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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nae Aug 10. 2021

네팔의 현재를 담는 공간, 마이티가르만다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공론의 공간

사랑하는 나의 네팔. 너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처음 네팔이란 나라와 만나게 된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으니, 한 때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곳이 이렇듯 애틋해진 것은 시간이 그만큼 지나간 이유도 있겠지만 그 인연에 상당한 깊이도 있었기 때문이다.

카트만두를 일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곳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카트만두는 내가 전혀 모르던 또 다른 곳이었다. 내가 책과 현장을 통해 경험했던 네팔의 역동성, 아름다움을 이 공간을 통해 조금 나누어보고 싶다.  


코로나가 2년 가까이 기승인 요즘에는 잘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코로나 직전까지만 해도 네팔 언론을 통해 시위 관련 기사를 접할 때마다 이런 장면을 종종 보곤 했었다.

출처 : Kathmandu Post

후기 식민지 도시의 정치적 공간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2년 전의 나는 이 공간을 상당히 관심있게 지켜보았더랬다. 상당히 개인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질문일 수도 있지만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왜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이나 파탄 더르바르 광장이 아닌 저곳일까?"

"저기 도대체 어디지;;?"


아무튼 이런 질문을 시작으로 이곳의 역사를 뒤져보았었다. 나름대로 정리한 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본다.

 




마이티가르만다라(Maitigar Mandala)


기사에 자주 등장하던 저곳은 여러 가지 꽃들로 수놓아진 커다란 문양이 있는 로터리인데, 사람의 눈높이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건물 위에서나 드론으로 찍은 사진을 보면 그 문양이 만다라 모양을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곳은 "마이티가르만다라(Maitigar Mandala)"라고 불리는 곳으로 최근 십수 년 동안 네팔의 국가적 상징으로 부상한 곳이기도 하다. 계획상으로는 공원으로 조성해 놓기는 했는데 카트만두의 세 개의 주요 도로이자 통행량도 많은 도로의 로터리에 위치하고 있어 무단횡단을 하지 않고는 사실 공원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만다라 (출처: wikipedia)

그래도 이 공간이 중요한 이유는 카트만두에서 이 공간의 지리적 위치 때문인데, 정부청사에 해당하는 싱하더르바르가 북쪽으로 위치하고 있고, 네팔 중앙은행인 라스트라 은행과도 인접해 있어 카트만두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 되는 지역에 인접해 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개발로부터 소외되었던 박타푸르를 바깥 세계와 연결했을 뿐만 아니라 티베트로 연결되는 아라니코 고속도로가 연결되는 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정치와 경제에서 대외의존도가 높은 네팔의 상황을 미루어볼 때 티베트로부터 연결되는 길이 싱하더르바르 앞에서 끝나는 도로의 형태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마이티가르 만다라는 카트만두의 행정, 교통, 금융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다.


잠시 디자인 프로그램을 켜서 위치를 표시해볼까 생각했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은 단순 취미라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넘어서지 않기 위해서 열정과 욕심을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 공간이 카트만두에서는 지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그 중요성에 비해 공간의 역사가 너무 짧다. 카트만두에 있는 역사적 건물들은 수백,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인류사적 유물들이기도 하다. 이곳은 수백 수천년의 시간을 품은 카트만두 다른 역사적 건축물들의 나이를 미루어볼 때 태어난 지 20년밖에 되지 않은 정말이지 신생의 공간이다.


이 공원이 처음 조성된 것은 2001년 제11회 SAARC(South Asian Association for Regional Cooperation)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처음 조성이 된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 공간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정부의 야심 찬 계획이나 목표는 없어 보인다. 당시 네팔 정부는 국제행사 진행을 위해 트리뷰반 국제공항에서 시내로 연결되는 고속도로의 끝에 무언가를 만들고자 급하게 계획했고 건설도 두 달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그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2주의 기간을 두고 살던 집을 비워야 했으며, 원래 살던 사람들을 쫓아내고(보상금은 줬지만) 건물을 부수어 이 공간이 조성된 것이다. 그렇게 급조된 계획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현재는 네팔의 주요한 상징 중 하나로 각광받게 된 것이다. 나는 이 공간이 이토록 중요해진 이유는 전적으로 도시계획의 덕이 아닌 네팔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이 곳에 계속해서 모여왔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식민의 시대

나는 현재를 살아가는 네팔 사람들에게 카트만두나 파탄, 박타푸르의 더르바르 광장보다 이곳이  중요한 공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네팔의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카트만두 분지는 원래 네와르(Newar)라는 농사를 주로 짓던 사람들이 작은 왕국들을 이루고 살던 곳이었다. 원래 산악지대에 살고 있던 고르카(Gorkha) 사람들이 작은 왕국들로 이루어져 있던 네팔을 통일하고 카트만두 분지를 정복한 것이 불과 1768년이었다. 당시 정복전쟁의 계속되는 승리로 의기양양했던  왕조(고르카) 영토를  넓히려고 했는데 동인도회사의 영국군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 영토를  이상 넓히지 않았다. 당시 서양 군대의 군사력을 경험한  왕조는 대외적으로는 서양 열강들과 가깝게 지내면서도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리적 요건을 요새 삼아 1950년까지 카트만두로의 외세의 접근과 침입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던 사람들이 바로  왕조의 라나 가족이었다. 당시 라나 가족은 유럽 국가들을 다니면서 사치품을 들여오고 유럽식 도시계획  건축양식을 받아들여 카트만두에 유럽식 근대건물을 지으면서도 일반 사람들과 외국 문물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했다. 또한 당시 카트만두 왕국이나 파탄 왕국의 지리적 중요성을 상쇄하기 위해 역사적 도시의 외부에 크고 호화로운 궁을 짓는 식으로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중의 하나가 현재 싱하더르바르의 건물이다. 그래서 싱하더르바르(과거 라나들의 궁궐) 현재와 같이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 중심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서 지어지게  것이다. 바로 내부 식민(Internal Colonisation) 시대였다.


1927년의 싱하더르바르 인근의 지도 (출처 : Niels Gutschow, Hermann Kreutzmann. Mapping The Kathmandu Valley)


1920년의 싱하더르바르 모습 (오른쪽 하얀 건물이 있는 곳이 현재의 마이티가르 만다라 위치) 출처 : Wikipidia


1949년 카트만두로 차를 가지고 오는 모습(출처 : Nepal Times)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차단한 채 카트만두에 대한 식민지배 아닌 식민지배를 해오던 라나 가족은 샤 왕조의 트리뷰반 왕의 혁명에 의해서 1951년 104년간의 독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혁명 이후

그렇다고 이것이 진정한 네팔의 독립이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이 혁명은 라나의 독재를 무너뜨리는 성과가 있기는 했지만 네와르와 네팔 다른 왕국들을 정복했던 샤 왕조의 시대는 2008년까지 계속되었다. 독립 이후 네팔은 입헌군주제로 전환하기는 했는데, 그 후의 왕들이 실정과 독재시도를 거듭했고, 의회는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으며, 독립 이후 국제정치의 한복판에 놓이게 된 네팔은 주로 인도와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되었다. 싱하더르바르 인근(타파탈리)에서 인도로 연결되는 도로가 건설되고 중국으로 연결되는 아라니코 고속도로는 마이티가르로 연결됐다. 급격한 도시화로 카트만두는 심각한 난개발로 인해 대기오염과 같은 부작용도 안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아라니코 고속도로를 타고 마오이스트의 영향을 받은 네팔인들이 1990년과 2006년 두 차례 혁명(나는 혁명이라고 말하고 싶다.)을 일으켰으며 샤 왕조는 2008년 마침내 완전히 끝나고 네팔은 공화제 국가가 된다.


마이티가르만다라가 담아내는 네팔의 현재

그 후로 네팔은 안정되고 민주주의가 정착했는가? 그렇지 않다. 오랜 논의를 거쳐 2015년에 겨우 첫번째 개헌이 되었음에도 국내 정치는 여전히 어지러운 듯하고, 도시계획은 외국자본의 이권이 움직이는대로 되고 있으니 총체적인 도시계획은 아직도 먼 나라 이야기인 것 같다.


네와르 사람들은 네팔어와 함께 여전히 자신들의 언어를 쓰고 있고 자신들의 전통을 가지고 살고 있다. 카트만두에 살고 있는 수 많은 다른 부족들도 마찬가지다. 1950년대 이후 급속도로 이루어진 도시의 확장으로 인해 지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왔고 카트만두의 인구 지형도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간 갈등 종교의 갈등, 전통과 근대의 갈등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네팔이라는 ‘국가 만들기’ 혹은 공동체 만들기는 구조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이런 네팔의 현재에 네와르의 공간도 고르카의 공간도 아닌 새로운 네팔인들의 공론의 공간이 ‘마이티가르만다라’가 된 것이다. 그렇게 현대 네팔의 공간이 된 마이타가르를 코로나로 세계가 이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네팔 신문에서 계속 보곤 했었다.




네팔 만다라

카트만두를 옛날에는 네팔 만다라라고 부르기도 했다. 만다라는 원이라는 뜻으로 세계의 본질과 균형, 연결과 조화를 뜻한다. 현재 네팔 사회 안에 존재하는 역동성과 다양성을 모으고 네팔만의 민주주의와 광장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현재의 네팔에서 만다라가 주는 가르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친구들이 잘 해낼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계속 이 글을 쓰는 곳이 한국의 여름휴가지가 아닌 시끄럽고 먼지 날리는 파탄의 카페였으면 좋았었겠다고 계속 생각했다. 모두 곧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2019년 5월인가... 파탄 더르바르 스퀘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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