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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Nov 28. 2016

반짝거리는 것을 쫓느라 다이아몬드를 놓치지 말라

유부 유학생의 고백#1. 이별 후 사무치게 느끼는 평범한 날들의 소중함

한 해를 겨우 넘긴 신혼의 온기를 서울집에 그대로 남겨둔 채 밀라노로 떠나온지 3개월. 낯선 도시에서의 삶은 거의 모든 것들이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4년 넘게 이어졌지만 매일이 비슷하게 기억되던 회사생활의 루틴에서는 경험하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 새로운 환경 (집, 동네, 도시 전체)

- 새로 사귄 사람들  

- 새로운 언어, 음식, 문화


이런 변화들은 뻔하고 지루하고 별 가치 없어보이던 이전의 일상을 잠시 잊는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발코니 너머 보이는 풍경, 나빌리오 강가 바에 앉아 서로 다른 국적의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 익숙하지 않은 이탈리아어로 더듬더듬 말하며 보고, 먹고 느끼고 배우는 것들. 오기 전부터 몇달 간 밤잠을 설쳐가며 머릿속에 그려봤던 상황들이 하나씩 현실화되었다.



처음 집에 도착해 바라본 테라스 풍경


집 앞 나빌리오 운하



첫 2,3주 간은 '새로움'에 취해있었다. 본래 내가 있던 곳에서 경험했으면 별 것 아닐 일들도 새로운 환경이 주는 옷을 입히니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이처럼 느껴졌다. 마트에 가서 수십가지 치즈와 향신료들, 이탈리아 남부 산 과일과 야채들을 둘러보며 저녁거리를 준비하는 소소한 일상도 굉장히 의미있게 느껴졌다. 공항에서 남편, 가족과 떨어지며 눈물 콧물을 쏟은 만큼 외롭거나 서럽지도 않았다.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만들어 먹은 카프레제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세달이 되어가는 시점. 현실은 '새로움의 옷'을 하나둘 씩 벗고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새로운 환경 (집, 동네, 도시 전체) : 남편 없이 혼자 살기 위한 모든 행정 처리와 적응 필요

- 새로 사귄 사람들 : 사고, 성향, 지식 등 차이에 대한 이해와 스스로의 대응 방식 변화 필요

- 새로운 언어, 음식, 문화 : 현지 문화 적응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 필요



새로움을 걷어낸 현실 뒤에는 이미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인내심과 외로움, 그리고 의지가 요구되는,

원점으로 돌아온 모든 것들을 바닥에서부터 혼자서 다시 쌓아올리는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간은 대학 시절 영국에서 연수하던 때나 사회 초년생 시절 스페인으로 떠나와 회사에서 하라는 일하고 놀기만 하던 시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 땐 그저 무엇이든 시작하면 그만이었다.


이번은 달랐다. 그간 내 나라에 적응하고 살아오면서 심적, 물적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쌓아온 여러가지 것들- 안정된 직장, 결혼 생활, 인간관계 -에서 완전히 벗어나야하는 시간이었다. 열심히 마라톤을 뛰다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다시 달리기를 시작하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마약처럼 덮고 있던 설렘은 첫 발을 떼는 순간 무서울 정도로 빨리 걷히기 시작했다. 여유를 찾아갈 수록 이전에는 늘 당연하게 곁을 지켰던 모든 것들의 빈자리가 보였다.


늘 보던 사람, 늘 가던 곳, 늘 먹던 음식, 늘 하던 이야기. 그 자리엔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통째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익숙함의 부재를 인식하면서부터 내가 그토록 '뻔해서 싫다' 던 평범했던 모든 것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졌다. 알람 시계를 맞추고 남편에게 '잘자'하던 매일 밤, 코 앞에 회사를 두고 헐레벌떡 택시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던 아침, 일찍 퇴근 해 식사 같이 하자 연락하던 금요일 저녁, 쇼파에 늘어져 아무 것도 하기 싫어하는 남편에게 나가자고 징징대던 토요일 오후, 온 집안을 음식 냄새로 채우며 집들이 상 차림에 여념없던 어느 일요일, 부은 얼굴 대충 씻고 추리닝 바람에 저녁 늦게 마트로 향해 시식부터 돌던 날들, 친정 찾아가 진수성찬 얻어먹고 냉장고 채울 음식 한가득 받아오던 어느 날, 늘 보던 곳에서 영화나 보고 늘 먹던 곳에서 배달음식을 시켜먹으며 보내던 어느 주말..

 



우리집에서, 어느 평범한 오후 #1


우리집에서, 어느 평범한 오후 #2


우리집에서, 어느 평범한 저녁



새로움이 주는 설렘과 영감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반짝이는 매일의 일상이 있음을, 낯선 땅으로 떠나와 그것들과 완전히 이별하기 전까지 나는 감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떠나기 전 스스로 수많은 질문을 했었다. '새로움에 대한 열망과 호기심이 순간순간에 대한 감사함과 소중함을 가리고 있는건 아닐까?' 그러나 질문을 반복 했음에도 사실 마음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던 것 같다. 그 땐 새로움의 가치가 너무나 커 보였던 것이다. 화려하게 빛나는 것과 비교했을 때 평범한 일상은 그저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언제든 가질 수 있는, 진부하고 초라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늘 내 곁에서 반복되는 평범한 것들은 하루하루 쌓여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나의 일부분이 되어있었다. 특히 그 안에서 변하지 않는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보냈던 시간들이다. 하루하루 나를 지탱해온 사소하고 평범한 시간의 소중함을 더 잘 알고 감사하며 살았다면 나는 아마 다른 결정을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내 곁의 누군가, 내게 주어진 일, 내가 있는 공간과 시간. 이 모든 것이 그저 늘 있는 것이기에 쉬이 여겨질 것이 아님을 깨닫고 감사하고 또 감사함을 느낀다. 결국 이곳에서의 새로움도 어김없이 일상으로 대체되어 갈 것이다. 적어도 눈 앞의 다이아몬드를 놓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지금 내게 허락된 매일의 평범함과 소중함에 다시 한번 감사하며 지내기로 다짐한다.




"Don't Lose A Diamond While Chasing Glitter"

반짝거리는 것을 쫓느라 다이아몬드를 놓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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