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의 풍경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후 111년 만에 가장 기온이 높다는 날, 길을 떠난다. 동반 차는 마세라티 기블리. 이탈리아어 기블리(ghibli)는 사하라 사막의 뜨거운 바람을 의미하는 이름. 마세라티 GT 역사가 농축되어 있는 모델이다. 정말이지 바람마저 뜨거운 날, 고성에 가면 그 열기를 식힐 수 있을까. 군사분계선 이남에서는 가장 북쪽에서 만날 수 있는 바다가 있는 곳이다.
겨울바다는 남해나 서해, 동해 가릴 것 없이 나름의 정취를 안고 있지만 여름바다는 아무래도 동해가 제격인 것 같다. 여름 휴가지로 가장 많이 선호되는 곳이 바로 동해인 것도 이런 까닭에서 일 것이다. 이 날은 마침 본격적인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날, 라디오를 켜니 근래 개통한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새벽부터 밀리기 시작했다는 뉴스다.
언제부턴가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빠른 길로만 달렸다. 별다른 고민이나 생각 없이. 그러다 보니 길의 본질에 대해서 짐짓 무심해진 듯도 하다. 여행이란 어떤 목적지에 다녀갔다는 흔적만이 아니라 길에서 만나는 단상을 통해 더 소중한 것을 얻기도 하는 법이므로. 차에서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을 무시하고 국도로 차 머리를 돌렸다. 남한강과 홍천을 지나가는 44번 국도는 실로 오랜만에 타보는 것 같다. 그것도 강원도 가는 길에서는. 강을 끼고 달리는 국도의 운치도 새삼스레 다시 느껴본다.
인제를 지나 길은 진부령과 미시령 고갯길로 갈라지는데 미시령 옛길을 선택한다. 진부령이 넘기 쉽고 빠르기는 하지만 아스라한 풍경과 함께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는 재미는 미시령이 낫다. 그리고 미시령 고갯길을 내려가다 보면 병풍처럼 펼쳐지는 울산바위를 만난다. 이 풍광을 놓칠 수는 없다. 휴가철인데도 길은 한적하다.
먼 곳으로 가는 길에서 기블리는 GT카다운 역량을 또렷하게 드러냈다. 쾌적하고 빠르게 달리는 것은 물론 와인딩 로드를 빈틈없이 재단해 냈다. 그런데 바다의 신, 넵투누스의 삼지창을 나타내는 브랜드 상징과 ‘사막의 열풍’이라는 조합이 이질적이면서 재미있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모여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것이 신화와 전설의 포맷.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지브리도 이 기블리를 잘못 표기한 것이라 했다.
기블리라는 이름에는,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바람의 때처럼 켜켜이 쌓여 있다. 속초 방향으로 가다 동해대로를 타고 고성에 접어들면 처음 만나는 바다가 봉포 해변이다. 아담한 항구와 해수욕장이 한가롭고 정겨운 풍경으로 펼쳐진다. 바닷가에 왔으나 바람은 여전히 뜨겁다. 해수욕을 하러 나온 아이들의 등이 구릿빛으로 물들어간다.
조금만 올라가면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이다. 북쪽의 고성 삼일포와 통천 총석정을 제외하면 남쪽에서 갈 수 있는 관동팔경 중 가장 위쪽에 자리하는 누정이다. 오르는 숲길은 짧지만 호젓한 분위기가 좋다. 후대에 복원한 누각이 무슨 대단한 운치가 있을까마는 정자는 무릇 그곳에 서서 바라보는 경치가 먼저다. 마루에 올라서면 뒤로 설악이 빙 두르고 앞으로 아득한 바다가 360도 파노라마 뷰처럼 펼쳐진다. 호방한 분위기는 이런저런 장애물에 걸러진다.
아야진 해변길을 따라 북쪽으로 3km 정도 올라가는 길에 천학정이라는 또 다른 정자가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라서인지 안내 간판도 정확하지 않고 진입로 길도 부서져 있다. 야트막한 절벽 위에 서 있어 다가서면 파도소리가 크게 들린다. 누각의 지붕이 낮아 서면 보이지 않고 앉아야 오롯이 바다가 보인다. 정물화처럼 차분한 풍경, 하염없이 앉아있고 싶은 곳이다.
길은 해변에서 해변으로 이어진다. 문암 해변에서는 능파대를 꼭 보고 가야 한다. 1억 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바위들이 풍화작용을 받아 표면이 벌집 모양으로 변한 타포니 지형이다. 능파(凌波)는 ‘급류의 물결’ 또는 ‘파도 위를 걷는다’는 의미. 미인의 아름다운 걸음걸이를 뜻하기도 한다는데 성큼성큼 걷기 힘든 지형을 표현했다. 바위 주변에서 동호회인 듯 스노클링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건너편에는 백도해수욕장이 해안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다.
거진 해맞이 등대가 있는 해안도로는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이다. 기블리의 굴곡진 인스트루먼트 패널 상단은 파도의 형상처럼 리드미컬하다. 눈앞에 파도가 너울 치고 가운데 솟은 아날로그시계는 바다에서 방향을 잡아주는 나침반 같다. 그러나 바다를 향하는 시선은 철책에 제한을 받는다. 무심코 지나치지만 분단의 현실이 가까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거진항에서 하룻밤. 항구의 밤바다에 서니 붉은 달이 발밑까지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고성은 북으로는 금강산을 경계로 통천군과 이어진다. 3·8선이 그어지기 전 강원 고성보다 금강 고성이라 불릴 만큼 원래 금강산을 품고 있던 지역이었다. 금강산 일대에서 가장 큰 고을이 고성이었는데 그 흔적이 왕곡 전통마을로 보존되어 있다. 고성은 이처럼 금강산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금강산 육로관광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지금은 중단된 상태. 다시금 그 길이 열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금강산 자락의 건봉사를 찾아간다. 6.25 전쟁 때 폐허가 되기 전에는 642칸에 이르는 건물이 있을 만큼 강원도 최대의 사찰이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훈련시킨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절 입구에 다다르면 전쟁 때 불타지 않은 유일한 건물인 불이문(不二門)을 만난다. 보통 절의 일주문은 기둥이 2개인데 이곳은 4개라는 점이 다르다. 사찰 수호의 천왕문을 따로 세우지 않고 그 기능을 보탠 까닭이란다.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 능파교를 지나면 바라밀 문양이 새겨진 돌기둥이 신비로운 기운을 내뿜고, 산등성이에 아주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고고히 내려다보고 서 있다.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가는 길에 수국이 예쁘게 피었다. 건봉사를 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화진포로 가려는데 군 검문소를 만났다. 민간인 통제구역이어서 신분증을 확인하고 나가는 길에 다시 한번 검문을 받아야 한다. 잠시 동안이지만 기블리는 민통선 안의 도로를 달렸다. 왠지 조심스럽게.
모래톱이 길게 바다를 가로막아 생긴 호수를 석호라 하는데 동해안에 이러한 석호가 많다. 강릉 경포호, 속초 청초호와 영랑호 등이 있고 지금 찾아가는 화진포가 그러하다. 화진포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해당화가 만발하였다 해서 지어진 이름. 그런 만큼 풍광이 좋다.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지였다는 안내판이 시간이 멈춘 듯 색 바랜 극장 간판 같다. 이승만 별장을 지나 김일성 별장(화진포의 성)에 가 본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벽면에 붙여놓은 흑백사진이 눈에 띄는데,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어렸을 때 그의 누이와 소련군 소장 아들과 함께 바로 이 계단에서 찍은 사진이다. 때로는 사진 한 장이 역사에 상상력을 입힌다.
호수와 바다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다. 화진포 해수욕장에는 파라솔이 길게 줄지어 서 있고 앞바다에는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에 조그만 섬이 하나 있다. 거북섬이라 불리는 금구도인데 광개토대왕릉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그러고 보니 고성은 옛 고구려 땅. 이야기는 이렇다. 광개토대왕이 서거한 이듬해인 장수왕 2년(서기 414년) 신라와의 잦은 분쟁을 이유로 이곳에 시신을 안장했다는 것. 전설 속 이야기인 줄 알았으나 고성군에서는 사실처럼 적고 있다. 전문가 고증을 통해 사실이 확인되면 원형 복원할 계획이라는 말과 함께.
다시 북쪽으로 행로를 잡아 통일전망대로 간다. 폭염주의보에도 아랑곳없이 사람들이 많다. 최근의 남북화해 분위기로 기대감이 높아진 탓이리라. 입구에서 간단한 신상명세를 적고 입장료를 낸 다음 다시 차를 몰고 들어간다. 군사분계선 가까이에 자리한 통일전망대는 망원경을 통해 북한 지역 일부를 볼 수 있다. 옥외 전망대에서도 해안선을 따라 금강산 자락이 손에 잡힌다. 햇살이 뜨겁지만 사람들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
상점에는 그동안 판매 금지되었던 북한술 등을 팔고 있어 달라진 분위기를 보여준다. 아래쪽 조그맣게 조성된 공원에는 부처상과 마리아상이 나란히 북쪽을 향해 서 있다. 모두의 염원을 담아. DMZ박물관은 예전에 왔을 때 보지 못했던 곳인데 2009년에 개관했다. 비무장지대가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보여주는 공간이다. 1953년의 정전협정서를 비롯해 군사분계선 표지판, 남북의 삐라 등 냉전의 유산과 비무장지대에 사는 동식물을 소개해 다시 꿈꾸는 땅으로서의 DMZ를 보여주고 있다.
가까운 곳에 명파 해변 종점. 우리나라에서 갈 수 있는 최북단 해변이다. 철책에 갇힌 바다는 여름철 일시적으로 해수욕장 문이 열린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푸른 바다는 그저 푸르기만 할 뿐. 언젠가는 해변의 철책이 모두 걷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부산에서 함북 온성군에 이르는 길이 513km의 7번 국도를 온전히 달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읽었을까. 부드러움을 유지하던 기블리가 특유의 사운드를 울린다. 계기의 푸른빛이 더욱 짙어지고 스티어링 휠을 잡은 두 손은 자연스레 양쪽 시프트 패들을 안는다. 손끝에 전해지는 금속성의 차가운 질감이 열정에 부푼 마음을 차분히 다독여준다. 항해사가 조종하는 키처럼, 시프트 패들을 다루며 속도를 조율한다. 이윽고 미시령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진 송정남 포토그래퍼
2018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