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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대식 Sep 17. 2015

집주인은 2만 원을 아까워했다

#35

시나브로 이사하는 날이 왔다. 지난주 금요일이었다. 더 넓은 집으로 옮긴다. 아침부터 마음이 달떴다. 오전 8시 이사 업체 직원들이 박스를 집 안에 늘어놓고, 세간살이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장모님과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새로 이사할 집으로 건너갔고, 나는 남아서 이사를 지켜봤다. 신혼집과 이별한다는 생각에 잠시 감회에 젖었다.


이사 중간에 집주인 쪽 부동산공인중개사무소에 가서 전세금을 돌려받았다. 그곳에서 “25만 원짜리 도어락을 놓고 가니 잘 쓰세요”라고 말했다. 집주인과 공인중개사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집주인은 “고마워요”라고 했고, 공인중개사는 “처음 전세 계약 할 때는 젊은 사람들이라 깐깐한 줄 알았는데, 좋은 사람이었네요”라고 말했다.        


예전 도어락은 이 집을 계약하고 얼마 뒤 고장 났다. 우리 부부가 신혼여행 갔을 때,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신혼집에 왔었다. 도어락은 열리지 않았고 큰돈을 주고 교체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왔더니, 정말 좋은 도어락이 달려있었다. 교체한 지 열흘 가까이 지난 뒤라 집주인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이사하면서 도어락을 떼어가려고 했지만 비용과 설치의 어려움 때문에 포기했다.      


세간살이를 스카이차로 옮길 때쯤 집주인 부부가 나타났다. 집주인은 다시 한 번 “집을 깨끗하게 써서 고마워요”라고 했다. 세간살이를 모두 옮긴 뒤, 마지막으로 집주인에게 “아들 낳고 잘 살다 갑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집주인도 “앞으로도 잘 사세요”라고 했다. 그렇게 웃으면서 이 집과, 집주인과 작별했다.      


이사는 순조로웠다. 새집은 어찌나 넓어 보이는지. 오늘은 완벽한 하루였다.      

이사하는 날, 아침부터 마음이 달떴다

새로 이사할 집에서 점심으로 짜장면을 시키려는데, 갑자기 ‘전’ 집주인으로 전화가 왔다. 방충망이 찢어졌으니 와달라고 했다. 이미 짐을 뺐고 웃으면서 헤어졌는데, 집으로 와달라니…. 갔더니, 집주인은 교체 비용 4만 원의 절반을 부담하란다.     


불과 1시간 전, 25만 원 짜리 도어락을 놓고 간다니 좋아했던 집주인이다. 또한 집주인이 새로운 세입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해서, 전세계약 만료일로부터 한 달 뒤에 전세금을 돌려받았다. 그만큼 이사가 늦어졌다. 도배도 우리가 했다. 우리가 비용을 들여 집 여기저기를 수리했다.      


집주인 입장에서 계약이 만료된 세입자에게 원상 복구를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방충망이 있던 창문을 쓰지 않았던 터라, 방충망이 언제 찢어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 집에 살면서 이래저래 적잖은 돈을 부담한 세입자로서, 돈 2만 원을 아까워하는 집주인의 모습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집주인에게 “서운하네요”라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간의 사정을 얘기하고 도어락을 떼어가겠다고 했다. 집주인 부부는 똥을 밟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집주인은 “돈은 안 줘도 됩니다”라면서 말을 바꿨다. 돈은 아꼈지만, 진상 세입자가 됐다.       


새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실 우리 부부는 새로 이사 갈 집의 집주인한테 불편한 소리를 들은 터였다. 이사할 집은 방충망이 찢어져 있었다. 싱크대에선 물이 샜고, 작은 방 천장엔 전등을 잃은 전선만 매달려 있었다.     


집도 오래됐고, 그 전 세입자가 8년을 살았던 터라 집 곳곳이 말썽이었다. 내가 출근한 어느 날 아내는 우선 집주인에게 방충망을 수리해달라고 했다. 돌아온 대답은 “꼭 방충망을 교체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사실 찢어진 방충망은 3곳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한 곳만 교체를 요구했던 터였다. 아내는 졸지에 고치지 않아도 되는 걸 고쳐달라고 요구한 세입자가 됐다.      


우여곡절 끝에 이사를 마무리했고, 집 곳곳도 수리했다. 이사는 순탄치 않았지만 새집에서 며칠을 지내니 기분이 좋아졌다. 특히 아이는 넓은 거실에서 이리저리 맘껏 기어 다닌다. 좋은가보다. 아이가 좋으면 나도 아내도 좋다. 그래, 우리 세 식구에게는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다. 이상국 시인의 시에 위로를 받는다.     

아이는 넓은 거실을 좋아했다

쫄딱 - 이상국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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