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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Nov 16. 2024

영화와 대화: 서사, 소음, 그리고 일상의 반영


“너무 말을 많이 하죠?”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를 꼽으라면 대사의 양을 꼽을 수 있다. 드라마는 대사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대화의 양이 많아진다. 영화가 어떠한 풍경으로서 ‘대화’를 제시한다면, 드라마는 인물의 입을 빌려 직접 이야기를 전한다. 거칠게 표현하면 영화는 배경에 서사가 있다면 드라마는 캐릭터 개인에 서사가 있다. 그래서 영화가 세계 대 세계로서 현실과 매칭되는 반면, 드라마는 작중 관계나 배우의 케미스트리 등에서 커플링을 형성한다. 물론 이 말이 영화에서 대사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영화와 드라마는 한정된 공간에서 대화가 진행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그 의도가 포함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즉, 영화와 드라마가 콘텐츠이므로 이들이 나누는 대화 또한 무언가를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를테면 영화를 보는 건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재미를 느끼고자 함인데, 여기서 오가는 대화가 현실과 별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건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될 테다. 이 점에서 영화나 드라마는 항상 ‘내부’를 형성한다. 이들 작품이 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떠드는 장소가 되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잠시나마 일상의 피로를 잊는 곳일 수 있는 것도 이 덕택이다. 


그러니 홍상수의 영화를 ‘말이 많다’고 느낀다면, 이는 한 가지 아이러니를 형성한다. 홍상수의 영화는 분명 대사가 많지만 대개 이야기를 진행하기보다는 의미 없이 지나가는 경우가 더 많고, 따라서 드라마를 형성한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세계 대 세계로 현실에 자기를 매칭하려는 쪽에 가까워서 내부가 없다는 쪽, ‘투명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홍상수의 후기 작품은 점점 구조와 형식에서 벗어나면서 대화나 서사, 배경 등에 의미를 찾기가 어려워졌고 이를 따라 영화가 점점 내부를 잃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니 홍상수의 영화가 여전히 많은 대사량을 유지하더라도, 예전과는 달리 그 안에 무언가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한다’고 지적하기란 힘들다. 그냥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감각을 느끼기 어려워서 점점 더 카페에 앉은 것만 같은, 백색 소음을 듣는 듯한 인상을 남길 뿐이다. 그야말로 한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영화에서 반영성은 흔히 관찰자의 내면을 비쳐보임으로써 반대로 그와 같은 내면을 획득하는 과정을 가리키는데, 홍상수의 근작은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투명하고, 또 반영성을 획득하는 듯 보인다. 


다른 한편 영화와의 대화, 혹은 비평의 대화란 게 가능한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예를 들어, 필자들이 서로 이야기를 서신 형태로 교류하면서 이를 외부의 독자에게 공유한다는 컨셉의 비평의 편지를 떠올려보자. 편지의 수신과 송신, 이 사이에 독자가 위치하며 이는 곧 비평의 편지라는 하나의 ‘장소’를 형성한다. 공개된 장소에서 질의를 나누며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면, 이를 해당 장소에 있는 모두가 함께 듣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형식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GV와 비슷한 면이 있다. GV의 장점은 자신이 궁금한 걸 직접 질문으로 남길 수 있다는 점이면서도, 이를 공개된 형태로 공유한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한 장소에 있으므로 이 질의는 단순한 백색소음이 아니라 의미를 지닌 담화로 이해된다. 자신의 ‘일상’에 대화가 들어올 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대화란 것은 다른 사람의 일상에 참여하기도 하는 일인 게 아닐까. 이런 점에서 떠올려볼 수 있는 건 홍상수의 <풀잎들>이다. 영화는 카페에 앉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만 한다. 인물이 어딘가로 이동하면서 이야기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영화 내부에서 대화가 수행되는 일을 보여주면서 이를 바깥의 관객에 공유한다.  


비평의 편지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한 골목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따금 덕질을 할 때 반가움을 느끼는 대목은 예상치 못한 만남이다. 한 분야나 제품의 팬을 우연히 마주할 때, 이들이 살아있음에 안심하게 된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냥 소음이 있는 곳에 풍경이 있고, 풍경이 있는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점이 이 골목의 주된 정서를 형성한다. 이 점에서 ‘대화’는 그저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취조 형태의 과격함이나 무언가 초점이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적절히 이야기를 이어가는 일에서 우리는 대화의 소중함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영화와 대화의 의미를 찾는 일은 심정적으로 점점 더 평탄해지는 듯하다. 영화가 한 의미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이를 외부에 공유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일상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영화의 주된 대화가 된다. 잘살고 있는가 하고 안부를 전하는 일, ‘대화’는 의미를 전하기 위한 수단이기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에 관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기보다 대화를 먼저 하려 하고, 이를 통해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한다. 한 존재의 세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이런 일상이 벌어지는 자리에 자신을 밀어 넣는다. 


생각해보면 시네필이란 존재가 그렇다. 영화에 처음 관심을 가질 때는 이런저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서로와 대화하고 싶어지지만, 어느샌가 영화에 들을 수 있는 ‘말’이 많아지고 나면 이 대화는 내용물을 담고 있기보다 자신을 한 외부로 추방하는 ‘백색소음’이 될 뿐이다. 더는 영화를 봐도 무언가 새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는 그 영화가 말하는 게 의미적으로 별다를 바가 없다고 여겨질 때다. 하지만 행복에는 여러 다른 형태가 있고 마찬가지로 영화를 말하는 법도 각자 다르다. 무엇보다, 말하는 법에 따라 다양한 변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앞서 잠깐이나마 다른 이의 대화를 진중하게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영화 관람의 주된 장점이다. 이 정의를 따른다면 본다는 건 무언가를 듣기 위해 요구되는 행위라고나 할까. 이를 따르자면 시네필에게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기보다는, 영화가 한 일상을 보유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더 우선시된다.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이 더는 사건이기보다 자기 일상 중 하나에 불과할 때, 이 영화가 어떤 형태로든 소음을 유발해야만 자기 삶에 명징하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즉, 영화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의 형태를 발현하는 일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작금의 나는 영화를 보는 일이 더는 재밌지 않다. 감독이나 제목을 눈여겨보기보다는 영상을 그저 흘려보내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영화를 어떤 순서로, 계보학적으로 파악해보려고 시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생각이 뚜렷하게 구조화되는 일은 거의 없다. 다만 이곳저곳에서 마주하던 소식이 하나의 장소로 집합하면서, 이곳에 어떤 사람이 그동안 살아왔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잦다. 아무런 지식이 없으면 그저 돌멩이에 불과했겠지만, 고고학자가 보면 무슨 무슨 시대의 유물임을 알아채는 일처럼 말이다. 아마 일상이란 게 그런게 아닌가 싶다. 삶을 살다 보면 일상에 속해있기에 무뎌지는 몇몇 감각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게 사물이든, 아니면 사람 간의 관계든 간에 굳이 불필요한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까지 그런 무던함에서 벗어나 보려 하기도 한다. 이런 건 그냥 도주에만 불과할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대화상대를 찾아보려는 마음이기도 한 것 같다. 무엇이든 간에 소음이 발생해야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면, 어떻게든 말을 이어 가보려는 게 사람의 마음이니 말이다. 영화를 본다는 건 영화라는 합의된 외부에 모임으로써 우리가 생각을 부대끼며 한 개의 일상을 발생시킬 수 있을 귀중함에 관한다.


글을 쓰는 일도 이런 마음과 비슷하다. 글을 쓰고 싶거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왜” 쓰는가 하는 질문을 자주 받곤 한다.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직업과는 별개의 취미이면서 또한 누군가 알아주지도 않으니까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무언가를 잘한다는 게 유명하다는 말과 서로 별개의 영역에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니까, 글을 써서 유명해지고 싶다는 말은 글을 잘 쓰는 것과는 서로 무관하며 오히려 문화에 관한 흥미로운 책을 쓰거나 아니면 인터넷 방송 등에 출현해 재밌는 말을 몇 개 던지는 게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은 무엇을 위한, 향하는 감정일까. 한 편의 글을 써서 외부에 던지는 일은 가공의 상대에 대화를 요청하는 것과도 같다. 지속적으로 괴롭히거나 스토킹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가 오가는 건 이 이야기가 발생함에 따라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만한 계기가 된다. 우리가 평소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 것만큼이나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 이는 대화를 건네는 쪽에서 대화를 받는 쪽이 될 확률도 그만큼 낮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금, 영화를 본다는 건 거울 속에서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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