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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Jul 06. 2017

헤진 티셔츠와 서핑보드

2016년 3월, 시드니 본다이 해변가에서 

헤진 티셔츠와 서핑보드, 

구멍 난 신발과 스케이트보드


 해안가 산책로를 걷기 위해 마루브라 해변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한 남자가 자기 키보다 큰 서핑보드를 안고 버스에 올랐다. 그는 내 앞 좌석에 앉았다. 진한 녹색 티셔츠에 반바지 선글라스를 낀 전형적인 서퍼였다. 나는 그 녹색 셔츠의 헤진 목둘레가 마음에 들었다.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하며 세월을 보냈을 셔츠의 역사가 그 헤진 목둘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빛 바랜 티셔츠와 그만큼 오래되어 보이는 바지를 입고 낡고 오래된 자전거를 탄 체 내 앞에 멈춰 섰던 그에게는 어떤 매력이 있었다. 그는 내게 몬주익 언덕을 함께 걷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망설였다. 눈동자에서 수줍음이 느껴졌고 내게 쉽게 말을 건넨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 날 그에게 연락처는 주었지만 몬주익은 함께 걷지 않았다.


 그날 이후 그를 다시 만나기까지 다가온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느라 온 마음을 쏟아야 했다. 결국 우연이 인연이 될 것인지 그냥 지켜보기로 했고 우리는 몬주익 광장에서 다시 만났다. 야구모자를 쓰고 몸에 비해 조금은 커 보이는 티셔츠 낡은 반바지를 입은 그가 빨간색 크루저 보드를 타고 내게 다가왔다. 우리는 몬주익 언덕을 함께 걸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지만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조건들이 나를 망설이게 했다.


 우리는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앉아 잠시 지친 다리를 쉬게 했다. 그가 갑자기 자신의 구멍 난 신발이 날 당황하게 했는지 물었다. 사실 그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설사 내가 이미 알아차렸다 해도 그것이 그를 더 매력적이면 매력적이게 했지 그가 부끄럽게 느껴질 이유는 없었다. 그의 스케이트 보드와 함께 수많은 기술들을 익히며 이리 긁히고 저리 부딪히느라 고생한 세월의 흔적을 누구도 감히 부끄러워할 수 없으리라. 그 또한 그것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내가 만약 그의 구멍 난 신발이 싫다고 했다면 그는 새 신발을 사는 대신 나를 떠났으리라.


 오래된 물건들에는 어떤 힘이 있다. 세월이 남기고 간 흔적으로 가득한 물건은 그것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티 없이 깨끗하고 멋진 새 물건들이 겉보기엔 보기 좋을지는 몰라도 오래된 물건이 지닌 아름다움과 멋을 느끼기엔 무언가 인위적이다.


 그는 오래된 물건과 같은 멋을 지녔다. 겉으로 잠깐 보기엔 낡고 초라해 보이지만 더 자세히 관찰하면 그는 최신 유행으로 온몸을 둘러싼 ‘쿨’한 무리의 사람들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을 내뿜는다. 매일 같은 눈동자이지만 매일 다른 눈빛을 가졌고 틀 안에 갇혀있지 않으면서도 불안함을 느끼지 않으며,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살아내고 있었다. 사실 가끔 누군가 그가 내뿜는 멋을 알아차려버릴까 두렵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자세히 보지 않는 요즘 사람들에게 매우 감사하다. 그가 가진 아름다움을 온전히 나 홀로 감상하고 관찰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도 그의 기억 속에 구멍 난 신발이 될 수 있기를 조용히 소망해본다.


2016년 3월, 시드니 본다이 해변가에서 

고요.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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