 거라 믿는다. 데이터베이스는 양이 많을수록 힘을 발휘한다. 감각도 지식처럼 집적된다. 디자인 역사와 그림책 역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브루노 무나리의 조언처럼 양이 질을 만들고 노력이 쌓여 감각이 된다.

구애 없이 자유로운 판타지아로 가득한 존재로 어린아이들이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가능한 한 많은 데이터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첩경이다. 기억에 저장된 데이터가 많을수록 그만큼 많은 지식의 연관 짓기가 가능하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 데이터를 토대로 훌륭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
- 브루노 무나리, <판타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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