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대식 Sep 13. 2015

요괴워치보다 아빠를 찾았으면 좋겠다

#26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그냥 쉬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빠들이 품절된 ‘요괴워치’를 구하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는 뉴스가 눈에 들어온다. 다행히 태어난 지 5개월 된 아이는 ‘요괴워치’가 뭔지 모른다.


그렇다고 어린이날이 여전히 그냥 쉬는 날인 건 아니다. 장모님은 아이의 옷과 모자를 준비하셨고, 처형은 친환경 장난감과 옷을 아이 앞으로 보내왔다. 나도 처조카들에게 작은 가방을 준비했는데, 장모님과 처형의 선물에 비하면 약소한 것 같다. 그래도 처조카와 잘 놀아주는 나만큼 좋은 선물이 있을까(ㅋ).


사실 어린이날은 아이가 아닌 아빠들에게 중요한 행사인 것 같다. 바쁜 일상 탓에 아이를 돌보지 못한 아빠들이 많다. 나 또한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생각만큼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요괴워치 소동’은 어린이날만큼은 아빠 노릇을 하고 싶은 욕구가 발현된 게 아닐까.


4월 중순부터 아이와 떨어져 있었다. 아내와 아이는 처가인 포항에 갔다. 많은 아빠들은 내게 진심으로 부러운 눈빛을 쏘았다. 처음엔 "아이 보고 싶어 죽겠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가 좋았다.오랜만에 영화를 봤고, 술 약속도 많이 잡았다. 그래도 아이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큼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린이날이 낀 황금연휴가 다가왔다. 5월 4일 휴가를 내면 노동절인 5월 1일부터 어린이날까지 긴 연휴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선후배들도 그날 쉬고 싶을 것이다. 5월 1~2일 세월호 참사 범국민철야행동이 예정돼 있었다. 취재를 자원했다. 밤을 새우는 게 예상됐지만, 5월 4일에 쉬려면 어쩔 수 없다. 새벽 5시 15분 포항행 KTX 첫차를 예매했다. 힘든 밤을 보내면, 이튿날 아침에 아이 앞에 짠 하고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유식을 시작한 아이. 맛이 왜이래?


취재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지난 2008년 광우병 사태 당시 촛불집회 이후 가장 힘든 취재였다. 캡사이신이 잔뜩 들어간 물대포를 맞았다. 온 몸이 흠뻑 젖었다. 화단 옆에 있었던 탓에 물대포에 의해 튀어 오른 흙을 뒤집어썼다. 캡사이신이 눈과 입에 들어갔다. 웩웩 구역질을 해댔다.


5월의 새벽은 쌀쌀하다. 반팔을 입은 데다, 옷이 온통 젖으니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친한 기자의 도움으로 카디건을 빌려 입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이날 취재는 해가 뜰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KTX 첫차는 타지 못했다. 뒤이어 오전 7시 10분, 8시 40분, 9시 45분 KTX를 예매했다가 취소했다.


낮 기차는 매진이었다. 포항에 있는 아내도 서울 안국동 거리에 있는 나도 코레일 앱을 계속 해서 새로고침했다. 해가 중천에 솟은 뒤에야 취재가 끝났다. 운 좋게 오후 2시 45분 KTX를 예매할 수 있었다. 집에 가서 씻고 서울역에 가서 KTX에 올랐다.


처가에서 훌쩍 자란 아이를 안으니 괜스레 코끝이 찡했다. 못 본 시간들을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싶어, 새벽에 아이가 깨면 내가 일어나겠다고 아내에게 호언장담했다. 이튿날 새벽 피곤에 찌든 난 일어나지 못했다.


연휴 때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봤다. 눈도 초롱초롱하고 코도 오뚝하다. 팔을 잡아주니, 두 발로 제법 버틴다. 어느새 스스로 모로 누울 수 있다. 장모님 말로는 스스로 뒤집었단다. 벌써 이만큼 컸구나. 아이를 와락 껴안았다. 몇 년 후 어린이날 아침, 아이가 요괴워치보다 아빠를 찾았으면 좋겠다.


- 2015년 5월 5일 아빠가


브런치가 생기기 전, 티스토리에 썼던 봄이네 육아일기(0~29편)를 이곳 브런치에 옮겨 담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