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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대식 Sep 29. 2015

아이, 아빠 회식에 참석하다

#37

지난주 월요일 오후 6시. 아내가 아이를 안고 내가 다니는 회사 건물 앞으로 왔다. 우리 회사는 거대한 업무용 빌딩에 세 들어 있다. 아내는 힙시트에 앉아 있던 아이를 내게 넘겼다. 그러곤 말을 못 알아듣는 아이에게 "아빠 말 잘 들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업무용 빌딩 입구에서는 ‘칼퇴근’ 하는 직장인들이 대거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앞을 서성이며 퇴근행렬을 지켜봤다. 이곳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내 모습은 업무용 빌딩과는 썩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퇴근하는 사람들이 내게 눈길을 한 번씩 건네는 것만 같았다. 괜히 민망했다.      


우리 회사 사람들도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차마 인사를 할 수 없었다. 얼마 전 회사 후배 결혼식에 갔을 때, 아이와 잘 놀아줬던 후배 모습이 보였다. 후배를 불러,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후배는 나와 아이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나마 아이는 괜찮게 나왔지만, 나는 오징어처럼 나왔다.     


근데 나는 왜 퇴근하지 않고 회사 앞에서 아이를 안고 서성이고 있었을까. 바로 부서 회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응, 뭐라고?     




우리 부부에겐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일을 하신다. 처가는 포항이다. 아내는 아이가 태어난 후 지금까지 9개월 넘게 집에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내가 육아에 전념한 것은 내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사회적 꿈을 미루고 집안에 틀어박혀야 했다.     


9월부터 아내는 다시 세상으로 한 발 내디뎠다. 평일 저녁 두 번과 주말, 아내는 학교에 간다. 아내는 우리 가족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전공 분야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새롭게 공부를 시작했다. 좀 더 빠르고 안정된 직장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아내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언젠가 내가 물었다.      


공부 계속 하고 싶었잖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마흔 전에 다시 (전공 분야 박사과정을 공부할) 학교로 돌아가는 게 목표에요. 가능하지 않겠어요?     



아내는 남편을 안심시키려 애써 웃었다.     

추석 연휴, 사과를 가지고 노는 아이.

아내의 수업은 오후 7시다. 오후 6시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늦어도 그때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아내가 학교에 가는 날이면 장모님이 서울로 올라오셔서 아이를 봐주셨다. 하지만 며칠 전 월요일엔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일이 있어 포항에 내려간 장모님은 안타까워했다. 그런 사정 때문에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회사까지 찾아왔다.      


부서 회의가 있었다. 미리 양해를 구하고 회의 중간에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바로 집으로 갈 수 없었다. 한 선배가 좋은 일로 밥을 산다고 해서, 남았다. 아이 때문에 선후배들이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내는 연신 문자를 보냈다.      


민폐죠? 어떡해요. 나중에 부서 사람들 집에 한 번 초대해서 과메기라도 먹어요. 미안해요.


다행히 선후배들은 아이가 귀엽다며 다들 한마디씩 했다. 아이를 두 번째 보는 한 후배는 아이 옆에서 “까꿍” “까꿍”하며 아이를 돌봐줬다. 이런 배려 덕에 아이는 회식 분위기에 잘 적응했다. 아이는 다행히 낯을 가리지 않고 히죽히죽 잘 웃었다. 한 후배가 아이를 잠깐 안아준 덕분에 밥도 먹을 수 있었다.       


아이의 첫 아빠 회식 참석은 성공적이었다.     


앞으로가 문제다. 매주 장모님에게 포항에서 서울로 오시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기자 특정상, ‘칼퇴근’이 보장되지 않고, 퇴근 장소도 제각각이다. 우리를 안타까워하는 장모님은 자주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하셨다. 우리 부부는 그러지 마시라고 했다. 우리끼리 되는 데까지 견뎌보기로 했다. 쉽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때까지 누군가 육아를 전담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다시 희생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내는 지난 9개월 동안 충분히 엄마로서 제 역할을 했다. 황성희 시인의 시 <거울에게>를 읽으면서, 아내를 생각했다.     


그동안 고생했어요. 조만간 육아휴직을 써보도록 할게요. 그전에는 ‘칼퇴근’해 아이를 돌볼게요.


거울에게 / 황성희     


그때 나는 빨래를 널고 있었다 

제목도 없는 시간 속으로 

태양은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지고     

 

나는 마치 처음부터 

빨래 건조대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마치 처음부터 

엄마엄마 보행기로 거실을 누비는 

저 아이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마치 처음부터 

베란다 너머 저 허공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익숙해익숙해미치겠어 

오늘 하루도 눈감아 주는데      


거울아 거울아!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니?      


하고 묻는 것이 코미디처럼 느껴지는 

마치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시간 속에서 

이제껏 살고도 날 모른단 말이야? 

비아냥댈 것 같은 시간 속에서 

도대체 빨래나 널고 있지 않으면 

저마다의 베란다에서 저렇게도 마음 편히 말라가는 

아파트의 빨래들이나 멍하니 감상하지 않으면      


거울아 거울아! 

도대체 무엇을 하겠니?      


나는 마치 처음부터 나로 

수천 년 수만 년을 살아온 듯 

너무도 익숙하게 

내 팔 속으로 내 팔을 뻗고 

내 다리 속으로 내 다리를 뻗고 

내 얼굴 속으로 내 얼굴을 드밀며      


안녕안녕선생님? 

안녕안녕친구들?      


오늘도 이렇게 인사하는데      


- 황성희 시인의 시집 <엘리스네 집>(민음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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