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매 May 12. 2024

김밥 못 마는 사람은

평생 못 만다고 하더라 




  가방 앞주머니에서 꼬박 한 달이 지난 영수증을 꺼냈다. 친한 동료 S가 김밥집, 아니 정확하게는 후토마끼 가게를 오픈했는데 갔다 와서 한 달이 지난 지금에야 주섬주섬 영수증을 다시 찾아 리뷰를 썼다. 어엿한 사장님이 된 동료는 느닷없이 이런 말을 했다. 

  "김밥 못 마는 사람은 평생 못 만다는 말이 있어요."

  그날의 짧은 만남에서 S는 그 이야길 몇 번이나 힘주어 반복했다. 김밥 못 마는 사람은 평생 못 만다고 하더라. 그 말 너머 무언가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서 그날 이후로도 자주 그 장면이 떠올랐다. 



 





  김밥을 무척 좋아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꼽으라면 김밥을 꼽을 정도로 좋아한다. 맛과 영양은 기본이고 언제나 먹고 싶을 때 손쉽게 찾을 수 있어 좋을뿐더러 김밥 한 줄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정성과 품을 따져보면 가성비까지 넘치는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주는 유난히 김밥을 자주 사 먹었다. 바쁘지만 끼니를 제대로 해결하고 싶은 날, 어김없이 우리 동네의 최애 김밥집을 찾는다. 종일 굶다가 오후 네 시쯤 첫끼를 먹게 된 어느 날에는 제육김밥을 먹었고 그날 먹은 제육김밥이 너무 맛있던 바람에 다음날에는 계란지단김밥과 마약참치김밥을 사서 두 끼에 나눠 먹었다. 이틀 동안 김밥 세 줄을 먹어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다른 종류의 김밥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이번주에는 이토록 좋아하는 김밥에 대해 써야지, 생각했다. 


  어렸을 적 소풍 가는 날 할머니가 새벽부터 분주하게 말아주시던 김밥 맛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할머니의 김밥은 김밥의 정석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 것 하나 빠트리지 않고 재료를 빼곡히 넣어 야무지고 깔끔하게 말아낸 단정한 김밥. 들어간 재료 가짓수는 풍성한데 튀는 맛 없이 적당히 간간해서 자꾸만 집어먹고 싶은 맛이었다. 할머니 김밥에는 꼭 절인 오이가 들어갔는데 그래서 오이가 풍성하게 든 김밥(ex. 얌샘김밥)을 보면 할머니 김밥 생각이 난다. 


  김밥집은 흔하지만 맛있는 김밥집은 결코 흔하지 않다. 몇 년 전 양재동에서 일을 할 때였다. 회사 건물 1층에는 김밥과 토스트, 떡볶이 등을 파는 분식집이 있었다. 야근을 하면서 저마다 한 줄씩 시켜 먹은 김밥은 치즈김밥이든 참치김밥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어쩐지 짠맛만 도드라졌다. 김밥 맛이 어떻다 말할 겨를도 없이 각자 자리에서 호일 포장을 대충 벗겨 한 알씩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일을 했지만 말이다. 기분 탓이었을까 야근 탓이었을까 아니면 진짜 그 맛이 짠맛으로 얼버무려졌던 걸까. 


  모든 음식은 갓 해서 먹는 게 가장 맛있는 법. 앞서 말한 동네 김밥집에서 처음으로 야채김밥 한 줄을 포장해 먹었던 날의 충격과 감동을 잊지 못한다. 분명 눌러서 말아낸 김밥인데도 밥의 고슬함과 촉촉함이 느껴졌고 각각의 속재료는 신선하게 제 맛을 내고 있었다. 쫑쫑 썰어낸 푸짐한 야채들을 얇게 둘러싼 흰 밥, 반지르르한 김까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한 줄이었다. 기본적으로 김밥을 잘하는 집인데 재료도 신선한 최적의 타이밍에 왔구나 싶었다. 그날 이후로 그 김밥집은 내 최애가 되었다. 


  S가 했던 말, '김밥 못 마는 사람은 평생 못 만다더라'는 말이 진짜 있는 얘기인가 궁금해서 브런치에도 검색해 보고 네이버에도 검색해 봤다. 흥미롭게도 그런 이야기는 찾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블로그 하나에 들어가 보았는데 그저 본인이 평생 김밥을 잘 못 말 줄 알았는데 연습하니 몇 개월 만에 마스터하게 되었다는 희소식(?)이 있었을 뿐. S는 누구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걸까. 다음번에 후토마끼를 먹으러 가면 다시 물어봐야겠다. 


  어젯밤 자기 전 쓱배송으로 김밥 재료들을 주문했다. 김밥 말기를 마스터했다는 블로그를 보고 갑자기 도전 의식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김밥을 좋아하지만 그만큼 내게 맛있는 김밥의 기준이 높아 시도할 생각을 안 했었는데 그냥 갑자기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같은 재료로도 조금씩 다른 맛이 나니 아마 내 것도 그렇지 않을까. 평소의 손재주를 생각하면 나도 김밥 못 마는 사람 축에 속할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지만 뭐 어떤가. 평생 못 만다는 저주 같은 말은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으니 일단 말아 봐야지. 잘 말아도 못 말아도 좋을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완벽하지는 않지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