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올해 인상 깊었던 작품이 있는지를 묻는다면 <우마무스메: 새로운 시대의 문>을 꼽고 싶다. 프렌차이즈에 대한 선호라기보다는 이런 느낌을 주는 작품을 좋아한다. 우선 작품의 컨셉은 실존했던 경주마의 경기와 그에 담긴 서사를 의인화하는 것으로, 한 현실에 대한 가상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어느 정도 재연극의 성격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어떠한 현실을 수행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 작품이 흥미로운 지점은 그와 같은 재연극이 단순한 모사 관계에서 벗어나 그 자신을 고유하게 하는 순간이다. 실존마의 내러티브를 ‘연기’할 뿐인 캐릭터가 갑자기 이를 벗어날 때, 현실에서는 다리가 부러져 안락사를 당했던 순간의 ‘이후’로 향하기를 택할 때 이 일탈은 존재의 고유함에 대한 운동이 된다. 즉, 이전까지 대체 현실을 연기했었지만 이들이 그와 같은 ‘이후’에 맞설 때 그저 반복일 뿐이던 세계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게 된다.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거듭나면서 자기만의 서사를 수행하는 일은 이들이 한 결말을 넘어서게 한다. 현실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것이라거나 하는 식의 결론이 가공의 결과로 대체됨에 따라 이곳에는 대체 현실이 아닌,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생겨난다.
살다 보면 자신은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거대한 톱니바퀴의 안의 부속에만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동시에 이런저런 고민이나 감정들을 떠안는 건 모두 나 자신이라는 점을 깨닫고는 한다. 그러니까, ‘나’는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존재이지만 그런 감정들을 오롯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든’ 될 수 있으면서도 ‘누구나’ 느낄 법한 감정으로 ‘우리’가 된다. 이러한 SAC는 대체현실이 왜 대체될 수 없는 자신에 관하는지, 왜 사람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는지를 잘 설명한다. 한 결말을 마주하는 일에서 예외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결말은 살아있는 한 누구나 보게 되는 풍경이고 그 안에 속해있는 자신을 보는 것은 필연이다. 무언가를 본다는 건 결국 상을 맺기 위해 요구되는 거리가 있으므로 마찬가지로 삶을 살아가는 일 또한 앞으로 마주하게 될 풍경들을 눈에 담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안에서, 우리는 그 모든 일에 자신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상황이든 상상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결국 나 자신의 미래인 것이다. 즉, 대체현실은 항상 대체될 수 없는 자신을 동반한다. 이 점이 대체현실의 매력이고, 또한 실패를 극복하는 방안이면서 감정적인 유대를 쌓는 방식이다.
마치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마음속에 있는 공허감을 감출 수 없다. 어쩌면 ‘나’란 것은 손쉽게 바뀔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으로만 지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과 자신을 나누는 얇은 벽에 의지해서만이 비로소 ‘나’라고 믿는 것을 믿을 수 있다. ‘나’는 약간의 믿음 만으로만 지탱되는 존재인 셈이다. 버츄얼 방송인의 방송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아바타와 연기자가 서로 하나 되어 캐릭터를 이루는 가운데, 연기자는 대체될 수 없는 존재로서 아바타를 움직이는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동시에 아바타는 연기자가 가상 공간에서 자신의 꿈을 수행하는 발판을 제공한다. 익명을 특징으로 하므로 존재의 현실감이 실물 방송인보다는 미약한 가운데, 자신을 잡아두는 인터넷 공간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허구처럼 여겨진다. 이 대체현실에서 버츄얼 아바타를 움직이는 ‘나’는 아바타를 바꾸더라도 여전히 식별될 수 있는 몇몇 표식을 남긴다. 이는 버츄얼 방송인이 캐릭터를 졸업하더라도 팬들이 다른 캐릭터로 활동하는 안의 사람을 알아챌 수 있게 한다. 이에 버츄얼 문화에서는 졸업했던 방송인을 다른 곳에서 마주하더라도 아는 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존재한다. 자신에게 대체될 수 없는 무언가를 대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연기자가 버츄얼 방송의 핵심인 건 분명하다. 같은 아바타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캐릭터로 받아들여지는 일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아바타는 바꾸더라도 이를 운용하는 연기자를 바꾸는 일은 잘 없으며, 이런 경우에는 보통 1대와 2대처럼 명확히 구분 짓고는 한다. 보통 아바타는 연기자와 결합해 하나의 캐릭터를 형성하므로 안의 사람만 바꾸는 일은 잘 없지만, 한 존재를 연기하는 이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이에 침묵해야 하는 모습은 마치 대체현실을 연상케 한다. 자신은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한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대체할 수 없는 ‘나’라는 것. 작은 시장에 많은 버츄얼 방송인이 있다고 보면 이 시장이 얼마나 과포화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여러 방송을 한번에 볼 수 있다 한들 특정 대기업에 수요가 몰리는 것 매한가지고, 방송인의 전체적인 등급 또한 양극화된다. 이 점에서 일차적으로 버츄얼 방송인은 시청자에게 쉽게 대체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는 비단 버츄얼 방송 시장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현실에서도 한 개인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느끼는 바는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청자가 모르는 자신의 모습에서 그와 같은 면이 강조된다고 보여진다.
대체현실의 존재자인 버츄얼 방송인에게 이 공간은 잠시나마 자신이 아닐 수 있는 곳이면서, 사람들에 외면받더라도 그게 안의 사람인 나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받는 곳이기도 하다. 즉, 대체될 수 없는 자신을 확인하는 자리다. 이에 과몰입을 유발할 만한 행동이나 담소를 나누게 되며 이를 적절히 분배하는 게 인터넷 방송의 주된 행위기술로 알려졌다. 현실의 연예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줄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일이 실질상에는 아니라는 점에서 오는 괴리감이 크다. 바로 그렇기에 버츄얼 방송인은 감정적인 부침을 겪기 쉬운 듯 보인다. 버츄얼 방송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드러내지만 반대로 자신이 손 쓸 수 없는 무언가가 바로 ‘나’로 여겨지기 쉽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는 자신을 이루는 본성이나 심지가 되지만 현실과 가상 간의 관계에서는 한계로 여겨지기 쉽다. 자신의 존재를 발판 삼아 뻗는 손이 환상에 닿을 때는 자신을 잡아두는 곳이 더 생각나지 하늘에 닿고 있다는 느낌이 더 생생하지는 않을 테다. 누구든 될 수 있고, 누구나 느낄 법한 감정들을 말하는 건 반대로 이를 수행하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한다.
‘나’에 대한 의심은 자신이 느끼는 자아와 세계가 얇은 막으로만 둘러싸였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SAC를 유발한다. 버츄얼 방송인의 방송 수명이 짧은 건 아마 이런 사연이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간에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모습들에서 대체할 수 없는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예외로 걸러지지 않는 한계들을 직속으로 마주하게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이유로 자기 존재를 드는 게 대표적인 예다. 여기서 멋지게 맞서 싸우라고 말하면 좋겠지만, 한 현실이 쉽게 대체될 수 있는 곳에서는 그와 같은 흐름 이후에 생존할 수 있을 공간이 마련되지 않는다. 애초에 자아라는 건 무언가에 작용하지 않으면 반향이 도출되지 않으므로 맞서 싸운다는 말은 구태여 꺼낼 필요도 없을 정도로 당연한 일이다. 손을 뻗으려면 그만큼의 공간이 필요하다. 즉 우리는 알에서 태어나있고 모든 것은 ‘바깥’이다. 여기서는 단지 대체가능한 것과 대체할 수 없는 것 사이에 아주 작은 믿음만이 자리한다는 점이 존재의 고독과 허무함을 이끈다. VR 트래커를 착용하는 경험에서 알 수 있듯, 둘 사이에는 자기에 대한 한계가 명시적으로 배제되어있으며 여기서 3D 멀미가 생겨난다.
화면 속에 표출된 가상의 손과 현실에서 기기를 잡는 자신의 손은 서로 다른 것처럼 여겨진다. 이를 위해 가상은 착용자의 뇌를 속인다. 버츄얼 방송도 비슷하다. 버츄얼 방송에서 아바타로 가상에 노출되는 연기자는 그와 같은 존재를 ‘나’라고 여기기보다 ‘그것’에서 자신을 방어하려 든다. 가상 공간에서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고, 시선의 교류나 대화의 문맥 등에서도 이런 건 받아들여지는 쪽에 유연하게 노력할 수 있는 부류로 여길 수 있다. 물론 버츄얼 방송에서의 ‘존재’란 아바타와 연기자가 이루는 조화, 그 화음에서 ‘캐릭터’라는 이름의 고유성을 획득하는 게 사실이다. 자신이 현실에서는 어떤 사람이든 간에 자신의 내면에 침투하지 않는다. 인체는 몸과 다른 항상성을 가진 외부를 생리적으로 밀어내기 마련이어서 그것들은 존재의 부유, 혹은 가단성 같은 부류에 그친다. 이른바 차이와 반복인 셈인데 진부하지만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가닿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일은 결국 내부를 한 세계로 채우는 일밖에 더 되지 않아서 항상 변화에 있을 수밖에 없다. 버츄얼 방송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대체할 수 없는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