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mqjYP2Kjpg4&list=RDmqjYP2Kjpg4&start_radio=1
요즘에는 어디를 가나 인공지능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심지어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것마저 ‘AI’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가령 삼성전자의 노트북 수리 구독 프로그램은 ‘AI 구독클럽’으로 불리는데 가만히 듣고 있으면 대체 어디에 AI를 사용하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 뭔가 음이온 양이온 같은 게 생각나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AI의 본래 뜻을 고려하면 이런 사례도 무난하게 살펴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현시점의 인공지능은 무언가 언어의 본뜻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맥락을 모사할 뿐이다. 마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대충 분위기를 따라 맞장구치는 대화처럼, 인공지능은 단지 맥락을 따라 모사하기만 할 뿐이다. 특히 ChatGPT 같은 대화형 AI 모델의 경우 객체 지향적으로 프로그램 돼 있어서 항상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상대방을 미리 전제하곤 한다. 그는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면서 우선은 반응을 살피며 대화를 이끌어간다. 이 과정에서 사용자는 마치 AI가 자신을 이해한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는 모델이 ‘맞장구’를 잘 쳐주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AI한테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이해하고 있는지 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AI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으면서 동시에 ‘나’를 비춰 준다는 것, 이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이다. AI란 위상학적으로 볼 때 내부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시선에 담긴 내부를 선사할 수 있다. 그래서 AI가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걸 만들어내진 못해도 우리가 모르는 곳을 최대한 없게끔 할 수는 있다. 모르는 곳이 없으니까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생각하게 된다. 평평한 땅을 밟고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이른바 AI 란 내부 없이 우리의 얼굴을 비쳐보이는 ‘거울 차원’이다.
AI 이야기를 하며 거울 이야기를 꺼낸 건 결국 ‘표면’이라는 주제를 말하기 위함이다. 얼마 전 유튜브에 올라온 심통봇의 ‘고스타그램’을 보았다. 이 영상이 음원으로만 구성됐음에도 ‘보았다’고 표현한 건 음악 전체가 AI를 이용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대개 AI는 자신이 모사한 대상의 앞에 서 있지 않을 때 원본 없이 놓인 그림자처럼 무언가 어색함을 자아내는데, 이 음악에는 그런 게 없었다. 합성음원은 A곡과 B곡을 샘플링해 서로 병합하거나 하는 식의 클럽풍 곡으로 속성되곤 하나, 이 곡에는 별다른 원본이 없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을 가리키는데, 하나는 이 곡이 그 자체로 하나의 원본이 될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곡이 참조한 것이 음악 자체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전자는 알다시피 고유함을 뜻한다. 아무런 것도 모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개체 값을 획득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따라 고스타그램은 애플 뮤직과 같은 음악 플랫폼에 업로드 되기도 하는 등 정식 음원으로 인정받은 상태다. 후자는 이 곡이 사람들의 추억을 참조한다는 점이다. 해당 음원이 올라온 유튜브의 댓글란을 보면 “2010년대 초반 느낌이 난다”는 이용자의 진술을 볼 수 있다. 2010년대 초반 같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진술에서 확언할 수 있는 게 있다. 이 곡은 창작자의 특정한 시기를 참조해 만들어졌고 그에 따라 ‘음악’은 모사물을 갖지 않게 됨으로써 개체 값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물론 모방 없이 존재하는 건 이 세상에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평평한 표면 안에 존재한다면야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AI음악은 내부를 지님으로써 자신이 참조한 레퍼런스를 선보이고는 한다. 사람들은 이 레퍼런스를 찾는 일을 음악의 감상 포인트로 삼는다. 그러나 이 음악은 별개의 판본이 될 수는 있어도 무언가를 ‘발견’하게 할 수는 없다.
‘발견’은 무언가에 발이 걸린다는 뜻이다. 길을 가다 발이 걸려 문득 마음을 쓰게 되는 일이 바로 발견이다. 한 음악 안에 발을 걸리게 하는 게 없을 때 우리는 바깥에 나돌게 된다. 음악 안에서 레퍼런스를 발견하면, 음악에 얽힌 무언가를 따라 가장자리를 터벅터벅 돌게 되지만 반대로 음악으로 가는 문이 닫혀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AI의 참기능이란 그런 것일 수 있다. AI를 통해 제작된 창작물은 대개 여러 곳에서 따온 문맥을 경유하는 경향이 있는데 기능이 고도화할수록 이는 점점 옅어진다. AI를 통해 산출된 문맥은 겉으로 보기에 일반적인 문장과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이는 사실 문장들의 관계를 따라 연결한 것일 뿐, 그 속뜻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연기하도록 프롬프트가 짜여있다면, 우리는 이를 두고서 이해하고 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표면이 매끄럽게 짜인 한 대상이 있다면 우리는 여기서 어떤 형태로든 내부를 찾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 표면에 반사된 대상에 참여하게 된다. 즉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영화가 바로 이것과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영화를 관람한 편수가 늘어날수록 영화에 대한 학습데이터량이 심화하는 바, 영화는 내부로 침입하는 일 없이 표면에 반사되는 것만으로 자신이 알고 넘어간다고 생각되는 때가 늘어난다. 그래서 영화를 많이 볼수록 영화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며 대충 흩어보고 넘어가는 일이 늘어난다. 이 경우에는 영화를 보다가 무언가 발이 걸려 넘어질 일은 없지만 반대로 무언가 대상의 기원을 찾기란 어려워진다. 시네필들이 가장 싫어하는, 영화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사라지게 되면서 그것들을 동시대의 다른 영화들에 나란히 두는 일이 성립한다. 그리고 영화에 우열이란 게 없다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그런 것들을 부정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급진적인 주장을 하나 해보고 싶다. AI를 통해 제작된 작품이 단순히 질적인 면에서 일반적인 작품과 동일한 수준에 오른다면, 우리는 이를 인정해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창작의 과정에 담긴 시간이나 고민이 ‘태도’를 결정한다고 말하면서 AI 작품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테다. 하지만 만약 별개의 판본으로서 한 작품이 성립한다면 어쨌거나 이는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 특히나 내부가 갇혀 판판한 평면을 지녔다면, 안을 참조할 일도 없이 그저 안전하게만 이곳을 넘어갈 수 있을 테다. 이 점은 별개의 판본으로 인정받는 순간 도리어 안을 더 들여다볼 일이 사라지게 됨으로써 자연스레 관심도 끊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볼 일이 없다는 것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런 일에 관심을 둘 일이 없을 만큼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표면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통하는 건 주변에 달라붙는 파라텍스트들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무대를 형성할 수 있고, 그 무대에서 다른 것과 연회를 즐길 수 있다. 정말로 그 시대에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는 작품들에서 그 시대의 분위기와 향수를 읽어내는 일은 어쩌면 우리가 포스트-진실이라 부르는 이 시대에 필요한 덕목일지도 모른다. 마치 AI를 통해 생성한 범인의 몽타주가 우리 모두를 생생한 과거로 돌려보내듯, 매끄러운 평면은 보는 이의 사고를 주변부로 분산할 수 있다. 주변부로 분산된 생각은 무언가 사건에 집중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게 아니라, 더 많은 곳에 이를 가닿게 함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원본의 한 영역이 되어준다. 가공의 원본으로서 달라붙고, 이를 통해 ‘대체 역사’를 성립시킨다. 이 과정 안에서 우리는 자신에게는 바꿀 수 없는 것도 분명 있고, 나 자신이 꼭 변하지 않더라도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AI의 불쾌한 골짜기는 이제 유쾌한 평면체로 변모한다.
반대로 이런 생각도 가능하다. 일반적인 작품과 별다른 구분이 되지 않는다면, 이들을 바라보는 일에서 AI 창작 사실을 구분 짓는 일은 창작의 윤리나 태도 문제이기 전에 무언가 선입견을 심는 행동이 될 수 있다. 이 선입견은 우리가 한 과거를 떠올리는 것만큼이나 그 지점을 토대로 주변부를 탐사하는 ‘기지’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이 선입견은 선행해서 존재하는 ‘단차’가 아니라 ‘착오’로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바깥’을 돌려주는 역할을 한다. 작품을 제작하거나 유통하는 방식에 따라 질적 퀄리티가 달라진다는 말은 이들이 세월을 거침에 따라 안으로 무언가 침입할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이 침입에서는 무엇보다 바깥으로의 여정을 확보할 가능성이 점점 늘어나게 된다. 이따금 한 장소에 깊게 머무르는 일은 그만큼 더 많은 관용이나 이해를 포괄하지만 반대로 한 세계와 함께 노화하는 게 아닐지 생각해보게 된다. 만약 한 작품의 기능이 예술적인 성취를 발휘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화합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각자의 속내를 잠시나마 양보할 의향이 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그러니까 영원불멸한 건 없고 계속해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마땅하다. 이 축제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화합의 축제는 모두의 마음을 바깥으로 밀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내부에는 어떤 쪽으로든 ‘공허’가 있다. 이 마음의 상실이 일어나더라도, 인간의 마음에는 우열이 없기 때문에 이런 양보에는 별다른 문제 될 것이 없다. 즉, AI 특유의 맞장구는 내용을 따라가는 것이기보다 문맥을 따라가는 쪽에 가까워서 그 누구라도 분위기를 따라 춤을 출 수 있고, 또 즐길 수 있다. AI가 만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 착오하는 이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