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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로부터 먼 감정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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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중과 상연>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두 여자가 자신의 죽음에 상대방을 초대하는 드라마다. 대뜸 결말부터 이야기한 건 작품이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데 중점을 두어서다. 특히 작품의 후반부에 상연은 은중에게 회심의 고백을 하는데 그말인즉 “이해할 수 없어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상하지 않은데 잘 살펴보면 앞뒤가 안 맞는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이기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이해할 수 없어도 결과만 놓고 그냥저냥 응용해서 쓰는 일이 세상에는 흔하다. 바꾸어 말해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겨낼 수 없을까?” 이해하지 못할 것에 대한 공포가 오래도록 이 세상을 지배해왔다. 과학이 발전한 오늘날에 과거의 많은 공포가 ‘이해’됐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우울감과 같은 인간의 감정이 있다. 사람마다 감정에 대한 저항력이 달라서,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불호를 떨치고는 한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에 잡아먹히는 일이 흔하다. 그렇게 보면 <은상>을 단순히 두 여자의 악연으로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이해를 대하는 태도의 두 가지 사례로 보이는 면이 있다. 이해할 수 없다면 그 원리를 알아야만 비로소 안심이 된다는 쪽이 있고(은중), 결과를 통제할 수 있으면 있는 그대로 판을 짜거나 행동해도 괜찮다고 보는 쪽이 있다(상연). 은중이 줄곧 상대방의 상황이나 감정에 공감하려 한다면 상연은 일단은 해결할 수 없는 건 그대로 두어야 다음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대표적으로는 30대 시절 은중과 상연 두 사람이 촬영장에서 배우의 갑질을 대하는 태도가 있다. 은중이 자신의 스태프에 화를 내는 배우를 두고서 “왜 우리가 사과를 해야 하는지”를 묻자, 상연은 곧바로 무릎을 끓는다. 그러면서 우선은 사과를 해서 상황을 끝내야 하는 게 맞는다며 “이 영화에서 대체불가능한 건 배우이지 우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상연의 이 말은 사실 두 사람의 관계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서로는 상대가 대체 왜 그런지를 알지 못한다.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마지막 보루로서 각자에게 대체불가한 존재가 된다. 이 세상의 비밀을 모두 풀어버린다면 삶이 시시해질 것이니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마치 현실을 이루는 실재의 축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현실을 엮는 누빔점이 된다. 이 말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사실은 단순한 섭식이나 포섭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봉합해버리면서 면역반응을 최대한 제거하는 쪽은 아닐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가령 외모만 놓고 보면 상연이 은중보다 더 나은 입지였다고 작품은 설명한다. 상연은 자연스레 학교의 반장 역할을 맡기도 하는 등 무리에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은중은 특유의 친화력과 상냥함으로 늘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상연은 그런 은중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여기서 출발한다. 은중은 상연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면서 이런 낡은 집을 보여주는 게 싫었다고 말한다. 언뜻 보면 물질적인 점에 대한 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낡은 공간은 세련된 인물로 묘사되는 상연을 이질감 없이 품어낸다. 아마도 상연은 그 점으로 은중의 말을 받아들였을 공산이 크다. 만약 상연이었다면, 타인을 들이기 꺼려질 정도의 집에 자신을 들였다는 점은 ‘자신을 단순한 타인으로만 대하지 않기 때문에’ 좋게 느꼈을 테다. 반면 은중은 그 일이 감정을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약점을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상대방에 대한 신뢰 표현이었을 것이다. 결과는 같지만 서로가 이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다. 맨들맨들하게 봉합된 이 표면에는 면역반응이 제거돼있다. 문제는 이후 성장과정에서 사회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아가 생겨난다는 점이다. 어떤 존재가 될지를 서로 선택해가는 과정에서 삶의 길은 점점 나뉘어진다. 서로는 만약 자신이 이런 길을 걸었다면 어땠을지를 생각해보는 마음의 걸림돌이 된다.


<은상> 서로가 서로에게 돌아갈 수 없는 분기점이 됨으로써 대체불가능함을 획득하는 이야기다. 이는 과거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한 세대의 성장을 보여줌으로써 극을 이끌어갔던 드라마 시리즈와 본편이 차별화하는 지점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그리기보다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를 말하는 것, 그렇다면 이건 성장담이라고는 볼 수 없다. 도리어 점점 더 균열이 확장되다가 끝내 그 균열이 자기를 잡아먹는 이야기에 가깝다. 가령 작품 내내 상연과 은중은 줄곧 대립하는데, 이는 둘이 성격이 나쁘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사고방식이 서로 달라서다. 은중이 상대방의 감정을 더 많이 보듬는다면 상연은 합리성을 더 중요시한다. 각자의 사고방식은 나이를 먹으면서도 바뀌지 않지만 도리어 인식은 더 선명해져서 그걸 아는 채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대표적인 것은 대학시절 상연이 생활고에 시달릴 때 자신의 자취방에 그녀를 들인 은중의 선택이다. 은중이 상연에게 호혜를 베푸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반면, 상연은 은중이 자신을 동정한다고 여긴다. 사람을 완전히 거지 취급한다고 말하는 그녀의 속내는 아마 은중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속마음이었을 테다. 은중은 상연에게 자신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다고 말하지만 상연은 자신이 도움을 받는다면 그게 꼭 은중이어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답한다. 시간이 지나 은중을 찾아온 40대 상연은 그녀가 없으면 자신을 스위스에 데려다줄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상연은 은중의 선택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는 것에 모든 걸 걸었지만 반대로 자신도 그녀가 없으면 틀린 삶이 되고야 말았다. 이른바 두 사람에게 서로가 틀렸다는 걸 보여주는 일은 도리어 서로를 엮는 누빔점이 되어주었다. 표면에 보이지 않지만 서로를 이어줌으로써 둘 중 하나가 망가지면 두 사람 모두가 해체되고야 마는 파멸적 관계다. 그러니 은중이 상연에 대해 진정성 있게 생각하는 게 가능해진 것은 결말 이후일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떠올려 보고 싶은 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이다. 작품의 내용은 제정신이 아닌 전체 만화 안에서 유일무이한 로맨스인데 핵심은 한 작품이 누빔점을 남기는 방식에 있다. 중간에 마키마와 덴지가 영화를 보러 가는 장면에서 두 사람이 보는 작품은 구소련의 1959년 영화 <병사의 발라드>다. 더글라스 서크풍의 멜로드라마인 이 작품은 한 군인이 전쟁공을 세운 대가로 잠시 휴가를 받아 귀향길에 오르는 내용을 다룬다. 훈장 대신 휴가를 택한 그는 중간마다 마주하는 사건들로 인해 정작 부모님을 15분 정도만 만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를 본 마키마는 재미없는 영화와 의미 있는 순간을 서로 분리해 바라봄으로써 재미없는 영화의 정의를 지루하고 무료한 게 아니라 아무런 기념할 만한 순간도 제공하지 않는 작품으로 한정했었다. 그런 마키마는 이후 체인소의 악마와의 전투 직전 재미없는 영화 같은 건 사라지는 편이 낫다며 자신을 부정하는 말을 한다. 이 장면은 마키마가 눈앞의 상대가 덴지인줄 알고 발언한 것이므로 사실상 덴지와의 추억을 정면으로 부정함으로써 ‘도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마키마의 본심은 어느 쪽일까? 만약 영화에서의 재미를 특정한 과정이 아니라 순간의 뒤에 드리운 여운 같은 것으로 본다면, 그녀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화를 더 좋아한다고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영화를 이해한다는 말은 작품이 전개되어 진행하는 방식을 잘 알겠다는 쪽에 대입되니 말이다. 하지만 영화가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는지를 잘 모르더라도 그냥 특정한 결론 앞에 서는 자신을 돌아보게 될 때가 있다. 이 경우 영화는 이해로부터 가장 먼 감정인 동경을 남긴다. 어쩌면 마키마는 영화를 동경함으로써 영화에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현실이 언제나 영화에 질 뿐이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낫다고. 그렇지만 재미없는 삶이라도 결국 살아만 질 뿐이다. 동경의 대상으로서 삶은 일종의 누빔점이다.


다시 <병사>로 돌아가면 영화는 전형적인 비애극의 형태를 하고 있다. 비애극은 그 자체을 경험하기보다는 슬픔의 감정을 보는 이에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해와는 거리가 살짝 있는 장르다. 작품 속에서 슬픔이 면밀히 통제되기보다는 무분별하게 퍼져있어 독자로서는 이를 명시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병사>에서 놓치기 쉬운 점은 이틀이나 걸려 부모님을 보러 갔지만 15분밖에 만나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9년 상황에서 아직 기억과 연결된 이들이 속속들이 작품 안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들 과거는 뒤바뀌어질 수 없으며 대체될 수도 없다. 동시에 남자는 이미 여정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뒤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고향을 향해 줄곧 나아가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서로의 사연을 명시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전쟁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얼기설기 봉합된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무언가 일률적으로 바라보아지기 힘든 이들인데 이를 다시금 ‘영화’가 사로잡는다. 그렇다면 서로를 이해하게 하는 건 영화일지 전쟁일지 분간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체인소맨>에서 영화를 재미없게 하는 건 질병이나 전쟁, 기아 같은 개념이 사라져 이 세계의 일부로 봉합되어버린 상황이지 그게 전면으로 드러나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장면이 아니다. 마키마는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대로라면 이길 수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마키마는 체인소의 악마의 힘으로 이들이 이 세계에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온전히 세계에 봉합된 것을 풀려나게 함으로써 이들을 영화에 불어넣는 효과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의 영화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게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영화의 이해할 수 없는 판본으로 남는 현실에서 사람들이 꾸게 될 꿈이란 아무런 동경도 남기지 않을 테다. 마치 스핏츠의 곡 로빈슨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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