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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기'와 '당기기' 사이에서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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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게임제너레이션 비평 공모전에 당선된 두 글을 읽었다. 당선된 두 글이 모두 흥미로웠지만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류호준의 「게임은 어떻게 우리를 소외시키는가」였다. 이 글은 소외를 중심으로 게임과 플레이어의 관계를 풀어낸다. ‘위치는 유의미한 차이를 통해 형성된다’고 말하는 그는 소외를 탈피하는 방법으로 반복에서 탈출하는 일을 지목한다. 간명하게 말하면, 반복에서 차이가 비롯되고 이 안에서 나눌 수 없는 잔여분이 바로 플레이어의 실존이 된다는 것이다. 가령 아래와 같은 진술을 살펴보자. “플레이어의 의지와 무관하게 똑같은 사건이 영원히 반복되고 그래서 게임 내 모든 차이가 소멸하는 위기에 처하는데(소외), 이때 플레이어는 각종 활동과 추론을 통해 반복되는 연쇄를 끊고 차이(실존)를 다시 불러낼 수 있다.” 이 말은 일본의 만화 <체인소맨>의 한 설정을 떠올리게 한다. 이 만화의 근간에는 한 개념이 되살아나는 일을 막는 체인소의 힘이 자리한다. 기본적으로 악마들은 지옥과 현세를 오갈 수 있는데 둘 중 한 곳에서 죽으면 나머지 장소에서 기억을 잃은 채로 되살아난다. 지옥에서 사망하면 현세에서 살아나고 현세에서 사망하면 지옥에서 살아나는 식이다. 문제는 체인소의 악마가 중간에 개입하면 이런 윤회가 끊어져 버린다는 점이다. 기억을 잃더라도 되살아나는 것과 아예 모든 이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리는 것 중 무엇이 더 나을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작품의 설정은 분명 게임의 형식과 닮아있다. 우선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악마들이 다시 살아날 때마다 개인의 기억을 잃지만 그 외부에 있는 우리에게 기억은 온전히 유지된다. 마치 게임에서 한번 죽을 때마다 캐릭터의 상태값이 초기화되지만 플레이어의 경험은 유지되듯 말이다. 류호준의 글은 이 상황이 플레이어의 세계 내적 실존 감각을 형성한다고 본다. 캐릭터는 수도 없이 죽음을 반복하며 그 사이에 저장되지 않은 데이터는 모두 상실한다. 플레이어는 이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이 그 기억을 획득했던 방법에 익숙해지고 또 그렇게 결말로 나아간다. 즉, 안과 밖의 ‘차이’가 발생함으로써 플레이어가 주변부의 극단으로 현재화한다. 결과적으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일과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이 상태값에서 중요한 건 ‘차이’가 우리를 주변부로 밀어낸다는 점이다. 꼭 앞이 아니라 뒤든 옆이든 간에 중앙에서 멀어지는 상태를 전제해야 한다. 장 뤽 낭시는 신체가 외부와 맞닿은 전선이 됨으로써 기억이 발생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차이화한다는 건 기억이라는 게 어떠한 저장의 형태가 아니라 흐름에 가깝다는 걸 보여준다. 이를 따라 게임에서 데이터는 물리적인 형태로 보존돼 반복적으로 표출되는 상태값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이 주변부에 밀려 나간다는 ‘차이’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과거와 관계를 끊어 의도적으로 길을 잃을 때 불멸을 획득하는 일로 이어진다.

기억은 상실되지 않는다. 다만 기억으로 향하는 길을 잃어버릴 수는 있다. 이는 사실상 죽은 데이터로 취급되지만 결말을 의도적으로 열어두었다는 점에서 다시금 차이가 발생할 여지를 둔다. 작중에서 체인소맨의 심장을 둘러싼 사투는 그들이 이 특별한 힘을 바라기 때문이다.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특정 개념이 실존한다면, 이를 끊어냄으로써 아예 지워버릴 수도 있다. 죽고 나면 어딘가에서 랜덤하게 부활하는 악마지만 이를 잡아먹음으로써 그와 같은 불완전함에 방점을 찍을 수 있다. 어느 한 개념을 정의하는 게 우리가 그를 어떠한 ‘차이’의 격벽으로 밀어내는 과정이라면, ‘의미’란 결국 우리가 이 세계에 녹아들 수 없게 방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연쇄를 끊어 차이를 불러낸다’는 관점으로 보면, 체인소의 힘은 결국 차이를 불러내는 힘으로써 한 대상을 지우는 게 아니라 실존하게끔 하는 쪽에 가깝다. 이를 따른다면 반복을 끊어내는 체인소의 힘은 한 개념으로서 탄생한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존’이 한 개인의 삶에 의미를 갖는 일을 가리킨다면, 그 삶은 주류가 아닌 주변부의 삶이 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 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건 게임이 영원회귀적인 의미에서 인간 소외를 불러일으키지만, 끝내 차이를 획득함으로써 플레이어에게 실존의 가치를 전파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게임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려면 궁극적으로 이는 의미를 갖는 플레이어의 형체를 지우는 쪽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다른 한편 강현의 「캐릭터 뽑기가 갖는 의의란」은 서브컬처 게임이 뽑기 시스템으로 어떻게 높은 수익을 올리는지를 분석한다. 큰 틀에서 이 글은 일회성으로 휘발되는 서사를 캐릭터 뽑기 시스템에 결합함으로써 이들 소비가 단순한 재화 교환으로만 바라보아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상품의 사용가치(성능)와 별개로 상품이 갖는 일종의 기호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전략”은 캐릭터와의 상호작용에서 얻은 경험이 일종의 기억으로 전환됨으로써 자기만의 고유한 것, 즉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는 앞서 류호준이 “활동과 추론을 통해 반복되는 연쇄를 끊고 차이(실존)를 다시 불러낼 수 있다”고 진술했던 점에 연결된다. 기본적으로 게임은 정해진 코드를 따라 움직이는 산물이기에 특정한 형태의 상황이나 현상을 반복하게 된다. 이는 즉 모두에게 균일한 경험을 제공하는 맥도날드식 프렌차이즈화라할 수 있는데, 엄청나게 맛있지는 않아도 적어도 ‘실패’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안전한 쪽으로 분류된다. 서브컬처 게임사의 고민은 이처럼 게임성을 균일하게 가져가는 가운데 한 개인에게 어떻게 캐릭터의 매력을 전파하느냐에 있다. 이를 위해 게임사는 반복되는 경험을 끊고 일시적으로만 즐길 수 있는 사건이나 서사를 삽입한다. 특정 이벤트를 통해 캐릭터와 세계관 내의 서사를 줌으로써 캐릭터에 대한 친밀감이나 이해도를 높임으로써 이를 자신의 계정으로 데려오고 싶게끔 한다. 이때 서사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게임 안에서 다시 선보여지지 않는다.

다시 게임 안에서 선보여지지 않는 서사란 마치 우리 삶의 기억이 갖는 역할과 닮아있다. 우선 기억은 삶의 중요하고 특정한 사건이 사건으로서 기록돼 저장된 형태인데,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이를 ‘기억’할 수 있을지란 그때 당시로써는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대개 부끄럽거나 인상 깊은 순간은 누가 보아도 기억에 남을 만하다고 느끼고는 하지만 반대로 별 뜻을 두지 않았던 작은 순간이 삶에 깊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는 ‘차이’를 의도적으로 통제하는 일의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인생의 한순간에 차이가 발생하는 건 맞지만 그 사실은 주변부에 밀려난 자신의 모습에서만 발견된다. 더욱이 그 기억은 우리가 접근하는 법을 끊어내었기에 객체로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므로, 아무리 해도 그에 도달할 방법따위는 없다. 이렇게 고립된 기억이 다시금 차이를 발현한다면, 애초에 기억은 사라졌던 적이 없다고 보는 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한 기억이 피어나는 과정을 경험하는 주체다. 한 게임 안에서는 모두가 같은 사건을 경험하지만 반대로 이에 멀어지는 속도는 서로 다르다. 모두가 자기만의 속도로 삶을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기억에서 멀어지는 속도도 다르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 대한 경험도 달라지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게임의 재화 소비 시스템이 제 역할을 발휘한다. 소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즉 우연(우발)성에 대한 요청”은 그보다 상위에 자리 잡은 ‘요청하는 나’의 ‘당김’ 행위로 치환된다.

이 시스템은 소위 ‘가챠(Gatcha)’로 불린다. 일본어의 ’철그럭 がちゃがちゃ’이라는 의성어에 대응하는 이 말은 캡슐에 담긴 토이를 돌리는 소리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간단하게 말하면 ‘뽑기’지만, 흥미로운 건 이 말이 해외에 번역되는 과정에서 채택된 대응어다. 해외에서는 이러한 뽑기류 시스템을 두고서 ‘pul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슬롯머신’에서 유래됐다. 이 슬롯머신을 구동하려면 재화를 넣고서 기기 옆에 달린 레버를 당겨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알고 나면 자연스레 캡슐토이와 슬롯머신 간에는 랜덤성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많은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우선 가챠가 레버를 회전할 뿐이라면 슬롯머신은 레버를 당긴다. 화면 상의 기호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일은 가챠와는 달리 자신이 바라는 목표가 하나의 기호로서 명확히 지정되어 있지 않아 사실 무엇을 넣든 별 상관도 없다. ‘망작’도 자신이 바라는 결과가 될 수 있는 가챠와는 달리 여기에는 단지 1등에서 3등을 지시하는 기호만이 있을 뿐이다. 이를 따르자면, “과거와 현재의 ‘거리’를 의식하며 과거에 현재를 가둬 넣는 일”은 기실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Y축의 움직임만을 재현할 뿐 실상은 개개인의 실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위에서 말한 ‘당김’은 가챠보다 슬롯머신에 더 잘 어울린다. 다시 말해서 우리와 애착관계에 있는 많은 경험들은 이처럼 차이를 발생시키는 트리거이기만 할 뿐 정말로 가치 있는 경험이 아니다.

즉 ‘기억’은 탈출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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