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잡음들을 받아들이자!
이십여 년 전 일이다.
지인의 가족이 외출을 할 때 반려견이 집에 혼자 있는 것을 힘들어해 서로 외출 시간을 조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뒷담화를 한 적이 있다. 며칠 집을 비우는 것도 아니고, 고작 몇 시간 개를 혼자 두는 게 뭐가 그렇게 신경 쓰인다고… 유난을 떠는 거라고 생각했고, 별일도 다 있지… 비아냥거렸다. 지금 누군가가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머, 그 집 개도 혼자 있는 거 힘들어해요?” 하면서 동지를 만난 것 마냥 반가워할 것이다. 그렇다. 세월이 흐르고, 나와 우리 가족 역시 반려견 때문에 외출 순번을 정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그때 당시로서는 유난 떨던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 집에는 인간 셋, 강아지 하나, 고양이 셋이 함께 살고 있다. 이 동물 친구들과 함께 살기 전에도 동물들과 함께 살았던 적이 있지만 강아지를 완전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입장에서 최대한 배려하면서 살게 된 것은 지금 함께하고 있는 루가 오면서부터다. 루가 특별히 예쁘게 생겨서 그런 것도 아니고, 특별히 비싼 품종이어서도 아니고,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참고로 우리 가족 눈에는 우리 루가 가장 예쁘고 소중하고 그렇지만 2살 무렵부터 “야는 나이가 좀 있지예?” 혹은 “야! 너, 참 정감가게 생겼다?” 혹은 “너 순 사진빨이구나!” 이런 얘기를 왕왕 들었고, 품종은 이것저것 섞여서 알 수가 없으며 개인기는 자기한테 유리한 말만 알아듣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는 없는 그런 애매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가족을 변하게 만든 것일까?
동물에 대한 인식이 ‘진화’ 한 것은 비단 우리 가족만이 아니다.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가구가 늘어나면서 그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도 함께 진화했다. 동물 복지에 대한 고민들, 자격 없는 반려인에 대한 논란들(동물 학대와 더불어 내 동물이 무조건 우선하는, 그래서 생겨나는 문제들)에 대해 설왕설래하면서 ‘동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변한 것이다.
시골로 이사하고, 반려 동물과 관련해 시골 어르신들의 간섭도 아닌, 나무람도 아닌 말들을 종종 듣게 되는데 그 말에는 바뀐 세상에 대한 받아들임이 담겨있다. 가령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내가 길냥이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서 “뭐 하러 고양이 밥을 돈 주고 사서 주냐. 돈 참 쓸데없이 쓴다. 근데 우리 자식도 개를 끔찍이 애끼더라. 요새 사람들은 사람보다 동물이 좋다 하더라. 안 그래도 어제 ‘동물농장’을 봤는데 개가 사람보다 낫기는 하드만. 하하하!” 하고 말씀들을 하는데 당신네는 이해할 수 없지만 동물들에게 쏟는 마음과 정성을 밉게 보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공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없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어떤 ‘기준’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기준은 여러 사람이 각자의 생각을 알게 모르게 주고받으면서 도달한 지점이고, 또 누군가의 투쟁을 통해서 획득한 성과이다.
모든 일을 본인이 경험하고 겪어보고 극복해 보고, 그 모든 과정을 겪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겪어보고 나서야 깨닫는 일들은 후회가 대부분이다. 경험하지 않아도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상식’이 되는 사회. 때로는 그 상식에 도달하기 위해 제도의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사회에 도달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동물에 대한 인식 개선은 여러 다른 문제에 비해 쉬운 문제인 것 같다. (일단 동물은 인간과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으며 (대부분) 무해하고, (대부분) 귀엽고 예쁘니까.)
십 년 전 별거 아닌 농담이 오늘은 차별적 발언으로 문제가 되기도 하고, 오 년 전 만해도 불가능했던 표현이 오늘은 일상적 표현이 되기도 하며 또 앞으로 십 년 뒤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잡음들이 보다 나은 ‘상식’을 만들어 낸다. 인간은 그렇게 시끌벅적, 티격태격 일보전진 이보후퇴 하면서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