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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Dec 16. 2023

생기부를 쓰려다가

2023.12.16.

  요즘 학교는 매우 바쁘다. 연말이니 생기부를 정리해야하고, 학교도 돈이 굴러가는 기관이라 남아있는 예산을 사용해야하고, 크리스마스 다음날 이어지는 축제를 준비는 일을 하면서도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음향팀을 섭외하고, 현수막을 준비하고 공연 순서를 정해야한다.


  일단 한다. 학교에서 수업과 상담 이외의 모든 일을 이렇게 하는 것 같다. 잘 하고 있나, 이런 일까지 하는게 맞나. 어릴 때 선생님은 수업과 상담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 외에도 자잘한 많은 것들이 따라붙어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잘하는지도 모르겠고, 잘해야할 이유는 더 모르겠고, 잘 하지도 못한다.


  일을 하다가 남는 모든 시간에 생기부를 쓰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글을 쓴다면 좋은 작가가 되겠다. 우리 반 28명에 대해 한 명당 1500바이트 항목 2개, 2100바이트 한 개, 그리고 교과 수업에 대해서는 전체 학생 1500바이트, 동아리까지 쓰다보면 무시 못할 양이 완성된다. 생기부 쓰듯이 몰아 쓴다면 적어도 일년에 책 한 권을 쓸 수 있겠다. 작가들도 마감에 맞춰 몰아 쓰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10년동안 마감을 해봤으니 마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허튼 생각과 함께, 생기부에 쓰고 있는 이 많은 양의 글들은 몇 명이나 읽을 까, 이 중에 몇 명이나 이 글을 가지고 대학을 갈까. 무의미한 짓이 아닐까 하면서도 그래도 대학과 관계 없이 이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장점에 대해 알았으면 좋겠는 마음도 있다. 무의미하다는 마음과, 그냥 아이들에게 쓰는 편지라고 생각하고 쓰자는 두 개의 마음이 교차한다. 어쨌든 하루 종일 내가 사랑하는 타인들에 대해 글을 쓴다. 아마 글쓰기 실력이 조금은 좋아지지 않았을까 희망적인 생각을 해본다. 그래야 계속해서 생기부를 쓸 수 있다.


  이제 학기가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헤어지게 될 아이들과 잘 마무리 하고 싶은데 오히려 잘 만나지 못한다. 아이들은 축제준비를 한다고 수업시간에도 연습실을 찾아 떠돌고 나는 교실을 들여다보고 아이들과 노닥거렸던 모든 시간을 아껴 생기부에 넣고 있다.


  교사들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는 내년에 어떤 지역 혹은 어떤 학교, 혹은 이 학교에 있더라도 어떤 업무를 맡게 될지다. 심할 때는 이미 2학기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 부분에 대해 고민하기도 한다. 자의가 아니라 교직의 시스템에 의해 달라지는 매년이 연말에 불안감을 불러온다. 시험이 끝난 아이들도 떠나야 할 나도 모두 붕 떠있다.


  주말에 출근해서 생기부를 쓰려다가 또 한참을 수업에 대한 글들을 꺼내놔야하는데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좋은 책을 몇 페이지라도 읽고나면 마음이 좀 풀릴 것 같아서 책을 찾았는데 챙겨둔 책이 없다. 계속 화면을 보며 글을 쓰고 있는 상황이다보니 모니터 화면으로 책을 읽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종이 책장을 넘기며 좋은 문장을 하나 만나고 나면 그러고나면 이 답답한 기분이 풀리고 생기부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책이 없어서 그냥 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의 애정하는 타인들 말고, 애정하는 아이들에 대해 쓰다가 눌러두고 머릿속에서 빙빙 반복되고 있는 생각들을 글로 꺼내둔다.


  마음이 조금 풀린다. 다시 생기부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여기는 스노우볼 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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