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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03. 2024

실패가 당연히 존재한다면

<새벽의 모든>(2024)


미야케 쇼는 매거진 FILO와의 인터뷰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유머 없이 유머를 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실패가 당연히 존재한다면 그것 없이는 실패를 말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 주장은 특히나 ‘실패’를 코미디의 전제로 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키튼이나 채플린을 생각하면 우리는 ‘실패’가 코미디에서 어떤 형태로 제시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코미디는 이미 그게 불가하다는 점을 전제로 행동한다. 아슬아슬한 곡예도 그래서 가능한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죽음도, 추락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쳐 말한다면 이미 죽음이나 추락은 수행의 영역에 있지 않다. 오직 살아가는 것과 올라가는 것만이 존재하는 이 세계는 결말이 ‘행복한 결말’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쇼가 설명하는 <새벽의 모든>이 그렇다. <새벽>은 기본적으로 정신에 관련된 질환을 겪는 두 환자의 이야기이면서, ‘일상’을 살아가지만 스스로를 ‘정상’에 두지는 않는 두 인물의 이야기다. 그러나 쇼는 이들의 삶이 정상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이들을 ‘실패’라거나 하는 상태로 규정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는 실패란 게 존재하지 않고, 이들을 실패자로 만드는 일은 불가하다. 


영화가 실패를 묘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실패 없이는 실패를 말할 수 없다.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일은, 실패의 부재를 지칭하면서부터 실패의 개념을 가정한다. 음식을 두고서 맛이 없다고 말하려면 맛이 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영화가 상상된(imagine) 영역이라고들 말하지만, 정작 영화에서 현실은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영화를 두고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일은 영화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지적과 서로 상충한다. 즉, 영화가 상상의 산물이라면 이안에서 현실은 어떠한 정상으로써 추구되지 않는다. 현실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느끼니까 사람들은 영화를 본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영화가 꿈꾸는 건 정상화고, 이는 영화에서 ‘실패’라는 말의 의미를 달리 한다. 이미 현실이 정상의 범주를 벗어났다면 영화는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형태의 ‘실패’다. 현실에서는 부재하는 것이면서 오직 스크린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바로 실패다. 현실 없이는 영화도 없다는 말은 그런 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영화 같은 나날이 펼쳐질 것이라 믿는다면, 평범하고 일상적인 부재의 삶을 긍정해야 한다. 핍박받거나, 부족한 자신을 믿으면서. 


<새벽>은 약간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이들을 다루지만, 이를 실패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에티튜드를 지닌 영화다. 두 사람이 삶에서 소중함을 발견하는 일은 도리어 그와 같은 삶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두 사람에게도 질환에 시달리지 않았던 때는 분명 있었을 테다. 미사라면 상대방에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았던 때, 타카토시라면 공황에 빠지지 않았던 때가 있었을 테다. 두 사람은 그런 과거를 토대로 자신의 현재 상황을 ‘실패’로 규정하고서 이를 ‘일상’의 범주에 받아들이려 한다. 이들은 실패가 있어야만 비로소 실패를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가령 “살고 싶은 것도, 죽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루가 계속될 뿐이다.”라고 적는 인터넷의 환우 수기에서는 삶에 대한 고저 차가 보이지 않는다. 결핍도 과잉도 없는 삶은 그저 매끄럽기만 한 길바닥과도 같아서 삶에 아무런 제동도 걸지 않는다. 행복도, 슬픔도 없는 이곳에서 영화는 조금이나마 걸림돌이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언가 극적인 사건을 바라는 건 아니더라도, 일상을 회복하는 법은 실패를 말하는 법과 정확히 같다. 자신의 앞날에 행복한 결말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채는 일이다.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의 심리치료 모임을 보여준다. 이 묘사는 일본 영화에서 굉장히 자주, 다양하게 등장하고 공통적으로 말하는 몇몇 사실이 있다.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죽은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과 함께, 영화는 이들을 잃은 순간을 말한다. 즉 한순간에 고정되어 있다. 이 고정이 한때에서 벗어나기를 ‘실패’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고 보면 어떨까. 누군가는 남은 이들이 좀 더 자유로워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거기서 떠나온다고 해서 ‘실패’의 예외로서 정상화를 이뤘다고는 볼 수 없다. 실패의 바깥으로서, 우리는 끝없이 전투를 치르기만 할 뿐이다. 끝나지 않을 심리 세미나는 이런 점을 부각하는 면이 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언제까지고 세미나에 출석할 수만은 없다는 걸 모두가 안다. 세미나의 목적은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 더는 나오지 않는 것이고, 말하자면 세미나 자체가 ‘실패담’이다. 이들에게 정상화는 상처를 딛고 나아가는 일이며 이 과정에서 ‘세미나’는 그 자체로 실패의 역할을 한다. 고정점이 있어야만 비로소 앞날을 내다볼 수 있다는 것. 


혹자는 실제로 일본 사회에서 그게 유행했을 뿐이기에 현실을 반영한 처사라고 말하지만, 이 세미나는 실패가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기를 상대화할 수단이 없다면 어느 속도로 달리는지를 알 수 없다. 창문이 없는 지하철에서는 차체가 어떤 속도로 달리는지를 알 수 없듯, 한 삶은 사고예방을 위해서라도 실패를 요구한다. 아니면 시점을 조금 더 외부로 넓혀보자. 세계는 점점 더 가속한다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주장했던 모 저작가가 말했더랬다. 그렇다 하면, 우리 세계가 점점 추락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야 알아챌 수 있을까? 충돌의 순간이 곧 실패를 뜻하고, 실패가 죽음을 지시한다면 우리는 실패의 순간을 알 수 없다. 죽은 사람이 죽음에 대해 말하는 건 불가능하니 말이다. 하지만 세미나처럼 서로의 실패를 끌어안고 내부를 공동으로 비워둔다면 산 자가 죽음에 대해 말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이 세미나는 우리가 영화에서 얻는 것과 정확히 같은 기능을 한다. 한 영화가 끝나는 순간은 오직 필름이 불타는 순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영화가 줄곧 상영되려면 우리는 실패의 순간을 안고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영화의 죽음은 영화와 죽음의 관계와 같다. 영화사의 초창기에 영화는 신체 절단이나 훼손, 무리한 사건 등에서도 멀쩡히 살아남는 모습을 보여줬다. 영화는 현실에서라면 실패라고 지정되었던 것을 ‘불가’하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실패하지 않는 장소가 됐다. 그러나 황금광의 시대에는 자본적으로 실패하거나, 그렇게 여기게끔 하는 요소들이 성행했고 이때 영화는 사람들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만한 이유를 제공했다. 다시 <새벽>의 오프닝으로 돌아가 보자. 한 여인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다른 이들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는 일을 보여준다. 타카토시와 미사도 그렇다. 보통은 나와야 할 반응이 나오지 않고 있다. 선입견일까? 회사의 직원들은 두 사람에게 이례적으로 따듯한 모습을 보인다. 현실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렇다. “실패를 보여주려면 먼저 실패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미야케 쇼에게 이 현실은 실패의 순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미 실패했기 때문에 더는 실패할 구석이 없다. 다시 말해서 영화가 실패를 다루지 않는 것은 실패는 다뤄져야 할 게 아니어서다. 이곳에서 실패는 객관적 현실이자 리얼리티고, 모든 일이 시작되는 곳이다. 


필름의 물성이란 것은 다소 무시되기 쉽다. 영화는 그 자체로 일렁이는 꿈이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이해된다. 이런 관점에서 실패는 성공의 반대편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림자의 존재유무는 빛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지 어둠이 드리워진 길을 보이지 않는다. 실패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실패의 모습을 설명하는 일은 어렵다. 타카토시와 미사에게 서로의 모습은 경험하기 어렵고 상상할 수 없는 축에 속한다. 성별을 떠나서 한 인간이 자신을 떠나기란 힘든 축에 속한다. 만약 신체가 현실에 존속하도록 돕는다면 우리는 기본으로 ‘실패’라는 상태에 속하는 게 된다. <새벽>의 사람들이 보이는 온정적인 태도는 그런 점에서 연유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고 보는 게 아니다. <새벽>은 실패에 대한 상호출자집단, 또는 고통을 말하는 법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한 사회가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특정한 대상이나 사물에 책임을 돌리는 일, 다른 하나는 이를 서로를 끌어안는 기회로 삼는 것. 흥미롭게도 <새벽>이 말하는 성좌는 이 둘을 모두 포함한다. 우리는 밤하늘에서 별자리를 발견할 수도 있고, 별 하나하나를 보기보다는 별 밤 전체를 느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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