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Oct 07. 2024

<폴리 아 되>와 영상의 페르소나


명동 어딘가에 새로 개업한 루리카페는 메이드 카페다. 이 카페는 두 가지 면에서 이목을 끌었는데, 하나는 고급 원두를 내리는 카페라는 점. 다른 하나는 버츄얼 메이드를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다. 카페를 방문하면 냐루비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고객을 응대한다. 냐루비는 일주일에 3명의 연기자가 번갈아가며 활동하며, 담당하는 날은 각각 월화수, 목금, 토일이다. 연기자마다 특색이 다르기에 방문객은 카페를 방문하는 일에 흥미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온라인 스트리밍으로도 만나볼 수 있지만 이는 ‘접객’을 굳이 버츄얼로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한 질문이 배제된다는 점에서 논점을 벗어난다. 접객을 잘하는 직원보다, 접객도 잘하면서 버츄얼 스트리밍을 겸해야 하는 직원 구하기가 더 어려울 테니 말이다. 그보다는 한 명의 캐릭터를 연기자 세 명이 번갈아가며 담당한다는 구도에 초점이 있는 듯 보인다. 흔히 버츄얼 스트리밍에서 사용하는 아바타가 캐릭터 정체성의 많은 면을 차지한다고 알려졌지만, 이 이야기의 본질은 연기에 있다. 외형적으로 동일하지만 인격이 서로 다른 캐릭터는 각종 매체에서 널리 사랑받은 단골 소재다. 한몸에 여러 인격이 있는 사례는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작품들에서 드러난다. 다양한 몸에 한 인격이 있는 사례도 있지만, 이는 본문에서 참고할 만한 소재는 아니다. 어쨌거나 이들 사례에서 우리가 주지할 건 한 현상이나 대상을 파악할 때는 항상 참고할 만한 준거점을 찾으려 든다는 점이다. 인간관계로 보면 선입견, 이야기학으로 보면 구성점이라 할 만한 이 지점이 서브컬처에서는 모에론이라는 이름으로 설명되고 있다.  


연기하는 사람에 따라 캐릭터가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점은 오늘날 ‘배역’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졌다. 마블이나 DC코믹스 등에서 여러 판본으로 변형되는 캐릭터 서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들은 캐릭터를 구성하는 부분적 특성을 따라가며 이는 곧 캐릭터를 바라보는 일에서 몇몇 특징점을 제외한 나머지를 상상의 영역으로 구획한다. 애드리브와 같은 현장 상연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가 현실을 정직하게 기록한다면 뮤지컬은 매 순간이 다른 현실로 기록된다. 배우는 자신이 생각하는 연기가 있고, 이를 끄집어내는 일은 복사와 붙여 넣기가 아닌 한 현실을 향한 항해에 가깝다. 영화가 목격담이라면, 뮤지컬은 모험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조커: 폴리 아 되>를 생각해보고 싶다. 음악이 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본작을 뮤지컬에 빗대는 시선이 있다. <폴리>는 전작에 대한 자기부정이면서, 동시에 아서 플렉과 조커를 서로 다른 인물로 바라본다. 영화를 둘러싼 논쟁은 이 두 가지가 한 서사에 담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한 배역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보기 원했지만 무대 위에서 이를 달리 보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이는 단순히 무언가 시작될 것만 같은 기대를 배신해서만은 아니다. 1편을 본 누군가는 그가 마주하게 될 결말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죽인 일은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고, 악인에 서사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일 말이다. 소위 “악인의 서사”는 나쁜 놈을 미화하거나 다시 볼 여지를 주지 말라는 윤리적인 입장 표명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대중이 <조커>에 기대했던 건 그게 아니었다. 


캐릭터로서의 조커는 실존하는 인물이기보다 죽음이나 우연 같은 일에 대한 현상학적 은유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바라보아지지 않는 면이 있었고 그냥 자연재해 같은 일에 더 가까웠다. 대중에게 각인된 근거리의 조커가 놀란의 <다크 나이트>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놀란의 영화에서 조커는 기원을 알 수 없고, 배트맨에 윤리 딜레마를 던지는 범죄자다. 플롯으로 보면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캐릭터이며 극을 끌어가는 일에 사용되지만, 사람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는 흔히 말하는 입체성과는 다르며, 조커가 윤리적인 질문을 촉발하는 방아쇠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관객에 여지를 남긴다. 그러니까 <조커>는 메타영화인가? 선택한 게 아닌 나머지를 가정하는 일은, 우리가 분열된 현실을 회집하며 이에 하나의 ‘여지’를 남기는 일이기도 했다. 관객은 “만약 이런 상황이 나에게도 닥친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놀란의 조커는 질문지를 던지며 받아들 수 있는 상황을 인간의 존재로 사유한다. 여기서 반문, 배역에 대한 배우의 연기는 설정이 남긴 여지를 파고들며 이를 자기에 두르는 작업이다. 조각난 단서를 하나 둘 모아가며 이를 자신의 것으로 성취한다는 점에서 ‘배우’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조커>를 보며 현실의 흔적들을 떠올리는 일은 한 세계를 불확실성에 몰아넣는다. 아무런 것도 정해져 있지 않으니 결말 또한 없고, 그래서 이 세계는 화면이 꺼질 때 끝나지 않는다. 풀리지 않은 실마리를 이어가기에 이 상상은 모험으로 가득하다. 


<폴리>가 뮤지컬 같았다는 인식을 상기하면 다시금 메타를 떠올리게 된다. 뮤지컬은 배우가 주어진 단서와 실마리를 이어가기에 매 상연이 모험이다. 관객은 자신이 보러 가게 될 회차에 배우가 최고의 연기를 해낼지 알 수 없어서 어쩌면 돈이 아까울 정도의 ‘최악’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뮤지컬이 무언가를 재현하지 않기에 도리어 이곳엔 항상 여지가 남는다. 영화가 현실의 그림자를 겪는다면 연극의 노래하는 판본인 뮤지컬은 서로의 그림자를 한 곳에 겹친다. 그래서 뮤지컬 팬은 대개 둘로 나뉜다. 배우를 신경 쓰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 뮤지컬은 배우의 컨디션 회복이나 유사시를 대비해 배역 하나에 배우를 두 명 이상 배정한다. 팬들은 자신이 원하는 배우의 출연일을 외우거나, 극 전체를 여러 번 관람하기도 한다. 이는 영화와는 차별화되는 구석으로, 영화에서 다회 관람이 극의 디테일을 수집하려는 시도라면 뮤지컬은 아니다. 뮤지컬은 배우에 따라 배역이 주는 느낌이 다르며 이는 곧 극 하나에 여러 판본이 공존함을 뜻한다. 혹자는 어둠을 겹쳐봐야 명도가 달라질 뿐이라고도 하지만, 무언가에 관한 게 아니라 한 흔적으로만 사유된다는 점에서 이 어둠은 하나의 결말로 귀결되지 않는다. 상투적으로 말한다면, 뮤지컬은 모두가 승리하는 게임에 가깝다. 그런데 실패와는 달리 승리에는 요인을 찾는 일이 불가하거나 어려워서 질문지를 받아들 구석이 없다. <폴리>의 조커는 뮤지컬의 공식을 따라 관객을 승리로 이끌지만, 모험하지 않는다. <폴리>의 조커는 전작의 범죄 사실이 환상으로 이어지는 일을 경계한다. 


아서 플렉이 노래를 부를 때, 작품은 아서의 내면에 깃든 조커를 보여준다. 뮤지컬 장면에서 아서는 조커 분장을 하고 있어서 노래가 끝날 때 현실이 시작되는 곳과 마무리되는 곳이 선명하다. 작품 후반에 아서가 법정에서 노래하는 장면이 지나간 후, 아서가 변호사를 해임하고 스스로를 변호하기로 선택한 일을 떠올려보자. 조커 분장을 한 아서는 자신의 환상을 현실에 끄집어낸 대가로 ‘용맹’해지지만 반대로 환상에 공격받는다. 정신에서야 환상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그게 현실에 나올 때는 맹렬한 공격성을 보였던 것이다. <폴리>가 메타영화로 사유되는 것은 이 대목이다. 영화의 결말을 따라 생각한다면 모든 사람은 내면에 깃든 공격성이 있고 이를 적절히 해소하거나 통제되도록 도와야 한다. 꼭 사회가 아니더라도 가까이에 머물면서 상대를 붙잡아줄 누군가가 절실하다. 어쩌면 영화는 관객에 있어 바로 그 누군가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관객이 회피해온 것을 공격성으로 바뀌지 않게끔 한다. 공격성이 화면에 풀려나지 않도록 도우며, 관객이 자기 세계에서 도피하지 않도록 이를 붙잡아두는 역할을 한다. 아서에게 음악은 그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난바 유키는 이요와의 뮤직 애니메이션을 두고서 ’행방불명된 페르소나’가 생성된다고 지적하며 다음처럼 말한다. “영상은 페르소나 자체를 단독으로 만들어낸다기보다 노래의 페르소나를 명확화하고 문맥을 덧붙인다.” 특히 아서 단토의 문장을 인용하며 음악 페르소나가 아티스트 본인의 페르소나를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고 지적하는 대목은 유의 깊다. 


아서 플렉이 노래하는 장면이 너무 많다고 사람들은 불평한다. 실제로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여태껏 공개됐던 조커와는 결이 다르다. 이 조커는 우리가 조커에 기대했던 캐릭터적 준거점이 없고,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 애초에 같은 극을 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기에 작품이 보여주는 게 애드리브나 변형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연기는 즉흥 환상이고, 아서 플렉이 지은 죄는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캐릭터에 기대하는 나머지가 상상의 영역이 될 뿐이다. <폴리>는 이 점에서 ‘조커’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을 보여준다. <폴리>는 노래하는 아서를 보여줄 뿐인 음악 비디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음악 영화가 조커를 페르소나로 보여줄 때 여기엔 아서의 ‘조커’라는 문맥이 붙는다. <아네트>나 <어둠 속의 댄서>처럼 불우함을 위한 찬가가 아닌 이 영화는 <라라랜드>의 씹다버린 판본처럼 보인다. 조커는 아서가 도달할 수 있는 장소 중 하나였지만 그는 여기서도 구원받지 못하고 떠나가야 한다. 좋게 옹호한다면 <폴리>는 관객이 선택할 수 있는 장소 중 하나가 되지 않도록 여지를 남기지 않는 편에 속한다. 그래서 영화에 우호를 보내는 일은 단순한 연민으로만 치부될 공산이 크다. 이 뮤지컬에서, 한 사람의 아티스트로서 아서를 이해하기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악인에 서사를 주지 말라는 단어는 우리가 조커의 법정에 서서 그의 불우한 과거를 듣지 않을 많한 이유를 제공한다. <폴리 아 되>는 외부적으로 겪을 만한 논란을 잠재운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조력 자살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살필만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배치되고 상반된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