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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Feb 13. 2017

집순이의 여행 방식

공간과 장소

2014년 8월 19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출처: Google image


  세인트 자일 성당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갑자기 지난 학기에 수강했던 비교문화사회학 강의 내용 중 한 부분이 떠올랐다. 장소와 공간에 대해 공부하는 장이었는데 현대인에게서 장소감은 점점 사라져 가고 공간만 남아간다는 내용이었다. 어려운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 별거 아니다. 


  장소와 공간. 얼핏 보면 비슷한 개념인 듯 보인다. 하지만 사전을 찾아보면 두 단어의 의미는 다른 느낌을 준다. 먼저 장소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일이 이루어 지거나 일어나는 곳"이다. 반면 공간의 사전적 정의는 다양하지만 대표적인 두 가지를 꼽자면 "아무것도 없는 빈 곳" 혹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범위"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¹ 두 단어의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긴 하지만 아직 명확하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¹네이버 국어사전(http://krdic.naver.com/) 검색어 '장소', '공간'



  이번엔 학자들의 정의를 살펴보자. 1997년 지리학자 '이 푸 투안'은 『공간과 장소: 경험에 대한 관점』이라는 책을 발표한다. 저서의 제목처럼 투안은 공간과 장소의 개념을 인간의 경험을 중점으로 풀어나간다. 그가 제시하는 공간과 장소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구분되지 않는 공간으로 시작된 것은 사람들이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그곳에 의미부여를 하면서 장소가 된다.²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는, 아직 관계를 맺지 않은 곳을 공간이라고 한다. 반면 장소는 인간에 의해 사유되고 체험된 공간이다.³ 장소감이라는 개념도 이러한 장소의 개념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를 한번 들어보자. 우리는 출근길의 버스에 공간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저 '집'과 '회사'를 잇는 빈 공간일 뿐이다. 


  하지만 그 버스에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매일 그 혹은 그녀와 같은 버스를 타기 위해 시간을 맞춰 나오기 시작한다. '집'과 '회사'를 잇는 공간에 불구하던 버스에 짝사랑과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의 추억이 쌓인다. 이제 그 버스는 더 이상 텅 빈 공간이 아니다. '버스'는 '나'에 의해 체험되고 사유된 장소로 탈바꿈한다. 


²이 푸 투안(1997).『공간과 장소: 경험에 대한 관점』.대윤

³이승호, & 오은영. 공간에서 장소로:[외로운 런던사람들] 의 런던 지도 다시 그리기.


  사회학자들은 현대인의 삶에서 이러한 장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말한다. 시간마저 돈으로 계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을 사유하고 체험하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추세가 여행에도 반영된 듯 많은 사람들이 짧은 시간 안에 넓은 여행지를 관광하기 위해 공간과 공간 사이를 바삐 돌아다닌다. 여행에 투자한 자본이 결코 적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의 무엇을 얻어가려는 사람들의 마음도 얼핏 이해한다.  


  하지만 집순이인 나는 그것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 에너지의 방향이 바깥보다는 안쪽으로 향하는 내향형 사람인지라 하루에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 매우 피곤하다. 소화를 잘 못해서 천천히 씹어 먹는 걸 좋아하고 밥 먹는데도 한참 걸린다. 책을 읽을 때도 오래 읽고 다시 읽는다. 읽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하느라 다음 책을 읽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여행도 다르지 않다.


  나는 한 나라 혹은 한 도시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걸 좋아한다. 좋아하는 공간을 발견하면 그곳에 오랫동안 머문다. 공간을 렌즈에 담아보고, 종이 위에 그려보고, 글로 풀어보기도 한다. 어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기도 한다. 공간을 채우는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과 대화도 한다. 공간이 장소가 될 때까지. 하나의 추억으로 가슴속에 세겨질 때까지. 그곳에 머문다. 


공간을 온몸으로 느끼고 기억하고 표현하려는 것,

공간을 장소로 바꾸려는 시도.


이 것이 여행이 내게 주는 의미이자 내가 여행하는 방식이다.  




2014년, 여행을 막 시작하던 무렵

고요




참고문헌

이 푸 투안(1997).『공간과 장소: 경험에 대한 관점』.대윤
이승호, & 오은영. 공간에서 장소로:[외로운 런던사람들] 의 런던 지도 다시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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