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엔 전조증상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대개,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게 전조였음을 알아차리게 되곤 한다. 그러니까 전조는 한 사건을 예비하는 사태지만 반대로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는 감지되지 않는다. 전조는 한 사건의 앞쪽에 자리하지만 그럼에도 이후의 맥락으로만 사유된다. 이 점에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가스 냄새를 감지하다』라는 한편의 책을 쓴다. 카나리아의 죽음으로 가스 누출이 외견에서 감지되는 일은, 이미지로 그려낼 수 없는 파국의 심상을 이미지 안에서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변환된다. 한 이미지가 다가올 파국을 예견한다면, 이곳에서 우리는 카나리아의 스러진 날개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근 일 년 여간 소년만화들이 연달아 결말이 났고, 이들 중 다수는 팬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남겼다. 만화가 좋다 나쁘다를 평가할 문제가 아니라 결말에 안착하는 과정에서 바퀴를 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최애의 아이>와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는 나쁜 의미에서 팬들의 기대를 배신했고, 엇비슷한 시기 <조커2: 폴리아 되>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여기엔 분명 사람들이 예견할 수 있었던 결말이 있었는데, 작품은 이를 보란 듯이 배신했다.
어쩌면 예측이란 것은, 스스로의 한계를 결부 짓는 일일지도 모른다. 젊은 부모가 자녀의 예상 키를 접하면서 성장호르몬 주사를 고민하는 것만큼이나 우리는 한 작품을 두고서 나름의 효용을 둔다. 그리고 이 욕구는 인물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성장했으면 좋겠다와 같은 본능에 가까우며 뭔가 막 복잡하게 설명되지는 않는다. 예측이라는 말은, 우리가 상대방에 말을 전하기를 망설이게 된다는 점에서 미래에 대한 현재의 선제타격과도 같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이 싫어할까 봐 애초에 마음을 접는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설사 관계가 이어지지 않더라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처음부터 그런 건 가능하지 않았다고 ‘예측’했으니까. 후쿠시마 료타는 헤이세이 문학을 다룬 책 『나선형 상상력』에서 “작가의 절대성이 사라진 대신 독자가 새로운 ‘통일성’을 부여하는 장으로 출현한다”고 적는다. 특히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는 장기 불황의 시대는 하루키의 외로움이나 하루히의 엔들리스와 같은 고독으로 나타난다. 주인공의 성장이 불가해진 세계, 헤이세이는 마치 더는 진행이 불가능한 무대처럼 그들 자신의 미래를 내부로 연장해버렸다. 자신의 한계를 미리 정해 스스로를 가두어버린 이 세상은 그야말로 예측의 디스토피아였다.
예측의 디스토피아는 정당화하는 관점을 동반한다. 어차피 이런 결론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말하면 세상이 참 편해진다. 물론 배신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봉준호의 <기생충>에 대한 인터넷 유머글 중에는 이 영화가 어떻게 뻔한 신파에 이를 것인지를 논하는 게 있었다. 실제 공개된 영화와는 180도 달랐기에 도리어 더 화제가 되었던 이 유머글은 우리가 한 작품을 관람할 때는 항상 ‘예측’이란 게 존재한다는 걸 상기시켰다. 사람이 거리를 걷기 위해 중력을 이용하는 것만큼이나 작품을 판단하고 관람하는 일에는 항상 예측이 요구된다. 이를 따라 한 미래로 나아가는 일은 그와 같은 미래와 자기 존재가 배면으로 닿아있음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말하는 ‘미래’는 자신들의 내부를 돌파하는 게 아니라 이곳과 닮은 다른 평행 세계로 도피한다는 리부트의 세계선이다. 한 세계의 전제를 ‘대체’할 수 없으니 도리어 ‘나’를 대체해버리고야 마는 것이다. 에반게리온에 의해 제기돼 ‘2000년대 문제’라고 불리운 이 의식이 전환점을 맞이한 건 2019년의 레이와 시대다. 레이와는 ‘대체될 수 없는 ‘나’를 차이로 인식하고, 이를 자생으로 바라본다. 모든 미래에 살아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도리어 그 관찰의 지점이야말로 고유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화 <진격의 거인>의 결말은 등장인물이 극장에 앉아 그동안의 이야기를 ‘영화’로 관람하는 것으로 끝난다. 작품으로서는 꽤 식상하다고도 느껴지지만 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기에는 적당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진격의 거인>은 작품의 결말에 가서야 가장 첫 화의 이야기를 복선으로 밝히는 부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사야마 하지메는 작품의 결말만큼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밝히면서 첫 화의 제목이 “2000년 후의 너에게”인 이유를 설명한다. 미래의 자신에 의해 미래를 ‘보게 됨’이 밝혀지는 상황에서 순간은 참된 의미로 존재하는 시간이 아니다. 여기서 순간은 먼 미래에 닥칠 파국이 세계로 확장된 ‘판본’에 불과하다. 즉, 에렌 예거에게 ‘진격’이란 진보가 아니라 자신이 그와 같은 이후를 넘어설 수 없다는 ‘한계’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는 말하자면 그 미래가 닥쳐오기 전에는 무슨 일을 해도 살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뜻하기도 한다. <진격의 거인>은 만화에서 주인공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대체될 수 없음’의 성질과 결합해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헤이세이와 레이와의 징검다리가 되는 작품군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따라 키타데 시오리가 ‘고죠 사토루 문제’로 칭한 이 관점을 다시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이 만화에서 영역을 전개하는 일은 상대방에 가닿는 것, 그 마음이 곧바로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필중효과란 영역에 들어온 대상에게 자신의 공격이 곧바로 닿는 것이므로 공격의 ‘결론’에서 그 과정이 산출된다는 ‘예측’의 절차를 밟는다. 일반적으로 이 능력은 고죠 사토루의 공격이 무조건 실행되는 일로 이해되지만, 여기서는 그와 반대로 생각해보고 싶다. 영역전개란 무엇이든 받아들이게끔 마음의 열림을 강제하는 일이 아닐까? 고죠 사토루가 헤이세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그는 작가를 대신해 독자가 새로운 통일성을 받아들이게끔 하는 인물일 수 있다. 가령 <주술회전>의 작가 아쿠타미 게게는 고죠 사토루를 두고서 ‘알아보기 쉬운 천장이 필요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으며, 이는 고죠라는 캐릭터가 독자에게 하나의 통일된 기준을 제공함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무언가 거대한 것 앞에 놓여있었으며 이를 따라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는 일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게 경제위기든, 자연재해든 간에 개인의 힘으로는 별 어쩔 도리가 없으므로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고죠 사토루는 죽는다. 너무 강하게 나와서였을지는 몰라도, 알아보기 쉬운 천장의 붕괴가 암시하는 바는 분명 있다. 무언가를 곧바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헤이세이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이는 마음의 벽을 세워야 한다고 했던 2000년대 문제에서 조금은 다른 뉘앙스다. 오히려 레이와적인 인물은 <귀멸의 칼날>의 탄지로로, ‘맞서 싸운다’라는 결의에 찬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레이와 시대의 주체는 자기를 정립하거나 타자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무언가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조금은 더 능동적이다. 마찬가지로 이 관점에서 비슷한 시기 완결되었던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의 결말에 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다. 이 만화는 결국 ‘초능력이 없다면 애초에 영웅 같은 건 될 수 없다’는 자기 속박에로 돌아가 버린다. 차연(difference)이라고 보기에는 그 과정에서 성장이라고 할 법한 게 있었는지도 의문이고, 한편으로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를 넘어서 어른이 될 수 없다고 보는 쪽의 피터팬 콤플렉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스로 방벽을 세워 그 안에 틀어박혀 버렸다는 점이 독자가 등을 돌린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마음의 벽은 너무 낡은 문제다. 아니, 이건 태도의 문제다.
키타테 시오리는 <주술회전>에서 마히토의 역할을 ‘저주’로서의 자기존재방식으로 부르면서 이를 근원적인 자유로움을 체현하는 문제로 해설한다. 여기서 VADOMRI의 의견을 따라 이 ‘저주’를 도미닉 보이어의 제안으로 톺아보자. 도미닉은 『저주체』에서 모턴의 발언을 인용하며 “만약 생존이 ‘계속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유기체의 ‘생존’은 평형 상태를 달성하려는 DNA의 죽음충동에 따른 결과”라고 말한다. 이는 <주술회전>이 말하는 주령의 개념,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에서 태어난” 특급주령 마히토가 이타도리 류지와의 아치 에너미 관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한다. 마히토의 탄생이 죽음충동의 일종이라면 그에게 삶은 ‘생존’이라는 평형을 유지하는 일련의 과정에 불과했을 테다. 바꾸어 말해 작중에서 말하는 ‘저주’란 속박을 통해 주술의 효력을 상승시키는 평형 유지 정책이다. 삶 자체가 생존이 아니라 생존의 행위에서 삶이 파생되어 나온다는 이 관점은 료맨스쿠나가 줄곧 말해왔던 약육강식의 법칙이 왜 ‘저주’의 형태로 묘사되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같은 의미에서, 이타도리가 마히토와 스쿠나를 상대하며 “나는 너다. 너는 나다.”라고 말했던 일도 서로의 상동기관으로서 이를 풀이한다고 볼 수 있다.
<진격의 거인>이 이미 자기 자신을 예측의 범주에 넣기 때문에 생존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면, 작품이 말하는 수미상관의 구조는 ‘역사’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생존’의 한 형태다. 만화는 에렌 예거의 사후에도 전쟁이 반복되고, 이를 토대로 역사가 반복될 것임을 암시하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영화’라는 메타성으로 후퇴하기까지 한다. 이는 작품을 내재적으로만 이해하기보다 인류의 역사가 큰 틀에서 자기속박이라는 저주에 걸려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특히, 이 전개에서는 ‘알아보기 쉬운 천장’으로 영화가 제시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진격의 거인>이 결국 정해진 미래에서 출발한다면, 이를 다시금 작품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헤이세이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회피’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진격의 거인>은 작품의 결말에서 다시금 새 역사를 출발시키기보다 이에 응수하며 역사의 충동에 ‘맞서 싸우는’ 쪽을 택한다. 이타도리도 그렇다. 이타도리가 시부야에서 스쿠나의 학살극이 자신의 육체를 빌어 이루어졌으니 그 과오도 자신의 것이라며 선언했을 때 여기서 발현하는 것은 ‘자기책임의 저주’다. 스스로의 손으로 끝내지 않으면, 그 자신도 이후에 잔류하는 일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이전에 디디-위베르만은 파국의 사태를 예견하는 추상으로 ‘반딧불의 잔존’을 언급하고, 이를 감지하는 게 역사가의 의무임을 역설한 바 있다. 특히나 ‘냄새’는 이미지에서 감지할 수 없는 심상이기 때문에 이를 이미지에서는 어떻게 발견할 것인지가 질문으로 남는다. 개인적으로 헤이세이 만화군의 문제의식은 ‘터널’이었다고 생각한다. 시대의식이 대중이 공감하는 보편정서라면 이를 이미지로 표현할 방법은 무엇일까? <블리치>의 영왕이나 <나루토>의 혈통문제 등, 너무 오래전에 기원해서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문제들이 산재한 가운데 이 세계는 주인공의 길을 따라 나아가고 있다. 여기서는 이치고의 ‘집에 들어오는 사람 쫓아내기’ 정도의 수동성이나 나루토의 ‘동네 이장되기’ 정도의 소극적인 태도, 즉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정도의 의식밖에 없었다. 닫힌 세계로서 작품군이 묘사되었다고 보면 좋다. 그러나 레이와 시대에 들어서게 되면 정의의 문제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다. 이 시대에서 자유는 자신이 무언가를 추구할 권리가 아니라 자신이 무언가에 포섭되지 않을 권리다. 즉, 구조화에서 형상화로의 이동으로 보아도 좋겠다. 대체될 수 없는 나를 고유함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국 자생의 논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