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아내는 오래 전부터 오른쪽 손목이 아프다고 했다. 하루 종일 아이를 업고 안으니 당연히 손목에 무리가 갔다. 특히, 아이가 또래 평균보다 잘 자란 덕에 아내의 손목은 다른 엄마들보다 더 나빠졌을 것이다.
최근에는 손목을 움직이기 힘들다고 했다. 여기에 "몸 성한 데가 없으니, 장모님께 반품 요청을 해야겠다"며 농담을 했다. 그만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우리 부부를 잘 아는 한 선배가 내게 자주 하는 말이 들리는 듯 하다. '이 한심한 놈아.'
상황 파악이 느린 남편은 아내에게 “내가 하루 휴가를 낼 테니, 병원에 가서 치료 받도록 해요”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며칠 지나면 다시 좋아지겠지’란 생각이 컸다. 아내는 무심한 남편을 고른 탓에, 손목이 망가지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저께 아내는 병원에 가겠다고 했다. 내가 점심시간에 아이를 맡아주면 그 시간에 병원에 갈 계획을 내놓았다. 나더러 점심을 먹지 말고 회사 근처 병원 앞으로 나와 달라고 했다. 순간 망설였다. 이튿날 아침 눈치 빠른 아내는 “일하는데 민폐를 끼치는 거 같다”며 내 점심 도시락을 쌌다. 눈치 없는 남편은 그저 좋아라 했다.
내가 출근한 뒤, 아내는 끙끙 앓았던 모양이다. 아내는 내 퇴근길에 맞춰, 아이를 안고 회사 앞으로 왔다. 함께 병원으로 갔다. 엑스레이를 찍은 뒤 진료실에 들어간 아내는 5분 뒤 손목에 반깁스를 한 채 나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오히려 아내는 발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깁스를 한 팔을 내보였다.
“인대가 늘어나고, 염증이 많이 생겼대요. 다른 사람들보다 상태가 심각해서, 주사를 세 번이나 맞았어요. 이제 아이 못 안으니, 당신이 안아요. 하하”
아내에게 휴가를 주기로 했다
울상이 아니라 마음이 놓였다. 아내는 곧 "배가 고프다"고 했다. 아내도 나만큼이나 허한 걸 싫어한다. 미안한 마음을 전할 새도 없이, 식당가로 갔다. 아내는 말했다.
"집밥 말고 아무거나 다 좋아요. 내가 만든 건 빼고 다 맛있어요."
피자를 먹으면서 우리는 앞으로를 고민했다. 깁스한 손으로 나이프를 들고 낑낑대며 피자를 자르고 있던 아내에게 "휴가를 쓸까?"라고 물었다. 오늘과 내일 내가 출근하면, 아내 혼자 아이를 돌봐야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아내는 선택을 내게 미뤘다. '전날 밤 갑자기 휴가 쓴다고 말하기가 좀 그런데...'
1시간 뒤, 아내의 손목 깁스 사실을 안 장모님은 당장 포항에서 우리 집으로 올라오시겠다고 했다. 헉. 급하게 팀장에게 연락했고, 결국 오늘과 내일 휴가를 쓰기로 했다. 휴가 이틀과 석가탄신일 연휴 3일을 합쳐 5일 동안 내가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도맡아 하기로 했다.
아내에게는 5일의 휴가를 주기로 했다. "육아를 내게 맡기고, 푹 쉬어요." 아내가 좋아하는 스타벅스 카페라떼를 사서 건넸다. 손목 깁스한 걸 빼면, 오랜만에 외식을 하고 스타벅스 카페라떼를 마신 아내의 기분은 좋아 보였다.
집에 와서 <무한도전> 재방송을 틀었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능프로그램이다. 육아 때문에 제대로 <무한도전>을 보지 못했던 아내는 시종일관 껄껄 웃었다. 연휴 전야, 아내는 웃으면서 잠들었다. 지인들에게는 "혼자 육아한듯 반깁스했다ㅋ 뭉쳐요 뭉쳐"라는 소식을 전했다.
이렇게라도 아내에게 육아에서 벗어날 시간을 줄 수 있어 다행이다 싶다. 어서 아내의 손목이 낫길 빈다. 내가 육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 2015년 5월 21일 아빠가
브런치가 생기기 전, 티스토리에 썼던 봄이네 육아일기(0~29편)를 이곳 브런치에 옮겨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