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Nov 19. 2024

<주술회전>의 결말에 관한 단상


네이버웹툰에서 연재 중인 <데드퀸>에 얽힌 인상 깊은 일화가 하나 있다. 작품의 결말을 수정했다는 점이다. 김규삼은 당시 <비질란테>와의 동시연재를 진행 중이었는데, 건강악화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에 <데드퀸>은 서둘러 결말로 향하며 급발진을 해버렸고, 많은 팬들이 아쉬워했다. SF 아포칼립스 장르인 <데드퀸>은 IP확장 가능성이 있었지만 다소 마이너였고, <비질란테>는 류승완의 <베테랑2>에 영향을 주었다고도 평가될 만큼 시의성이 있었다. 그러니 둘 중 후자를 택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드라마화 판권이 얽힌 이상 <비질란테>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이후 김규삼은 팬과의 소통채널에서 건강문제로 작품의 결말을 서둘러 끝내버린 것은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하며 ‘새로운’ 결말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이 사건을 이렇게 기억한다.”라는 문구로 시작된 이 후일담에서 분기간 파생된다. 본래의 결말은 삭제되거나 제거되지 않으며, 다만 ‘대체’되기만 할 뿐이다. 따라서 엄밀히는 결말을 ‘수정’했다고 볼 수 없겠지만, 단일한 의미에서의 ‘결론’으로 본다면 이 결론은 수정된 게 맞다. 독자가 마지막으로 마주하게 될 결론은 수정된 결말이다. 두 세계는 모두 존재하지만 다른 한쪽이 어느 한쪽을 대체해버리면서 어느 한쪽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사례는 디지털을 대하는 태도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손쉽게 복제될 수 있는 만큼 손쉽게 지울 수도 있다면, 여기서 ‘원본’은 그렇게 큰 무게를 갖지 않는다. 포토샵 프로그램 위에서 이미지는 특정 레이어가 아니라 검증 작업을 마친 ‘총체’로서만 파악되는 일을 떠올리자. 디지털의 특징은 원본의 자리를 결론이 대체한다는 점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최종에 최종을 거듭하며 마지막 납품본으로 나아가며 이는 자신의 과거를 대체해가는 ‘진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만으로 수정을 남발한다면 작품의 결말이 갖는 무게가 약해진다. 이는 얼마든지 되돌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20년대 이후 마블 영화 세계관이 매력을 잃은 것은 얼마든지 살아날 수 있다는 ‘대체’의 성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단일 세계를 벗어나 여러 평행 우주로 이야기가 나뉘면서 인물이 죽거나 다치는 일에 대한 민감도가 떨어졌다. 더 나은 결론으로 향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일지도 몰라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든 ‘행복한 결말’을 마주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은 결혼 생활도 역시 행복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빠르게 이혼절차를 밟는 추세다. 조금은 꼰대 같을 수도 있지만, 행복하지 않으면 이를 금방 취소해버린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이의 권리지만, 이 과정에서 한 현실이 ‘대체’되는 일만큼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있었던 게 없었던 일로 되지는 않는다. 자신이 선택한 것과 걸어왔던 길을 부정할 수는 없다.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라는 식으로 전제를 부정하기보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싫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여기서 부정함은 상대방을 아예 없는 듯 취급하는 게 아니라, 그곳에 있음을 지적해야만 비로소 이를 피해 갈 수 있다는 쪽에 가깝다. 눈을 뜨지 않으면 운전하는 일이 불가하듯, ‘조우’는 시각적 이미지가 한 사건으로 변환되기 위해 요구되는 의식이다. 무언가를 본다는 건 그 시각적 발견의 주체가 동반되어야 하며 이게 없다면 결국 한 작품이 ‘바깥’으로 자기를 밀어낼 뿐이라는 말 밖에는 되지 않는다. 가령 <주술회전>에서 이타도리는 자신의 신체를 빌려 자행된 스쿠나의 학살극을 두고서 “내가 그랬다”고 말한다. 이후 이와 같은 진술은 ‘나는 너다’라는 표현을 거쳐 스쿠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단죄’의 기회를 얻는다. 스쿠나의 어주자가 세계를 가르는 참격이라면, 이타도리의 어주자는 영혼의 분할점을 찾아내는 쪽이다. 이타도리는 스쿠나가 잠식한 후시구로의 육체를 타격함으로써 스쿠나의 영혼을 분할한다. 이 참격은 여전히 한 세계를 대상으로 자행되지만 전자와는 달리 후자 쪽은 다소 상냥하다. 왜냐하면 전자가 한 세계로 갈라서는 것과는 달리 후자는 한 세계를 살아가게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타도리는 분명 친구와 함께 일상을 나누고 싶었을 뿐인, 그런 부류의 평범한 고등학생에 불과하다. 이런 일상의 ‘바깥’으로 밀려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타도리의 어주자는 영혼을 분할하는 쪽으로 발현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즉, 전자가 맞서 싸울 세계를 밖으로 밀어낸다면 후자는 자신이 살아갈 세계를 ‘발견’하고 이에 투입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대체 현실이 결과를 바꿈으로써 그에 영향받은 세계를 유기한다는 점을 떠올리면, 적어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자신으로 지정하는 일은 차라리 자신이 버림받을 각오를 한다고도 보여진다. 이타도리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난 이후의 전개는 얼핏 생각해보았을 때 그런 세상을 증오하거나 하는 쪽으로 분노를 발산하는 방향이 되었을 공산이 컸다. 자신을 바꿀 수 없다면, 세상을 바꾸는 쪽이 합리적일 테니까. 그러나 이타도리가 택한 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쪽도 세계를 망치는 쪽도 아닌 자신에게서 세계의 외연을 한꺼풀 벗겨 내는 일이었다. 자신에서 ‘바깥’을 분리해내는 일은 이를 부수거나 파훼하게도 해주지만, 일상을 되찾고 그게 스스로의 걷기를 통해 수행되고 있음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한 세계를 망가트리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대체’는 본래 있던 것들을 쫓아내고서 저버리는 일이 아니라 ‘자기’였던 것들을 끌어안는 방식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같은 성향이지만 달리 변형된 이 기술을 흑백논리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세계를 가르는 참격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시도 없이 무조건 서로를 배격하는 태도라고 말이다. 고죠와 스쿠나의 대결에서 무하한 주술은 마허라의 적응을 모방한 스쿠나에 의해 파훼된다. 여기서 스쿠나는 ‘하한이 없어 닿지 않는다’는 무하한을 두고서 ‘본보기’로 표현하며 이는 본 작품을 바라보는 한 가지 시사점이 된다. 작품이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예측할 수 있는 결말이 필요하다. 자유낙하를 끝내고 바닥에 발을 디뎌 걸을 수 있게끔 안전하게 착지해야만 한다. 이때 아무리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라도 ‘알아보기 쉬운 천장’이 존재하면 이를 밀어내기 위한 다양한 적응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렇게 제시된 목표는 내부에서 ‘바깥’을 분리해냄으로써 주체가 나아갈 수 있는 ‘다음’ 단계를 창안한다. 세계는 갈라서지만, 반대로 이를 통해서는 한 [세계]가 끝장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그야말로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한 채로 죽을 것인지, 줄곧 고통받으며 이를 받아들일 것인지를 양자택일하는 셈이다. <주술회전>은 후자를 택한다. 만화의 결말에서 이타도리와 친구들은 죽은 고죠로부터 충격적인 전언을 듣지만, “알게 뭐냐”하고 넘겨버린다. 특히나 후시구로는 “자신의 손으로 고죠를 죽였다”고 말하며 절망했던 것에서 한걸음 더 성장한 셈이다. 


<주술회전>의 기준은 어딘지 모르게 관점이 뒤틀려있다는 인상이 있다. 일각에서는 창작자의 사고가 뒤틀리면 작품 속의 윤리관도 뒤틀린다는 말이 있지만, <주술회전>은 그런 부류로 나쁜 쪽은 아니다. 권투를 할 때는 주먹을 피하려면 주먹이 눈에 닿는 순간까지도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이타도리는 주먹을 날리면서도 주먹에 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을 구하는 일에서는 사람을 잃을 것도 각오해야 한다는 이 간단한 사실이 매체에서는 쉽사리 묘사되지 않는다. 이는 물론, 매체가 현실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을 구하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서는 낙원의 답을 구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게 들리지만 매체에서는 이 질문 자체가 하나의 답안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타도리가 터무니없게만 보이는 악역들을 상대하며 “너는 나다.”라고 선언하는 일은 한 세계를 자신의 한계로 축소하면서 자기학대를 책임으로 변환하는 것과도 같다. 그런데 책임을 지는 게 어른이라는 존재라면, 책임이란 결국 아이가 고통받을 때 탄생하는 것은 아닐까. ‘존재하지 않는 기억’이 이타도리가 행복할 수 있었던 ‘대체’의 현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떠올리자. 이 기억은 정말로 존재했을 수도 있었던 상황을 시각으로 제시하고, 이를 따라 ‘바깥’을 생성한다. 이제 이타도리에겐 자신이 바라보아야 할 ‘전방’이 생겨난다. 



이타도리는 자신이 대체될 수 없는 존재, 스쿠나의 ‘그릇’임을 잘 알았고 이를 따라 스쿠나에게 “자신의 안으로 돌아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말한다. 이 상냥함이 너무 과하게 느껴지기도 하나,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직 우리가 살아갈 곳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심되는 면이 있다. 가령 영역을 전개하는 일은 그 안에 자기만을 남겨두면서 세계를 ‘바깥’에 둔다고 보는 쪽이 있고, 내부를 외부에 가깝게 확장하면서 자신이 안고 가야 할 현실의 총량을 키우는 쪽이 있다. 이타도리에게 스쿠나를 품는 일은 후자였다. 자신에게는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존재인 스쿠나를 품음으로써 외부를 내부로 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는 극을 진행하기 위해 목적을 부여하는 것뿐이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겠다. 결론에 다가서는 과정에 유동성이 커졌기 때문에 도리어 목표를 명확히 설정해 둘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현실이 대체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도리어 작품 안에서 더 과격한 것을 보고 싶어한다. 이것저것 따지기보다는 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기 편한 환경을 원한다. 매체의 유해함에 대한 일각의 우려와는 달리, 매체가 제안하는 ‘현실’이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아니라 바꿔야 할 현실이 이곳에 있다는 ‘혁명의 불씨’였다. 알아보기 쉬운 천장은 우리에게 하늘의 푸르름을 알려주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