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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r 01. 2023

정의와 자선이 끌어안는 날을 꿈꾸며

2013년 1월 '바보들꽃' 소식지 기고문

1. 어떤 풍경들


1) 캄보디아, 어떤 봉사와 기부의 풍경


캄보디아의 한 가난하디 가난한 마을, 아이들에게 점심 한 끼를 먹이는 한국의 비영리단체에서 신세를 지며 봉사 활동을 하는 중이었다. 어느 날 관광버스 두 대가 서더니, 각각 가득 찬 한국인들을 토하듯 내려놓았다. 모 투어 회사의 여행 상품을 이용 중인 패키지 관광객이었다. 관광객들은 여행 중 점심시간 한두 시간을 떼 봉사할 기회를 갖고, 회사는 패키지 판매 금액의 1%를 해당 단체에 기부한다고 했다.


관광객들은 뭉클한 표정으로 무릎 꿇고 배식을 하고,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워 머리를 감겼다. 그 과정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연신 아이들과 자신들의 사진을 찍었다. “촬영을 해도 되는가”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급적 자제해 달라는 당부 역시 없었다. 상주하는 스탭에게 조심스레 이렇게 아이들 사진을 (함부로) 찍어도 좋은가 묻자, 그는 “문제없다, 아이들도 다 알고 있다”라고 답했다. 


아이들은 평소처럼 길게 줄을 서 식판에 밥을 얻은 후 “어꾼 지저스(Thank you Jesus)”하는 종교적 메시지를 (때로는 억지로) 말하는 것으로 모자라 남의 손에 머리를 맡기기도 하고, 들이대는 카메라 렌즈 앞에서 포즈를 취해야 했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지적한 것처럼 렌즈를 조준해 사진을 찍는(shooting) 행위는 아이들의 가슴에 대고 총을 쏘는(shooting)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머리가 벗어지도록 뜨거운 다음 날엔, 모두가 도서관 청소에 투입되었다. 마을 어귀에 위치한 단체의 센터 초입에 말끔하고 근사한 도서관이 있었다. 전면에도 측면에도 “도서관”이라는 이름보다 더 커다랗게 붙은 한국의 한 기업 간판이 즉각 눈에 띄는 2층 건물이었다. 근사한 착공식과 완공식 사진을 본 기억이 있었다.


바쁘게 아래위 교실의 책걸상을 모두 들어낸 후 바닥에 비눗물을 뿌려 비질을 하고 다시 몇 번에 걸쳐 걸레질을 했다. 책걸상은 하나하나 손걸레로 닦았다. 도서관 앞의 헝클어진 화단엔 새로 산 꽃화분들을 옮겨 심느라 분주했다.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은 동화 하나를 몇 장의 그림 보드로 만들어 1층 열람실 벽에 보기 좋게 붙였다. 센터의 디렉터는 도서관 앞 웅덩이에 고인 물을 삽과 빗자루로 연신 쓸어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때는 우기였고, 몇 시간 후면 다시 물이 고이다 못해 넘칠 것이었다. 그는 고이면 이튿날 또 퍼 내면 된다며 손을 멈추지 않았다. 이 모든 푸닥거리의 이유는 하나, 이튿날 한국의 해당 기업이 한 해 두세 차례 실시하는 기업담당자의 현지 방문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지낸 일주일간, 도서관은 늘 텅 비어 있었다. 탈모증 앓는 머리처럼 성근 서가엔 부실한 영어책이 듬성듬성 꽂혀 있었고, 도서관 사서인 젊은 청년은 입구에 앉아 졸았다. 불볕을 피해 도서관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아이들이 하는 일이란 시원하고 그늘진 도서관 구석에 가끔 똥을 싸고 도망가는 게 전부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나마 공간이 잠시 활기를 띄는 건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는 한글 수업 시간뿐인 듯 보였다. 이들은 도서관을 지은 해당 기업이 1년에 2회 선출해 보내는 대학생들이었다.


2) 인도, 봉사와 마약과 죽음이 한 데 얽힌 세계의 다락방


조금 더 서쪽으로 움직여 보자.


인도 꼴까따는 마치 선진국에서 꽁꽁 잘 닫아 숨겨둔 다락방이 열려 와르르 쏟아진 것 같은 도시다. 거리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병자와 장애인과 걸인이 소떼 파리떼 쓰레기와 한데 엉겨 있다. 도시의 한쪽엔 태어날 때부터 거처가 없던 사람들이 무기력하게 누워 있고, 거대한 사창가에서는 남편을 포함한 가족에 의해 집에서 손님을 받는 엄마를 보며 자란 딸이 같은 멍에를 지고 삶을 반복한다. 더럽고 깡마른 남자들은 맨발로 인력거를 끌며 좁은 길을 헤매다 밤이 오면 인력거 안에 몸을 구기고 잠을 청한다. 죄 없는 아이들은 약에 취해 잠든 채 어미도 아닌 거리의 여인들에게 두루 안겨 구걸의 도구가 된다. 행여 물정 모르는 행인이 분유 한통을 사주면, 여인은 가게 주인에게 환불을 받아 돈을 챙기고 가게 주인은 그에 대한 수수료를 뗀다.


동시에 꼴까따는 알바니아 태생의 한 수녀가 자선의 대명사 ‘마더 테레사’로 성장한 곳이다. 이곳엔 테레사 수녀를 전 세계가 추앙하는 성인으로 만든 <마더 테레사 하우스>, 죽음을 앞둔 빈곤자들을 돌보는 임종의 집이 있다. 방학이면 세계 곳곳에서 몰려오는 수많은 자원봉사자가 인산인해를 이루어, 성수기엔 하루 최대 세 시간으로 봉사 시간이 제한될 만큼 사람이 붐비는 명소다. 꼴까따에서 머무는 동안, 옆 방의 오스트리아 친구는 매일 테레사 하우스에서 빨래 봉사를 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언제나 방 앞의 해먹에 몸을 누인 채 해시시(마리화나)에 취해 있었다. 꼴까따에선 외국인이고 인도인이고 약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는 건 흔한 일이었다. 어쩌면 여행자에게 마약과 봉사는 비슷한 효능을 발휘하는 좀 다른 선택인지도 모른다. 마약에 취하는 것도, 봉사를 하는 것도 이 도시의 처참함을 어떻게든 견디고 소화하려는 노력이리라 넘겨짚는다면 말이다.


마더 테레사를 필두로 그토록 많은 종교 단체와 자선 단체가 들어와 있다는데, 꼴까따의 거리 풍경은 왜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는 걸까? 마더 테레사는 임종의 집에 머무는 빈곤자들에게 늘 ‘고통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꼴까따의 빈곤 한가운데서 평생을 보낸 성인(聖人)은, 시나브로 자신이 갖게 된 거대 권력을 사용해 힘 있는 자들을 향해 그 빈곤의 뿌리에 대해 묻기보다 고통받는 자들을 향해 개인적 차원의 인내를 권면했고, 그 행보를 전 세계로 펼쳤다. 그를 추앙하는 후대의 사람들도 같은 방식의 자선을 유지하고 확장시켜 이어간다. 


다른 곳에서 자원봉사 중이었기 때문에 하루 방문자 자격으로 마더 테레사 하우스를 찾은 나는, 마더 테레사의 생애와 마더 테레스 하우스의 역사를 들으면서, 역설적으로 그 둘을 유지하고 성장시켜 온 것이 바로 그 꼴까따의 비참한 빈곤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아연해졌다. 자료들은 자신들의 존재와 역사를 통해 이곳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는가에 대한 성찰의 기록보다는,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얼마나 많은 지역에 <임종의 집>을 개소하고, 얼마나 많은 봉사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는가 하는 ‘데이터’로 채워졌다.  꼴까따 외에도 인도 곳곳에, 세계 곳곳에 현재 존재하고 또 미래 추가로 오픈할 마더 테레사 하우스 ‘브랜드’의 깃발이 꽂힌 세계지도 앞에서는 얼마간의 야망마저 느꼈다. 


자선 단체와 선교 단체는 팽창하고 성장하지만, 현장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이 눈앞의 풍경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까. 주는 이와 받는 이의 입장과 관계는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시혜자는 점점 내적으로 고양되고 외적으로 인정받지만 수혜자는 점점 내적으로 파괴되고 외적으로도 나아지지 않는 이런 상황은, 특정한 곳만의 문제일까.


2. 고통과 자선이 소비의 대상이 되는 세계


최근, 인도 벵골만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관리와 경찰이 합작해 외부 세계와 접촉한 일 없는 소수 부족을 이용해 ‘인간 사파리’ 관광 상품을 판매한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상품으로 소비할 수 있는가 비난이 들끓자, 당국은 해당 관청의 관리와 경찰들을 징계했다. 그러나 정작 그 소수 부족은 경찰로부터 자신들이 보호받고 있다고 느낀다고 증언했다. 관광객으로부터 먹을 것과 생필품을 제공받는데 그게 왜 나쁜 일인지 그럼 이제 관광객들이 오지 않는 것인지 되물었다. 그 기사를 읽으며 나는 서두에 적은 캄보디아에서의 경험을 떠올렸다. 다만 비즈니스의 방식이 세련되었는가 그렇지 못한가의 종잇장만 한 차이가 있을 뿐.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제3세계에 도서관 짓기”가 유행처럼 번졌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니, 바야흐로 책을 통한 배움과 꿈을 심어 줄 때다. 이제는 정보와 지식의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유명 여행작가도, 사진가도, 비영리단체들도, 앞다투어 도서관을 짓자며 사람들을 독려했다. 사람들은 돈을, 책을, 노동력을 기부하며 힘을 보탰다. 아이들이 책을 들고 기뻐하는 사진은 감동적이고 근사했다. 완공된 도서관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보람과 뿌듯함도 커져갔다.


다시, 앞서 말한 캄보디아로 돌아가 보자. 그렇게 지어진 캄보디아의 한 도서관은, 늘 비어 있었다. 서가도 공간도 운영도 헐렁했다.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캄보디아가 겪은 독특한 현대사를 들춰 보면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캄보디아는 ‘킬링 필드’를 겪은 나라다. 안경만 걸쳐도 숙청 대상이었다 할 만큼 지식인을 잔인하게 몰살한 크메르 루주 정권 이후, 나라의 교육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사람들은 배움에 대한 공포를 몸에 새겼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배우려 한들 제대로 가르칠 사람이 없었다. 현재 캄보디아의 문맹률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조금만 도시 밖으로 나와도, 여전히 많은 부모들은 별 것 아닌 이유로 쉽사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캄보디아뿐 아니라, 대체로 제3세계 아이들이 책을 읽을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굶주린 부모는 아이들이 도서관보다 당장 돈이 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모국어로 된 책의 절대적 종류와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공간을 활용해 아이들을 위한 양질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할 인력이 없다. 더 ‘잘 사는’ 나라로부터 별다른 상의나 고민 없이 뚝딱 지어진 도서관들은, 그리하여, 캄보디아의 그 소도시에서처럼 유명무실하기 일쑤다.


비근한 예를 몇 차례 더 보면서 안타까움과 답답함은 더욱 커져갔다. 때로 시혜국에 보낼 촬영을 위해서나 동원되는 아이들은, 눈앞에 있으나 사실상 제 것은 아닌 도서관에서 꿈 대신 묘한 절망을 한 꺼풀 덧입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의 배움과 미래가 과연 영어책이 꽂힌 도서관이나 연속성도 전문성도 없이 이따금 열리는 외국어 교실로 얼마나 밝아지는 것일까.


여기 한 마을이 있다. 의식주가 열악해 사람들이 끊임없이 질병에 시달리지만, 마땅한 의사도 없고 스스로는 의사를 키울 여력도 없는 낙후된 곳이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번듯한 병원을 짓고 알 수 없는 꼬부랑 말로 적힌 매뉴얼을 갖춘 의료 기기와 약을 채운 후 진심으로 마을의 건강을 기원한다며 병자들을 모아 사진을 찍고 돌아갔다. 어떤 느낌일까? 몇 곳의 도서관에서 남편과 내가 받은 인상은 그런 것이었다. 만약 현지의 사람들이 얻는 실제적인 도움과 베푼 사람이 얻는 보람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결론을 짓게 될까. 


아프리카는 그 고통을 소비당하고 성찰이 결여된 자선에 당하는 비극적 경험을 어떤 세계보다 오래, 강하게 지속해 온 곳이다. <처음 읽는 아프리카의 역사>에서 루츠 판 다이크는 이렇게 말했다.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프리카의 세속 지배자와 정신적 지배자 사이에서 아주 훌륭한 협동 작업이 이루어졌다. ...(중략)... 나라를 빼앗기고 가난해지고 권리를 잃어버리면, 선교사가 와서 유럽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을 달래주고 동시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가난할 뿐만 아니라 가난함 속에서도 평화를 지니고 살도록 도움을 주었다.”


아프리카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부 물품이 모이는 대륙이다. 동시에, 전 세계의 온갖 폐기물이 모이는 종착지이기도 하다. 기업들이 제1 세계에서 더 이상 유통할 수 없고 비용을 들여 폐기하기는 싫은 쓰레기들을 “기부” 딱지를 붙여 아프리카에 보내 손쉽게 처리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태워버리는 것이 인간적 도리일 것 같은 해진 옷, 누더기 가방, 다 떨어진 신발도 “나눔”의 껍데기를 쓰고 사람들에게로 도착한다. 한참 민감할 나이의 사춘기 소년이 한국으로부터 온 신발 중 디자인과 사이즈를 고르려 들자 어느 활동가는 “주는 대로 받아 신으라”며 맞지도 않는 신발을 거칠게 떠 안겼다. 그 비참함과 상관없이, 나눔은 모조리 사진으로 촬영되어 본국으로 보내진다. 사진으로 남아 보고되는 활동이어야 그다음 모금 활동에도 지장이 없다. 


이쯤에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여행 중 가급적이면 기회 닿는 대로 3세계에서 자원 활동을 하려 했던 나와 남편의 의식 속에도, 그 고통의 현장을 좀 더 ‘생생하게’ 느껴보고자 하는 동기가 있었다는 것을. 현장 속에서 사람들과 마주하고 일대일의 관계를 맺으면서야,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상품화된 패키지’나 ‘이미지’로 기아와 빈곤과 전쟁을 소비해 왔는지 깨달았다. 그 ‘상품’을 영속화하고자 하는 어떤 세계의 의지가 얼마나 오랜 것인지도 머리가 울리게 깨달았다. 그러나 고통은 결코 근사한 사막이나 바닷속의 산호초처럼 어떤 ‘풍경’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준한 마음의 경고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생생하고 실감 나는’ 감정을 느끼고 싶다면, 잘 연출된 구호 단체의 홈페이지나 사진이 곁들여진 기사를 보는 것이 훨씬 낫다. 현장엔 대체로 그 감상을 깨뜨리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과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아프리카 여행 중 두 나라에서 자원 활동을 할 기회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활동의 내용이 비슷했다. 후원자들에게 보낼 아이들의 프로필 사진을 찍고 성장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활동가들은, 하나같이 아이들이 사진에 너무 자유롭거나 당당하고 개구진 포즈로 찍히기를 원하지 않았다. 후원자들이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불편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너무 밝고 자신만만한 아이들 얼굴을 보내면, 더 이상 ‘필요가 없겠다’는 느낌에 후원이 끊어지기도 한다 했다.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지역에서 빵을 더 효과적으로 구울 수 있는 오븐 설비를 당장 갖출 수 있음에도 힘들기 짝이 없는 숯불 아궁이를 고집하는 이유는, 후원자들을 ‘정서적으로 배려’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잘 사는 나라들로부터 비슷한 일들을 꾸준히 ‘당해 온’ 아프리카의 ‘수혜자’들은 이제 노련하다. 여행자에게도 활동가에게도 뻔뻔한 낯빛으로 돈과 선물을 요구한다. 대신 사진을 원하면 사진을, 스토리를 원하면 스토리를 내놓는다. 자신들을 돕는 것이 활동가들의 ‘일’인 것을 파악하고, 자신들을 도울 수 있게 협조하는 것을 자신들의 ‘일’로 삼는다. 적극적으로 받아내고, 적극적으로 이용당해 준다. 원조 물품의 반입을 놓고 벌어지는 공항에서의 실랑이는 일상이다. 그들도 안다. 이 모든 행위의 끝에 궁극적으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왜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지, 이 사업이 앞으로도 얼마나 탄탄히 오래갈지.


3. 정의를 꿈꾸는 자선을 고민하며


‘착하고 좋은 일’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높은 시대다. 제3세계 어린이와 일대일 결연을 맺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페이스북 담벼락엔 끔찍한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는 - 그러나 너무 흔해 빠져 더 이상 누구도 그 ‘진짜 끔찍함’에 몸서리치지는 않는 - 아이들의 사진과 함께 ‘좋아요’ 한 개에 얼마씩 적립된다는, 정체 모를 구호 기구 광고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커피도 신발도 옷도 가급적 ‘착하게’ 소비하고, 여행도 ‘착하게’ 하려 노력한다. 그럴 때면 의미 있는 삶에 한 발짝 다가갔다는, 내 삶이 조금 더 착해졌다는 만족감이 스민다. 게다가 기부를 통해 ‘원조대상국에서 원조국으로 변모한 바람직한 사례’인 한국을 느낄 때면, 명실상부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듯한 뿌듯함도 느낀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런 ‘자선의 습관’ 혹은 ‘자선의 사고’가 개인의 삶과 개별 국가에 더하는 보람과 위상만큼,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더 살기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베푸는 쪽과 받는 쪽이 분명한 구도에서 흐르는 자선은 그 힘의 구조를 영속화하려는 속성을 지녔다. 아니, 받은 쪽이 비참할수록 베푼 쪽은 더 만족스럽다. 당장 하루의 삶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는 ‘나는 너보다 나은 인간’이라는 거만한 태도와 함께 오는 도움의 손길을 거절할 여유가 없다. 그러나 그런 굴종과 의존 속에서 대를 이어 비참함을 생산해 온 사회의 인간은 결국, 파괴된다.


‘자비로 단련되지 않은 정의는 잔인하고, 정의로 통제되지 않는 자비는 파멸의 어머니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생각한다. 우리 인간이 함께 지향해야 할 목표는 ‘정의 正義‘가되어야 하리라. 자선이란 수단의 성격이 더 강해 보인다. 참 정의를 이루기 위한 단련의 도구가 되거나, 아직 정의에 이르지 못해 비는 부분을 채우는 자선만이 진정 의미 있고 아름답다. 


그가 따른 예수 역시 그 ‘정의’를 추구하고 촉구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신이면서도 철저히 인간으로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한평생처럼, 정의는 신 앞에서 ‘너와 나는 같은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하여 인간 존재에 차등을 만드는 모든 사회, 경제, 정치적 제도는 의문의 대상이 된다. 물론, 정의는 자선을 포함한다. 그러나 정의의 관점에서 자선은 ‘평형을 이룰 때까지(고후 8:13-15)’ 급진적이고 끈질기게 이루어져야 한다. 베푸는 쪽의 자기만족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라, 나눔은 언제나 ‘나팔을 불지 말고 조용히(마태복음 6:2)’ 하라고 권고했다.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이었던 장 지글러는 저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글로벌하게 움직이는 ‘자선’이 영속화하는 세계 빈곤의 구조를 고발한 바 있다. 그는 “토지개량도, 사막화 대책도, 빈민가의 인프라 정비도, 농업지원도, 우물파기 프로젝트도 결국은 헛수고로 끝나버릴 응급조치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기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출구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현대의 지성들은 근본적인 방안을 연구하거나 토론하기보다 침묵의 외투 속에 숨어 있다. 그 어떤 선진국이나 국제기구도 ‘나’의 이해관계없이 ‘우리’의 비극을 끝내겠다는 동기 하나로는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글러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이 저서에서 단호하게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어떤가. 불편하지 않은가? 정의를 추구하는 자를 세상은 불편하게 여긴다. 가난한 사람을 적당히 돕는 이는 존경받으나, 극단적 나눔과 평등을 주장하는 자, 가난의 이유를 묻는 자는 제거하려는 것이 세상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당장 기아로 죽어가는 팔레스타인 아이를 살리기 위한 죽 한 그릇에는 엄청난 돈이 기부되지만, 팔레스타인이 국제 사회에서 제 위치를 찾도록 하는 UN 투표에서는 국익을 이유로 기권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자체적으로 식량난을 해결할 노력과 능력과 실현 가능성을 검증받은 남미와 아프리카의 혁명가들은, 바로 그 이유로 거대 자본에 희생되어 왔다. 해외로 일하러 떠난 부모 때문에 방치된 아이들을 위해 도서관을 짓고 열성적으로 책을 보내지만, 바로 그 부모인 우리 사회 속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은 관심 밖인 것이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자선을 소비하기를 즐겨하지만 근본적 정의의 실현은 부담스러워하는 시대다. 또 가난하고 천한 자들이 나와 같다는 발상,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동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발상은 불온한 체제 전복으로 여겨지는 시대다. 어떤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무자비하고 불의한 자선’이 가져온 파괴적인 결과를 자주 목도했다. 그리고 길 위에서 종종 예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예수라면 지금의 우리들에게, 무어라 말씀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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