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디 R8 V10 퍼포먼스를 타며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덮은 플라스틱 뚜껑 위로 커피가 살짝 새나왔다. 풋워크에 온통 신경이 집중되었다. 저 짙은 액체가 테두리 홈을 타고 흘러 넘쳐서는 안 되겠기에. 잠시 잊고 있었다. 방금 바다에서 튀어나온 고래등 위에 타고 있다는 것을. 골목을 벗어나 넓은 길을 만날 때까지, 그리고 커피가 식을 때까지 호흡을 최대한 참고 가야한다. 나는 지금 아우디 R8 V10 퍼포먼스에 타고 있다.
익숙한 디자인이지만 어느새 클래식의 향기마저 느껴지는 R8이다. 새로운 전기차의 물결 속에서 모처럼 만나는 야성의 스포츠카가 반갑다. 어쩔 수 없다. 아직은, 이런 차를 만나야 심장이 뛴다. 근데, 저무는 한 시대의 끝을 붙잡고 있는 모델 아니냐고? 천만에. 아우디의 최고경영자는 이제 가솔린이든 디젤이든 차세대 엔진을 개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희귀종이 될 이 R8 V10을 사야 할 때다. 물론 그만한 여유가 있다면 말이다.
이전에 타본 R8 V10 플러스는 그 이전 모델보다 60마력 높아진 610마력 엔진을 얹어 플러스라는 이름값을 했다. 오늘 만나는 V10 퍼포먼스는 얼마나 올랐나? 아니. 그대로다. 회전계를 8100rpm까지 끌어올려 600마력 이상을 발휘하는 엔진에 더 이상의 고출력은 의미 없을지 모른다. 변화는 디테일에 있다.
마침 하늘 푸른 날, 하늘보다 짙은 아스카리 블루(Ascari blue) 메탈릭 보디 컬러가 강렬하다. 많은 분야에서 그렇지만 아우디는 라이트 기술에서 앞서간다. 레이저라이트가 상징이다. 다이내믹 턴 시그널이 적용된 레이저라이트 LED 헤드라이트는 밝게 비추고 넓게 비춘다. 낮에는, 치켜뜬 주간주행등이 만만치 않은 성격을 드러낸다.
차체 곳곳에 적용된 카본은 고급스러움과 스포티함의 상징. 측면의 카본 사이드 블레이드는 공기역학을 위한 사이드 에어벤트를 감싸는 역할이다. 그리고 카본이 적용된 부분은 전방 스포일러와 후방 디퓨저, 사이드 미러 커버, 엔진 컴포넌트 커버, 고정식 리어윙 등이다.
커피는 식었고 타이어는 충분히 달궈졌다. 심장의 온도 역시 뜨겁다. 마음 놓고 액셀러레이터를 밀어붙일 시간. 빠르다. 등 뒤에서 분출하는 파워는 지면으로부터 가까운 운전 자세, 낮은 무게 중심, 귓전을 때리는 사운드와 함께 폭발한다. (사운드를 배가시키는 버튼도 있다) 가속은 간결하고 장쾌하다. 참았다 내쉬는 큰 호흡은 바다를 삼킬 듯하다. 만약 신호대기에 걸렸다 출발할 때, 도심에서라면 주의해야 한다. 천둥 치는 소리에 주변 누군가 놀랄 수 있기 때문이다.
실내 디자인은 그대로. 역시 달라진 건 디테일에 있다. 카본 트월 인레이를 비롯해 다이아몬드 퀼팅 나파 가죽 시트와 알칸타라 헤드라이닝, 나파 가죽 대시보드, 암레스트 및 도어 패널 등에 R8 퍼포먼스 디자인 패키지가 적용되었다고 한다.
디지털 콕핏은 스티어링 휠 위의 버튼으로 타코미터 중심 또는 지도 중심을 선택한다. 대부분 선택은 타코미터에 머문다. 8500에서 1만rpm 구간에 붉은색이 칠해져 레드존을 나타낸다. R8 배지 배경에 걸친 붉은색이 오버랩 된다. 그 옆으로 출력과 토크 표시의 동그란 원 두 개가 나란히 자리한다. 붉은색 바늘이 원을 따라 오르내리며 자신을 얼만큼 사용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저 멀리 도달해야 할 rpm 구간이 멀기만 하듯이 출력과 토크가 가진 힘을 온전히 다 쓰기는 어렵다. 낮은 곳에 머물러도 속도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로 여건이 허락하는 곳이라면 상황을 반전시키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0→시속 100km 가속 3.1초의 성능은 장난이 아니다. 네 바퀴 콰트로의 접지력은 자칫 삐걱거릴 틈을 주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동역학의 수준은 전혀 다른 속도의 세계로 전환할 때 운전자가 그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데 있다.
몸을 잘 잡아주는 시트는 직선에서도 안정적이지만 코너링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시트의 좋은 가죽 질감과 더불어 스티어링 휠의 그립과 무게 역시 정교한 운전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 주행 속도에 따라 스티어링 기어비를 변환시킨다. 뭉툭한 기어 레버를 밀어 넣어 수동 변속을 할 수 있지만 다루기는 패들 시프트가 더 편하다. 사실 스티어링 휠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하라고 설계한 구조다.
지면에 가까운 하체인 만큼 노면 정보가 잘 읽힌다. 거친 노면에서는 그대로 전달되어 단점이 되기도 한다. 어느 정도 불편함은 감수해야지. 그러고 드라이브 모드를 컴포트로 바꾸자, 웬걸 이렇게 편안해지는구나, 피식 웃음이 났다. 댐퍼 설정을 바꾸는 아우디 마그네틱 라이드를 간과했다. 드라이브 모드 변경에 따른 성격 차이는 확연하게 다가온다. 가속 페달과 서스펜션 댐핑, 변속 타이밍, 스티어링 강도, 콰트로 시스템의 토크 배분, ESC, 가변 배기 등이 모두 조절된다는 설명을 수긍한다.
내가 좋아하는 가곡 ‘명태’라는 노래가 있다. 가사에 “살기 좋다는 원산구경이나 한 후 이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라는 구절이 있는데, 나는 R8의 공조 버튼 아래 달려 있는 모양이 파라오의 수염처럼 느껴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R8은 명태가 아니라 고래를 닮았다. 떼지어 다니지 않고 홀로 저 깊은 바다 속으로 유영하는. 그리고 먼 옛날 신화 속 이야기로 전해오듯이, 머나먼 미래에 또 신화로 남을지 모르는. 그래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고래등에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글 최주식 I 사진 송정남 포토그래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