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은 「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에서 “경험할지도 모르는 현실에 대한 확률론적 관념”을 언급한다. 용어에는 차이가 있지만 다들 암묵적으로 느끼며 공감하는 것들을 생각해보게 됐다. 가령 공학자인 내 관점에서 이론가의 글은 이게 그런 부류의 맥락이었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한다. 내면에 갇혀 도돌이표를 찍는 언어가 한 집단의 불안과 같은 감정을 나쁜 쪽으로 증폭하는 일 등이 그렇다. X와 같은 SNS, 또는 커뮤니티 사이트 등에서 우리는 이런 일을 경험한다. 한 문화에 소속되어 있다는 동질감이 어떠한 사고와 행동을 추동하는 일은 시네필 사이에 ‘그거’가 무엇인지를 마땅히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서로를 연결한다. 그리고 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연결될수록 더 외부를 밀어낸다.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내부를 형성하는 쪽으로 한 세계를 밖에 밀어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제된 사고가 집단지성으로 발휘되기도 하지만, 악한 감정들이 모여 멘헤라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요괴나 악령이 출몰하듯, 세상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오컬트 현상으로 등장해오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마크 피셔의 ‘으스스하고 기이한 것’에 대한 개념 정의를 떠올려보자. 그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바깥의 상실’로서 규정하면서 이를 후퇴 불가능한 상황에 빗댄다. 헌데 이 상실은 우리가 외부로 나갈 수 없게 된 게 아니라, 스스로의 미래를 ‘없음’이나 ‘불가능함’으로 정의하며 내면의 도돌이표를 찍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포스트 시대의 영화 이미지란 자신의 운명을 예측해서 이를 토대로 자기를 재배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 과정에서 ‘오컬트’란 없음에서 있음으로, 불가능에서 가능함의 존재로 스스로를 이끌고자 하는 선택을 내포한다. 세계의 ‘바깥’이 아니라 바깥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오컬트라는 장르에 있다.
<단다단>은 오컬트 장르의 만화다. 터보할매를 만나 저주받은 남자 주인공이 외계인에 의해 염력을 각성한 여자 주인공과 콤비를 이룬다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되찾기 위한 계약이 이루어지고, 수행 중에 여러 괴이들을 마주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이를 언급한 건, 이 작품이 이와 같은 오컬트를 외부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한 세계를 점유하는 두 개의 단체처럼 설명하기 때문이다. 김신의 관점으로 보면 시네필에게 ‘외부’는 선험적인 무언가이므로 동시에 선제타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들’을 처치하기 위해 우리가 모였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이 집단의 폐쇄성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기 쉽다. “알만한 사정을 공유하는 내부자들”과 “별도의 대화나 인식론적 합의를 거칠 필요도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전제”는 괴이의 존재를 당연히 여기는 영매사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혹은 마블 영화에서의 카마르 타지와 생텀이 생각나기도 한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기를, “본래부터 세계는 우리가 지켜왔는데 사람들이 인식을 못했을 뿐이다.” 두 작품은 주인공이 본래부터 어떠한 능력을 발현할 가능성을 갖고 있되, 이를 단지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아무런 정보가 없을 때는 그저 아름답기만 하던 동네가 특정한 맥락을 거친 후에는 잔혹하게만 느껴지는 일(서태지, <소격동>)은 우리가 세계를 정복하거나 다치게 하지 않고서도 이들을 바깥으로 추방할 수 있음을, 또한 공간을 점유하지 않고서도 한 세계를 탄생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눈을 떴구나. XXX로 오거라.”라고나 할까. 시네필에게 영화는 현존하며 나아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며, 자신을 한 세계로 분절한다는 점에서 선제타격의 대상이 된다. 그 영화에 자신의 운명을 고정하면서, 이를 진자 삼아 앞으로 나아가려는 플랫포머 게임처럼 시네필들은 행동한다.
여기에는 분명 어떤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를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을 때,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의 ‘감정’을 설명하려 든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아니다. 불이 뜨겁다는 점만 알면 그게 왜 뜨거운지를 몰라도 요리라던가 사냥이라던가 하는 쪽으로 응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벼락이 쳐서 산불이 나는 일을 두고서 신의 천벌이라던가 하고 생각한다면, 이는 자연재해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쪽으로 내면의 불안을 해소하는 것뿐이다. 종교의 발생은 현실에서 해소할 수 없는 것을 두고서 어딘가로든 ‘배출’해야만 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바꾸어 말해 ‘현실’이 어떠한 고정점이자 배후를 둘 수 없는 ‘바깥’이 된다면 여기에 운명을 부여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다. 시네필에게 영화 문화가 종교의 일종으로 해석되는 것엔 어느 정도 이런 이유가 있다. 오컬트의 매력 중 하나는 우리가 괴이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철학이 낙원의 행복 증명식을 찾으려 들 때 종교/오컬트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고정이 존재와 같은 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자신이 존재하는 이상 대응항에 존재하는 외부 또한 동등하게 존재한다. 이를 따라 선제타격은 자신의 현존을 긍정하기 위해 행해지는 의식이 되며, 시네필에게 ‘영화’는 이러한 점에서 ‘하나’가 되려는 움직임을 생성한다. “왜 우리는 끝까지 가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영화를 보는 일은 인간이 죽음을 마주하는 존재이기에 성립하는 하나의 반복인 것이다. 영화를 본다는 건 죽음을 겪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어서 차라리 죽음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아연 클라인헤이런브링크의 말처럼, “’저주의 상태’에 처한 반복은, ‘법칙에 맞서 자신을 주장하고 법칙의 하부에서 작동하며 어쩌면 법칙보다 우월할’ 내부적 반복이 논리적으로 외부적 반복에 선행한다는 점을 무시한다.”
티모시 모턴의 말처럼 반복이 죽음충동의 특징이라면, 자기반영에 갇힌 시네필들의 내면은 영화가 선사하는 죽음의 경험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일 테다. 내가 아는 것을 상대방도 알고 있으리라는 가정은 이들이 속한 공론장에 대한 폐쇄성에 귀인하는 게 사실이나, 그와 같은 폐쇄성은 결국 우리가 기후변화의 시대에 하나의 온실을 살아갈 뿐이라는 점에 귀인하는 탓도 분명 있다. 여기에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 있지만 그 누구도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는다. 김신의 말처럼 ‘방 안의 코끼리’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모두가 암묵적으로 아는 사실에 관해 괜스레 이야기를 꺼내봐야 입이 아파서기도 하다. 어떤 이들에겐 먼 미래의 후손이 마주할 고통보다 당장 자신이 누리게 될 부와 명예가 더 달콤하기 마련이다. 이미 후손들에게 물려줄 지구 따위는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기후변화에 대한 극복을 포기하게 된다. 언젠가 때가 되면 이 놀이터를 떠나야만 하게 됨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한 세계를 산다는 건 언젠간 이 세계를 떠나야만 한다는 뜻이며, 단지 먼저 태어나서 먼저 삶을 떠나는 일만 다를 뿐이다. 한순간을 보내던 열정이 점점 식어가면서 더 넓은 세계로 나가는 자신과 이를 따라 점점 축소되는 자신의 옛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꺼져가는 백색왜성을 보는 것만큼이나 참담하다.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모든 게 치기 어린 한 때에 불과했다고 말하기에는 당장에 가진 공론장의 힘이 너무나 크고 영향력 있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이야기 안에서는 이런 일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본래 이야기란 것은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어서 ‘결말’을 극복하는 일은 그리 중요한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나 끝이 공평하게 찾아오는 법이라면 끝까지 가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건 어떻게 끝으로 가는지다.”
웹진 인-무브의 「인문사회 학술생태계의 파국과 미래」에서 진술하듯, 최근 인문연구에서는 현상에 대한 적확한 지적을 능숙하게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이론적인 배경이나 도입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거나 비교적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점에서 시네필 문화도 자유롭지는 않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금을 서술하려는 시도가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시네필 문화도 결국 한때에 불과하다고, 그러니 서로 무언가 싸움박질을 하더라도 다 애들 싸움에 불과하니 좋게 넘기자는 식으로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각자의 담론과 주장을 갖고서 무언가를 주고받는 모습은 그 장소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면 그 자체로 거대한 역할극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역할극을 수행하는 시네필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서로 치고받는 링 위의 결투처럼 보이지만 어차피 그 누구도 이곳을 나갈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한 게임에 불과하다. 혹은, 삶의 역할과 단계적인 발전을 요구받는 상황에서 여전히 남기고 싶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불과할 수도 있다. 삶의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어린 시절로 후퇴해버린 <오징어게임>의 이상하고 잔혹한 세계처럼, 오늘날 시네필 문화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을 두고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유년기에 매달리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서브컬처 앤솔로지 『포틀럭은 당일에 준비하는 게 좋다』에 실린 이십칠의 「봇 뒤에 사람 있어요? - 개인봇 경험에 대한 인터뷰」는 이와 같은 일에 대한 단편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X의 개인봇에 대한 운영 경험을 인터뷰한 이 모음집에서는 역할극 자체가 주는 몰입의 경험을 서술하면서도 동시에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레 시들시들해졌다는 진술이 발견된다. 그냥 나이를 먹으면서 영화는 결국 자기 세상의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때 자기였던 것을 두고서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가고 싶지는 않다.
메인 컬처가 자신의 삶이라면, 여기서 시네필 문화는 삶의 서브로 분류되면서 점점 더 역할극을 강요받는 서브 컬처로 전락하고야 만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거’로 주문되는 시네필 문화의 한 축이 삶에 대한 강한 의지처럼 느껴져서,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고인의 사인에 암묵적으로 침묵하듯 우리는 서로의 죽음충동을 묻지 않는다. 바꾸어 말해, 누구에게나 자신이 지켜야 할 죽음이란 게 있다면 이를 어떻게 수행하는지는 개인마다 다 다를 것이다. “지식의 저주에 걸린 것은 너뿐만이 아니다.”라고 타노스는 말한다. 그리고 『저주체』에서 도미닉 보이어는 불멸은 역설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없”애기 때문에 죽음을 상쇄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즉, 죽음이란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환대해야 한다. 그게 역할극이라 하더라도, 사고를 무효화하려는 욕망 그 유년기의 추구는 우리에게 ‘생존’을, 계속 살아가려는 마음을 가리킨다. 영화를 볼 때면 아무런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세상 모두의 복잡한 것에서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영화가 언젠가는 끝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우리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현실에서는 무언가를 끝낸다는 일이 갑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게도 느껴질 때가 많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는 딱히 이런 식의 끝을 마주하는 일에 별다른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아마 그건 영화가 우리 삶의 작은 죽음(LA PETITE MORT)이기 때문일 테다. 영화를 공부하면서 모든 것을 영화에 견주어 생각하게 된 나는, 관심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도 결국에는 영화의 방식으로 말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는 내 삶의 유년기를 담당한다고 보아도 좋겠고, 그런 점에서라면 영화의 힘을 빌려 말하는 건 “과거에 분리되어 상실에 열려 있는 미래를 살아”가려는 욕망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