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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이 없기에 상실도 없다

by 수차미


근래 문화계의 신기한 현상 중 하나는 서브컬처의 약진이다. 특히 극장가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예전보다 더 높은 관객을 기록하는 등,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양상을 보인다. 판데믹이 영향을 미친 것도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도 분명 있다. 가령 <체인소맨>의 극장판은 개봉 2주를 넘긴 시점에서 200만 관객을 동원했고, <귀멸의 칼날>의 극장판은 개봉을 한달 조금 지난 시점에서 550만 관객을 달성했다. 이들 작품은 원작의 이전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내용을 다룬다는 점에서 원작 팬이 아니라면 내용을 쉽게 따라갈 수 없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작품을 따라가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자리한다. 특히 <체인소맨>은 이전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TV판 작품이 비교적 아쉬운 평가를 받았기에 이번 흥행이 더욱 의아하다. 원작자가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절해야 한다는 평을 들은 <귀멸의 칼날>과 비교하면 <체인소맨>은 오히려 제작사를 욕해야 하는 쪽에 가깝다. 한국에서 넷플릭스 등으로 방영됐던 당시나, 만화가 연재됐던 시기에도 그렇게까지 많은 인기가 있지는 않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체인소맨>이 한국 극장가에서 150만 관객을 달성한 건 원작의 흥행이 전적으로 영향을 미친 게 아니라는 소리다.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결론은 하나다. 잘 만든 작품이다. 특히 극장에 방문하는 일이 곧 그만한 시간과 돈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일이 된 시점에서 이러한 흥행은 그만한 만족감을 줬다는 말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영화가 일본 애니메이션에 밀렸다고 보기도 힘든 게, 볼 영화가 없으면 애초에 극장을 방문하지 않는다. 오늘날 극장은 일단은 시간을 내서 방문하면 무언가를 고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오프라인에서 자신이 살 물건을 점찍고, 집에 돌아가 온라인에서 구매하는 것과 같다. 자신이 ‘무엇’을 고를 것인지를 사전에 조사한 다음 오프라인 극장에 가서 이를 ‘화려하게’ 즐기는 것이다. 인스타그램 등에서 하도 추천을 해서 보러 간다는 말도 맞다. 어딜 가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무언가 그걸 알아야 이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니까. 다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SNS를 통해 입소문을 탄 영화에 관객이 드는 메커니즘이 단지 예술영화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점에 있다. 나치독일을 다룬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수입했던 회사의 설명을 따르면, 이 영화는 일반적으로라면 흥행하기 어려웠지만 입소문을 타고 역주행을 한 사례에 속해서 자체적으로도 규정하기 힘든 케이스라고 한다.


여기서 지적해둘 건 판데믹 시기에 극장이 막혔고, 대부분의 영화가 온라인으로 릴리즈되는 상황에서 ‘우연성’에 기대는 일이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영화가 너무 많아서 다른 누군가에게 볼만한 영화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어질 때쯤에 온라인상의 ‘친구’들이 빛을 발한다. 알고리즘은 자신과 취향이 비슷할 것으로 추정되는 온라인상의 친구들을 끊임없이 매칭시켜준다. 그들이 추천하는 작품을 보면 뭔가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 같다. 특히 한 작품을 둘러싸고 파생된 ‘유머’ 게시물은 작품을 보지 않더라도 무언가 대략적인 기호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누군가에게는 스포일러일 수도 있을 장면들이 도리어 영화를 보고 싶게 하는 정박점이 되어준다. 작품을 살짝 시식하게 함으로써 본편을 보게 유도하는 것도 같지만, 위의 사례에서 중요한 건 그와 같은 알고리즘이 휩쓸고 간 자리다. 어떤 영화든 간에 네트워크의 평면 위에 들어서면 서로 같은 출발점을 갖는다. 이 위에서는 극도로 좋은 감정이나 최악의 기분 같은 게 자리하지 않는다. 그냥 작품을 평가하기 어려운 주변부의 텍스트로만 다뤄지고 또 이해될 뿐이다. 쉽게 말해 정보량이 높은 본편이 잉여로 분류되는 밈텍스트에 구축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와 같은 교환 속에 작품의 정보가치가 평준화된다는 점이다. 인스타그램 알고리즘 위에서 <존오인>과 <체인소맨>의 정보가치는 같다. 두 작품을 같은 자리에 두는 일이 작품의 실질평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둘은 같은 출발선에 선다. 서로 같은 곳에서 접한 작품에 같은 평가 기준을 적용하면 그 후의 경주는 전적으로 실력에 의존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체인소맨>의 흥행도 그냥 잘 만들었기 때문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물론 ‘영화’로서 무엇이 작품성을 결정하는지는 또 사람마다 다르다. 관객 수가 곧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건 아니므로 <체인소맨>이 <존오인>보다 더 나은 영화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다. 이는 애니메이션이 완전한 허구여서도 아니고, 한 영화가 실존하는 역사를 무게로 짊어져서도 아니다. 어떻게 해야 작품의 주 수요층이 이 작품을 알아보게 하는지에 좋은 답을 내놓았을 뿐이다. 아무리 잘 만든 작품이라도 홍보가 되지 않으면 관객이 들지 않는다. 잘 만든 작품이 한 두개가 아니니까 적어도 ‘무엇’을 보게 될지는 그들이 먼저 나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일본 애니메이션보다 못 들어서 흥행에 실패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을 좋아할 만한 사람들에게 작품에 대한 정보를 흘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어느 분야나 다 마찬가지지만 이는 서브컬처 전반에 관해서도 적용된다. 넒은 의미에서 서브컬처는 오타쿠 문화가 아니라 주변부의 것들을 통칭하며 이는 ‘취향의 공동체’라는 말로 쉽게 설명된다. 메인스트림이라 불리는 주류 문화가 있으면 하나로 혼성될 수 없는 서브가 주변부에 자리 잡는다. 이들의 특징은 이따금 주류보다 더 잘 나갈 때도 있지만 반대로 그 영향력이 지속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이미 주류에 올라섰으면 반대로 주변부의 것을 흡수하는 일은 다소 힘들어진다. 집단이 비대해질수록 점점 더 의사결정속도가 느려지듯 규모가 커지는 일에는 필연적으로 항상성이 따라온다. 점점 더 외부에 저항하는 표면이 매끄러워지는 한편, 내면의 정보가치가 외부와 섞이지 않게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서브컬처는 정확히 이에 대비된다. 주변부는 자기만의 고유한 정체성이 있지만 반대로 자기를 특권화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다른 것에 합쳐지거나 분할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유전적 다양성을 획득한다. 주변부에 남는다는 건 집단의 정체성을 나누는 것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혼성의 과정에 선다는 것과도 같다.


같은 의미에서 시네필이나 비평 같은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우선 오늘날 젊은 시네필 중에서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경우가 많이 줄었다. 단순히 판데믹으로만 세대를 나누기에는 무언가 아쉬운 감이 있으니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해보자. 흔히들 젊은 시네필에 하는 오해 중 하나는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서로 같은 선에 두며 이를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것이다. 반은 맞지만 그 이해의 방식이 영화를 아래로 두고 애니메이션을 위로 올리는 것으로 오인된다는 점에서 틀린 말이기도 하다. 이 시나리오는 마치 자신이 알던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루키가 떠오르는 것처럼 보여서 쉽사리 지지할 수 없다. 어쩌면 하위문화로 여겨졌던 애니메이션의 약진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마치 계급적인 변혁과 세계 구조의 붕괴처럼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현상에서 지적해야 할 건 ‘무엇이든’ 간에 같은 자리에 놓고 보는 향유집단이 새로 생겨났다는 점이다. 과거 차이를 발견함으로써 무언가 주체화를 경험했던 세대가 있었다면, 이들은 차이에 동조함으로써 주체화를 경험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즉 무언가를 밀어내는 힘이 아니라 한 집단이나 개념의 일부로서만 존재하는 집단이 생겨난 것이다.


이 점은 젊은 시네필 집단을 다룰 때 간과되는 부분이다. 오늘날 시네필은 자신보다는 커뮤니티의 의견에 더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다. 한 작품을 보고 나면 자신이 평소 이용하던 커뮤니티에 검색을 해본 후 다른 이의 의견을 검색한다.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때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의 의견이 주류에 반할 것 같으면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다. 특히 보고 들은 것을 눈치를 보며 스스로 검열해버린다는 점이 주된 문제로 지적된다. 이를테면 자신이 별 세 개를 준 영화를 유명 평론가가 별 네 개를 줬다면 자신도 덩달아 별점 반개 정도는 올리게 된다. 무언가 자신이 중심에 없다고도 보이지만 반대로 주변부 전체가 자기를 구성할 수 있음을 전제해두고 싶다. 분산배치를 토대로 정보의 안정성과 효율화를 꾀하는 시대에 취향이라고 해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늘날 취향은 자기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어진 것만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것들의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취향은 타인에 의해 폄하되거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손실될 일이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이 분산 시스템 안에서 개인은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잃을 일이 없다. 낙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니 상실될 일도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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