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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상을 발견하면 뒤를 돌아갈 것

by 수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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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상을 발견하면 뒤를 돌아갈 것. 게임 ‘8번 출구’의 규칙은 간단하다. 플레이어가 무한히 이어진 복도를 빠져나가려면 복도에 걸친 여러 오브젝트를 관찰해야 한다. 이 과정에는 같은 공간을 여러 번 도돌이표처럼 맴도는 일이 자리해서 주의력이 약하다면 금세 싫증이 날 수도 있다. 영화화된 <8번 출구>는 어딘지 모르게 이 공간과 닮아있다. 원작을 그대로 묘사했다는 점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에 관해서다. 영화는 같은 관에서 한 영상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볼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좌석은 다양한 형태의 경험이 중첩된다. 달리 말해 8번 출구가 한 공간을 따라가는 방식은 일종의 재관람을 하는 형식에 맞춰져 있다. 특히 원작에 있던 이상현상 중 물이 쏟아지는 현상에 각종 쓰레기더미가 추가될 때 플롯은 바깥으로 이행하기 시작한다. 거대 쓰나미를 레퍼런스 삼은 이 장면에는 영화가 쌓은 단단한 격벽이 ‘동시대’를 맞아 도리없이 무너지는 일이 목격된다. 동시에 8번 출구를 둘러싼 단단한 현실이 깨어져 사람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바깥’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 ‘반복’은 어디까지나 깨어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한편으로는 벽이 무너지는 일에 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다. 2009년부터 일본의 고댠사에서 발매됐던 만화 <진격의 거인>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벽 너머로 고개를 드는 한 거인의 모습이다. 예전이라면 하늘을 떠받치거나 바닥을 향해 발을 내리찍거나 하는 식의 수직 이미지가 주가 된다면 이 시기의 거인은 벽 위를 넘실대며 끝내 벽을 무너트리기까지 한다. 이 모습은 정확히 쓰나미와 맞닿는다.


쓰나미는 바닥단층의 일시적인 충격으로 인해 발생한 물벽이 육지에 닥쳐오는 일을 가리킨다. 말그대로 거대한 벽이 육지로 밀려오는 셈인데, 이 점에서 쓰나미는 파도와 구분된다. 파도는 반복적인 너울의 부딪힘을 가리키지만 쓰나미는 일시적인 현상에 가깝다. 위에서 말했듯 벽 위에 고개를 드는 거인의 모습이 쓰나미를 떠올리게 한다면 2013년에 제작된 <진격의 거인> 애니메이션이 전달한 충격은 아마도 그런 점에서도 힘입었을 공산이 크다. 한편으로는 둘 다 사람들에 상처를 안기는 일은 같아서 반복과 일시적인 것 중 무엇이 더 나은 일일지는 딱히 구분할 길이 없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 길이 보지 않는다면, 무한히 뒤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라면, 이들 모두는 제자리걸음에 그친다. 굳이 따진다면 <8번 출구>의 영화판은 희망적인 편이 아닐까. 원작의 공간이 무한히 생성되는 공간이라면 영화판의 공간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에 가까우니 말이다. 영화는 반복되는 과거에 갇힌 이들에게서 어떠한 붕괴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바깥으로 나아가는 일을 묘사한다. 여기서 ‘붕괴’는 타인에게 연달아 균열을 내는 파괴가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며 트라우마 바깥으로 나아가는 일을 가리킨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의 시가라키처럼 붕괴는 자신을 가로막는 것을 부수어낸다면 그 근원은 기본적으로 ‘바깥’에 관한 게 되어야 한다. 무너져야 할 건 눈앞에 보이는 벽이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려는 회귀의 형상 그 자체다. <진격의 거인>의 결말에서도 그랬지만, 자신을 사로잡는 건 과거가 아니라 회귀의 형상이니 말이다.


서브컬처에 관해서도 주류문화의 도돌이표가 아니라 어쩌면 반복을 벗어나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어딘가를 가면 자신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받곤 한다. 대개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공적인 이름을 요구받을 때도 있다. 중요한 건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 지이므로 어떻게 불러주셔도 괜찮다고 말해두곤 하나, 그럼에도 손길이 가는 이름은 있다. 서브컬처는 근래 들어 ‘작은 이야기’와 연결되며 약소하더라도 이야기를 계속 꾸려가는 문화로 이해된다.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는 이들의 모임이 공동체가 되며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싹트게 한다. 어떤 뜻에서는 이런 모습이 결국 한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모습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인간의 정의를 어디선가 보았던 적이 있어서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고, 강자가 약자를 이기는 식이 아니라 약자를 도움으로써 종적인 다양성을 획득한다고들 한다. 노약자나 장애인, 왜소한 체격이나 부상 입은 몸 등을 도움으로써 우리는 나 자신이 그렇게 되었을 때 여전히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남을 수 있다. 만약 다친 이를 그냥 내버려두면 우리는 다치는 일이 두려워서 타인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 협업함으로써 우리는 상황에 맞는 인자를 보존할 수 있다. 자연계를 따르자면, 강하고 약한 DNA가 아니라 상황에 맞는 특성이 있을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종적 다양성을 마련해두는 서브컬처는 이 세계가 점점 사라져가면서도 후대에 손을 뻗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차이가 서로를 밀어내기보다 모두를 해방의 길로 이끌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생각은 깊은 회의론에 기인하는 것 같다. 이 세상이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소위 말하는 종말론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것과 다른 점은 ‘그럼에도’라는 말의 가치를 믿는다는 것이다. 종말이 오면 정부와 같은 거대집단보다는 생존자의 섹터로 분류된 소규모 집단들이 주를 이룬다. 이는 대규모 집단을 유지할 능력이 되지 않아서인데, 빙하기에 생물들의 몸집이 전반적으로 줄어든 일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근래의 서브컬처는 그런 점에서의 종말을 시사하는 듯 보이는 면이 있다. 집단의 크기와 규모가 점점 줄어들면서 각자 생존을 위해 분투한다. 이 안에서 취향의 공동체는 자체로 생존집단이면서 동시에 서로의 삶에 길항작용을 한다. 무언가를 더 많이 아는 사람과 더 적게 아는 사람 간에 문화적 우위가 존재하지 않고, 그저 문화를 알리는 것에만 몰두한다. 문화적인 유전자를 남긴다는 점에서는 밈을 전달하는 집단으로도 볼 수 있겠다. 서브컬처의 대표적인 현상 중 하나가 작은 것의 모임에서 자기만의 형상을 찾아내는 일이라면 여기서 사람 간의 교류는 형상을 다시 취하는 일이다. 아무리 해도 우리는 개인으로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종적인 의미에서 개인은 단순히 유전자를 전달하는 기계일 뿐이다. 우리의 취향도 나 자신을 보여주는 수단이 아니라 거대한 유전자 풀 안에서 멸종위기에 처한 특성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미 모든 게 끝나버렸다고 한탄하며 화석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일일까?


여태까지 살아온 행적을 되짚으면 줄곧 주변인의 자리에 서 있었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생각에 잘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 무대의 중앙에 서 있기를 싫어하는 사람 말이다. 1등이 되기보다는 적당한 3등이 되어 화제를 모으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1등이 되어 제거될 위험이 없으면서 동시에 꼴등이 되어 탈락할 위험도 없는 그런 위치가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주변부의 감각은 뒤를 돌아보는 일에 최적화돼있다. 뒤를 돌아본다는 건 무언가 물리적으로 후퇴하지 않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과거와 깊이 얽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가령 우리가 한 공간을 빙글빙글 돌더라도 과거는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같은 곳에 또 새로 나아갔을 뿐 그 과거로 다시 향한 게 아니다. 공간은 항상 흔적을 남기고, 이는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 읽어낼 힘을 준다. 이 점에서 주변부는 우리가 다시 설 수 없는 것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게 슬픔은 아니게 하는 힘이 있다.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느끼는 감정은 매번 다르다. 영화는 이 세계의 주변부에서 우리가 삶을 돌아보게 한다. 즉 영화는 주변부의 존재이며 동시에 주류 시간에 속해있지 않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종말에 속한다. 이 점이 서브컬처로서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다른 이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그럼에도 이 세상이 아직 여명의 시간에 속해있다고 믿으며 취향을 공유하는 일. 주변부는 분명 중앙에 속하지 못한 이들이 나도는 문밖의 복도일 수 있다. 그러나 안에 갇혀있기보다는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서브컬처라는 말을 들으면 무언가 인상이 변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이 그렇듯, 단어도 나이를 먹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과거 한국에서는 서브컬처라는 말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지만 세계가 그렇듯 2010년대 들어서는 무언가 점점 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 그건 세상이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그저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서일 테다. 한국에서 서브컬처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지하 문화들도 그만큼 많이 수입됐다. 기본적으로 서브컬처는 지하의 공연무대에 출몰하는 락과 재즈처럼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정서’에 관했다. 바꾸어 말하면 곳곳에 흩어져있던 이들을 한데 모아 가시화한 게 바로 서브컬처의 역할이었다. 대개는 작은 형태의 공동체를 하는 이 집단은 취향 위주로 운영되며 주류에 저항하는 성격을 보인다. 이는 종말처럼 무언가 거대한 힘에 관하지만 그와 같은 취향에서 서로를 동등한 관계에 놓게 된다. 그러니까 처음에 서브컬처 집단의 분위기가 일종의 생존자 단체에 가깝다면, 이야기를 밝혀나가 사상의 지도를 그리는 순간부터는 한 세계에 대항할 힘을 얻는다. 이때 바뀌는 건 세계가 아니라 이들의 마음이다. 폐허의 주변을 서성이는 일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 취할 게 없다는 무기력함을 기본 감정으로 안고 간다. 주변부를 따라 걸으면 이 세계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는데 그 모든 걸 우리가 소유할 수가 없다. 세계는 그저 바라보아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하다. 이곳에는 무언가 더는 새로운 게 태어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지도가 바뀔 일도 당분간은 없다.


오히려 서브컬처는 한 세상이 바뀔 일이 없다고 보는 일에서 힘을 얻는다. 이는 서브컬처의 가장 이상한 부분이다. 이 세계는 주어진 것들에서 무언가를 파생하고 창작하는 데 치중한다. 일반적으로라면 새로운 삶이나 땅을 개척하는 일이 진취적인 일로 이해되지만 도리어 서브컬처는 그와 같은 외부를 확장하는데 중점을 두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우주로 나아가기보다 깊은 바다를 탐사하는 쪽을 택한다. 바깥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직 밝히지 못한 내부가 많다고 여기는 탓이다. 무엇보다 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중에 ‘정서’를 둔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가두어진 것은 우리가 분명 소유하지만 적어도 ‘안다’고는 할 수 없는 편에 속한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에 속한 무언가지만 반대로 우리 자신이 그걸 안다고 볼 수 없다. 이따금 우리는 외부를 바라보며 내부를 알 수 있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이 세계는 그게 어떤 과정을 이루는지를 모른 채 결과만으로 응용한다. 마음의 구동계를 이해하는 채로 문 앞에 서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이해하려고 계속해서 과거로 되돌아가 보려 한다. 무언가 지금이라면 결과를 바꿀 수만 있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이미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원형은 없다. 예전이 들이닥칠 때였다면 지금은 그걸 주워담을 때가 아니다. 주변부란 같은 자리에 갇혀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처지가 아니라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쪽에 가깝다. 바꾸어 말해 서브컬처의 역할이란 마음의 해방을 지속하면서 이 세계를 회귀의 형상을 미래의 기억으로 바꿔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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