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언가 단단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용하는 말이 낯설어서 일수 있고, 지식인들이나 할 법한 행동이라고 생각해서일 수 있다. 당장 박사님이라 하면 시종일관 진지할 것만 같은 인상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단단함’은 오히려 마음에 관한 것일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실의와 고통, 낯섦에 사로잡힐 때 비평은 마음을 단단하게 해줄 수 있다. 마음이 깨어지고 부서질 때 비평은 흩어지는 몸을 붙들어준다. 정확하게는 그 몸이 글을 따라 차분히 매달린다. 이런 뜻에서 비평은 개인의 삶이 아프고 다쳤을 때 등장해오는 것 같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은 사람은 자신의 힘든 상황이 글을 쓰는 시간에 정리되기를 바란다. 글 자체가 마음을 회복시킨다기보다는 글을 쓰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다른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어서, 그런 시간을 빠르게 흘려보낼 수 있어서다. 생각을 조금 더 이어가면 무언가에 대해 쓰는 일은 우리의 삶을 가시화하는 효과가 있다. 어느 때에 자신이 느낀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일은 나도 모르는 감정들을 설명하면서, 이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다룰 수 있게 해준다. 즉 글을 쓰는 일은 기본적으로 내용에는 관계없이 마음을 기록하는 일에 중점이 있다. 서툴더라도 글을 계속 써야 한다고 말하는 건 그때문이다. 무언가 잘 쓰이지 않고, 멋져 보이지 않아도 글을 쓰는데 할애하는 시간은 삶의 한 순간을 통과하게 해준다. 감정들을 떠나보내는 건 그 위를 달리는 우리 자신이다. 글을 따라 설계하는 미래가 아니라 문을 닫고 나오는 마음이 이곳에 있다.
다양한 매체들에서 ‘문’을 여는 일은 무언가 마음 한구석에 가두어둔 것을 꺼내놓는 것에 빗대어지고는 한다. 무언가 험한 것이 봉인돼있거나(<몬스터 주식회사>), 다른 어딘가로 떠나는 일에 사용되고는 한다(<스즈메의 문단속>). 그러나 무엇보다 비평의 역할은 그 문을 여는 게 아니라 ‘닫는 것’에 중점이 되어야 한다(<강철의 연금술사>). 가령 사람들을 처음 만나 인사하는 것만큼이나 마무리를 잘하는 것도 몹시 중요하다. 이직이라든가, 연애라든가 하는 것들에서는 끝맺음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무언가 마음속에 찜찜함을 남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바로 삶의 주된 목표라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미해결사건은 실적이 될 수는 있어도 실체가 되지는 못한다. 그래서 비평은 미해결사건이 아니라 항상 문을 닫는 일에 집중한다. 애초에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자원을 소비하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가 없다. 등가교환이라는 걸 믿는다면, 우리는 지난 일을 없던 것으로 할 수 없고, 다만 그곳에서 최대한 멀리 나아갈 수만 있을 뿐이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자신의 삶에 남은 기억 모두가 기쁘거나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살아갈 이유가 되는 건 그것들이 한때 존재했었다는 희미한 감각 덕분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들 환상이 ‘나’를 붙잡게 해준다. 자신을 차분히 돌아보면 하나하나가 별것 아니게 느껴지는 가운데, 가장 아프고 쓰라리게 다가오는 기억이 우리 자신을 이곳에 자리 잡게 한다. 유별난 것일수록 더욱 깊게 파고들 테고, 종이에 눌린 감정도 더욱 깊어질 테다.
비평의 주된 감각은 상처와 고독, 불가항력과 종말 같은 부류다. 혼자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감정들에 파묻힐 때 우리는 이를 등지고 싶어진다(<룩백>). 영화 같은 것을 보면서도 내내 일상을 잊는 일은 그 세계가 우리 앞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이나 이 멋진 세계에 뒤를 돌아 나오는 일도 좋아한다. 이렇게 뒤를 보는 일은 실패와 도주의 산물로 느껴지지 않아서 무언가 안심이 된다. 현실은 늘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정작 뒤로 돌아가는 일 같은 건 허락되지 않아서, ‘다시 한번’ 무언가의 앞에 서기도 어렵다. 만약 다시 섰다면 그건 이전과 같은 순간이 아니고 또 그 때의 자신을 마주하는 것도 아니다. 그림자는 태양이 드리운 반대 방향, 우리가 바라보는 미래에 속해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을 더 고대하는 게 아닐까. “죽음, 전쟁, 기아, 그런 것들을 이 세상에서 없앤다(<체인소맨>)”는 건 불가하다. 삶은 고통에 사로잡혀있고 글을 쓰는 일은 스스로를 얇은 판형 위에 가둔다. 이때 비평을 하는 일은 혼자되기를 각오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동시에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혼자되기를 감내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넓게 펼쳐진 미래가 아니라 가로로 본 얇은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글 안에 적어두는 마음은 어린 날이다. 그중에서도 어린 나를 버티어내는 지금에 관한 것이다. 영화 한편이 끝나고, 자리에 나서는 일은 무언가 반복될 것만 같은 기분을 남길 뿐이지만, 동시에 미래의 어느 날을 세우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