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가 있는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형태가 없는 것 역시 언젠가는 사라진다.
남는 것은 기억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어메이징 디지털 서커스>는 비교적 이름이 알려졌지만 반대로 유명하다고도 보기는 힘든, 그런 작품이다. 가장 큰 이유는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고 있다는 점인데, 넷플릭스 등에 판권을 제공하기는 했어도 유튜브가 올해 8월 기준 6화를 공개한 것과 달리 넷플릭스 쪽에서는 4화까지만 올라와 있다. 이는 즉, 제작사측이 넷플릭스에 의도적으로 공개를 늦춰달라고 요청했다는 뜻이다. 여하튼 <서커스>는 알고 보면 어두운 설정이라는 컨셉으로 팬층에 많은 호응을 얻었는데, 이런 경향은 몇 년 전 아동층에서 <언더테일> 같은 작품이 인기를 끌었던 일의 연장선에 있다. 우선 작중 인물이 그들 자신의 ‘가상’을 인지한다는 점이 그렇고, (비교적) 아기자기한 그래픽풍으로 무언가 섬뜩한 이야기를 그려낸다는 점이 그렇다. 이들 작품은 한 장소에서 세계의 배후에 비밀이 있다고 바라보기에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 어떠한 ‘탐험’이 성립한다고 본다. 즉, 이 세계에는 아직 가능성이란 게 남아있다고 보는 셈인데 그렇게 보면 어른보다는 아이들에게 이런 장르가 인기 있는 이유를 이해하기 쉽다.
흥미롭게도 그런 탐험은 ‘호러’ 장르와도 얼마든지 결합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판의 미로>나 <캐럴라인>은 집과 마당이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출발해 미지의 세계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아이들이 상상친구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자신이 아는 공간에서 ‘가상’의 공간을 발견하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다. 이런 점이 <서커스>에 대한 아동층의 수요를 견인했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하지만, 결과론으로 보면 그렇다는 소리다. 소모적으로 끝날 걸 알면서도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이들 장르에서 ‘탐험’의 역할을 말하기 위함이다. 일반적으로 탐험 장르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게 주된 목표로 여겨지기 쉽지만, 사실은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을 그려내는 일에 더 치중한다. <원피스> 같은 만화를 봐도 동료와의 우정이 메인이고 무엇이 ‘원피스’인지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작중 인물들은 원피스가 발견되면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말하면 이 세상이 아직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세계가 매끈한 구체가 아니라 약간의 틈새라도 있다면, 이를 비집어 들어갈 수 있다고 말이다.
아이들이 탐험을 좋아하는 건 이런 걸 발견하는 일이 재밌어서다. 이따금 아이들은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하얀 선을 제외한 나머지를 밟으면 죽는다고 여기기도 한다. 반면 어른들에서 탐험은 불확실성을 담보하는 경우가 더 많은데, 이는 자신이 아는 세계를 ‘개척’할 만한 힘이 남아있지 않아서다. 아이들은 성장판이 열려있지만 어른은 그렇지 않다. 이미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잘 아는 어른들에게서 ‘탐험’은 자신이 이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되묻는 ‘한계’ 실험일 뿐이다. 그러니까, 어른에게 탐험은 이 세계가 아직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가속주의에 대한 흔한 상상은 이 세계가 매끄러운 구 형태로 봉합돼, 더는 ‘대안’이나 ‘바깥’이란 걸 떠올릴 수 없는 상태라고 본다. 즉, 탐험은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쇠락해가는 것을 되살리는 쪽에 가까운 ‘의료’ 행위다. 이 이야기에서는 인간은 자신에 본래 주어진 지능이나 조건, 신체 분위나 계급 이상을 성취할 수 없으며 현상유지를 위해 단지 이를 채워넣을 수만 있을 뿐이다.
디지털적 대상이 호러의 중심으로 떠오른 건 그 때문이다. 아무리 해도 ‘채움’은 완성되지 않는다. 아무리 앞으로 가도 출구가 나오지 않고, 아무리 성장을 해도 게임이 끝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끝’은 죽음처럼 세계 외부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끝’이 세계 안에 속해있지 않으니 자연스레 탐험의 중요성도 올라간다. 디지털적 대상은 자신의 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쇠락하기만 할 뿐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며 이 점이 이들로 하여금 탐험을 하게 한다. 이들 작품은 아날로그 호러와 디지털 호러 등, 매체의 물질적인 특성에 기반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점이 많다. 이를테면, <8번 출구>처럼 디지털 세계의 ‘오류’를 작품의 고유한 컨셉으로 응하는 작품이 있다. 무한히 렌더링 되는 이들 세계에서 반복은 현실과 달리 ‘오류’로 판정되지 않는다. 도리어 그러한 스테이지의 반복에서는 상대방의 HP 바를 깎거나, 점수를 정해진 시간에 최대한 많이 쌓아올리거나 하는 식의 목표가 제시된다. 즉 플레이어단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이 세계의 끝을 장식하고 있다.
복사와 붙여넣기는 원본을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반복해 만들어진 ‘유사’를 산출한다. 이 안에서 ‘반복’은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한 세계의 분기점을 창출한다. 그래서 디지털 세계의 탐험 호러는 반복을 단순한 시간 늘리기가 아니라 ‘착오’를 생성하는 기제로 활용한다. 예를 들어 디지털 호러에서 자주 등장하는 연출은 같은 공간이 반복되면서 점점 더 버그가 난 듯한 화면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공간의 반복은 이들 세계가 거대한 무대 안에 놓인 건축물임을 말해줌과 동시에 그들 세계의 버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바깥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위에서 말한 <언더테일>이나 <두근두근 문예부>, <미사이드>는 게임 어플리케이션이 자신의 프로그램 단에 접근해 세이브파일 데이터를 조작하기도 한다. 이렇게 조작된 세이브파일 데이터는 모든 진행상황을 날려 처음부터 다시 하게 하는데, 이 과정에서는 게임의 영향 밖에 있는 플레이어의 ‘경험’이 핵심 소재로 자리 잡게 된다. 디지털 공간이 자신을 연장하는 가운데, 플레이어의 경험은 죽음을 마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플레이어의 경험은 이들 작품이 말하는 ‘끝’을 어느 정도 대체하는 감이 있다.
모든 인간은 가장자리에 서 있다. 미래를 예측하거나 하는 일이 불가능하고 여기 이곳이 경험의 끝자리라는 점에서 인간은 항상 아슬아슬한 전방을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반복해도 결국 이 세계의 내부를 서성이기만 할 뿐이라면, 이곳에서 성장이라는 말은 불가능하다. 단지 본래의 위치로 돌아오는 회복만이 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반복되는 부활이 성장의 불가능성과 연결되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적 대상은 진정으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다. 이들은 총을 맞거나 칼에 맞아도 금세 원래 신체로 복귀할 수 있다. 가령 <서커스>에서 등장인물의 죽음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데, 이를 대신해 정신적인 아픔을 겪다가 회복이 불가한 지점에 다다르면 검은색 글리치의 형상을 한 괴물로 변하게 된다. 케인은 이를 제거하는 대신 지하실이라는 이공간에 가두어놓기만 할 뿐, 근본적인 치료는 하지 못한다. 이미 디지털적 대상이 된 이상 이들에게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부재한다. 그리고 회복조차 할 수 없다면 반대로 이 세계에 어떤 형태로도 돌아올 수 없다. 죽지도 못한 채로 줄곧 고통받기만 하는 셈이다.
리미널 스페이스와 백룸은 디지털 세계가 사실은 실시간으로 렌더링 될 뿐이라는 점에서 착안한 무한공간이다. 이 무한공간이 점점 기괴하게 변하기만 할 뿐, 무언가 본래대로 돌아오지 않는 건 그만큼 이 세계가 쇠락해가는 일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예를 들어 세계는 자신이 아는 만큼 보이기에, 앞으로 나아갈수록 여태까지 알아왔던 것들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신이 보고 들어왔던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대방에 말하고 또 마음을 전한다. <서커스>의 6화에서 폼니는 잭스에게 대화를 청하지만 잭스는 자신이 망가진 사람이라며 마음을 터놓기를 거부한다. 이 장면에서 잭스는 말을 하는 법을 잊어버린 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 어른이 된다는 건 점점 더 몸의 회복력이 상실해가는 과정에 있음을 인지하는 일이다. 그 안에서 마음은 본래 갖고 있던 정도로만 회복될 뿐 더 큰 미래나 세계를 구상할 능력이 없다. 그렇게 보면, 잭스도 이미 이 세계는 품을 수 있는 감정의 총계를 넘어섰다고 보았을지도 모른다. 영원한 반복만이, 무한한 감정을 낳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