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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준원 Oct 08. 2019

비교할 수 없는 쾌락

논어 수장의 번역 2

2.    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복습하면 기쁘지 아니한가?”

이 문장에 대한 전통적 독법이다. 여기서 ‘전통적’이라고 일컫는 말은 교조적으로 [사서오경]을 읽는 전통을 가리키는 말이며, 13세기 중국의 주희 朱熹 (1130 ~ 1200) 가 남긴 주석을 충실하다 못해 맹목적으로 따르는 전통을 가리킨다. 경전을 이해하는 자리는 언제나 새로운 길을 열게 되어있고, 이로 인해 의미는 무한히 열려갈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런 자유는 동아시아에서 주희 이후로는 허용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 라고 외친 조선의 성리학자도 있었을 정도이다. 중국에서는 주자의 성리학 이후에 양명학도 출현하였고, 만주족이 대륙을 지배한 청에서는 고증학이 주류를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청에서도 국가고시에서는 주희의 주석을 기준으로 이것을 이해한 정도를 가지고 응시자의 실력을 평가하였으니 관학은 여전히 주자학이었던 셈이다.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겼던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도 역시 아주 오랫동안 이 교조에 묶여 있었다. 동아시아는 지금도 이 교조로부터 거의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우리시대의 학자들에게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문장의 핵심요소를 주희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참여한 한국사회에 있어서 공자를 논의하는 질서이다.


이 글은 이러한 족쇄에 얽매이지 않을 예정이다. 다만 주희의 해석을 설명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 그래야만 이 글만 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이 문장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미궁에 빠지는 것을 일단은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래야만 이 글에서 주장하는 독보적 해석이 가지는 의미를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음이 두번째 이유이다. 위에서 전통적인 독법이라고 한 것은 주희의 해석에 따라 한국말로 옯긴 것이다. 사실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학 學’, ‘시 時’, ‘습 習’, 그리고 ‘열 說’이렇게 네 글자가 가리키는 개념에 대한 이해는 매우 민감하면서도 결정적이라고 해야 할 것인데, 주희는 이것들 중의 어떤 것도 개념어로 이해하지 않았다.  


이 문장에 대한 주희의 해석은 참으로 맥빠지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 [논어]의 수장 首章을 그저 어린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권학문 勸學文 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주희는 ‘습 習’을 ‘어린 새가 날기 위해 반복적으로 날개짓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글자에 들어 있는 깃 우 羽는 확실히 새의 날개를 본딴 상형문자인 것 같기는 하다. 주희는 그래서 이 문장이 어미새에게 배운 것을 반복하여 연습하는 어린 새의 모습을 가리킨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학 學이란 ‘배움 learning’을 가리키는 말이며, 배운 것은 반복적으로 복습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하면서, 이 과정이 즐겁다고 공자가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주자의 주장도 그럴듯한 추측이라고 보이기도 하는 것이 이 단락은 기쁨 說, 즐거움 樂, 군자 君子 이렇게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이 시간 순서일 수 있는 것이다. 군자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노년에나 가능한 것이라고 보고, 벗과 즐거움을 연결시키는 삶의 단계는 중년쯤 된다고 가정하면, 학과 그로인해 얻는 즐거움은 초년의 특성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공자가 40에 불혹하고 50에 지천명 했다는 문장은 15세부터 70세까지 이어지는 크로놀로지컬한 인격의 발달을 말하고 있으니, 마찬가지의 케이스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문장이 어린 학생들에게 어린 새의 반복하는 노력을 배우라는 권학문이라고 해도, 세 문장이 댓구를 이루고 있는 이 단락의 전체적인 존재감은 [논어]의 수장으로 삼기에 결국 그다지 부족함이 없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이 이 단락의 세 문장을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S+P의 문장으로 두고 분석해보면, 공부+즐거움, 친구+즐거움, 성내지 않음+군자 이렇게 이루어진 댓구이다. 여기서 술어 세 개를 나란히 놓으면 그 중에 두개가 행복한 감정을 가리키는 말이고 나머지 하나가 ‘군자’라는 개념어이다. 따라서 이 세 문장이 완전한 댓구를 이루기 위해서는 즐거움을 나타내는 형용사 두 개가 명확한 실체를 갖는 명사로서의 개념어가 되거나 ‘군자다움’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가 되어야 한다- 최소한 그러한 의도로 기술된 문장으로 보아야 한다. 이 말은 군자라는 개념이 열과 락 처럼 행복이란 카테고리 안에 들어오는 어떤 인격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 진다면 [논어]의 수장은 공자의 ‘행복론’을 요약하는 말로 이해되게 된다. 공자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행복의 조건은 바로 이런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고, 그래서 논어의 첫번째 단락으로 이 요약문이 선택되었다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그러니, 어쩌면 이 말들을 공자가 한 번에 정리하여 쏟아낸 것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요약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공자는 이런 취지의 말을 많이 반복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제시한 세 가지의 행복은 인생에서 시간적 순서로 단계마다 다르게 작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생의 어느 단계에라도 언제나 늘 그런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노인이 되었어도 배우는 것은 멈추어서는 안될 것이며, 벗과 교우하는 것도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 활동을 통해 얻어지는 기쁨에 무감각할 이유도 없다.     


이제 ‘자왈’을 벗어나자 마자 독자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개념은 친숙한 것 같으면서도이해하기 어려운 ‘학 學’과 ‘열 說’이다. ‘학’의 일반적인 의미는 ‘공부하다’ 혹은 ‘배우다’ 이다. 전통적으로는 ‘배우다’라고 번역하였다, 하지만 ‘공부하다 study’와 ‘배우다 learning’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체로 공부하는 것은 배우는 것을 가리키므로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학의 내용은 기존에 만들어진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공부라는 것이 기존의 지식을 습득하는 활동을 가리킨다는 관념이 강한 것이 사실인데, 영어로 스터디는 학자의 창의적인 새로운 지식의 생산도 함께 가리킨다.  [논어]에서 학이 명확하게 배우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주장을 발견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실제로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실로 무의미하다. 공자는 술이부작 述而不作 이라는 말을 했는데, 자신은 창의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한 적이 없다는 말이며, 자신이 설교하는 지식은 기존에 존재하는 선험적인 것들이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공자에게 있어서 공부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다만, 두 가지 정도의 용례는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공자가 ‘학문 學文’이라는 말을 사용한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명확하게 ‘글공부를 하다’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배운다’라는 의미가 잘 구현된 문맥을 드러내는 경우이다. 또다른 하나는 반대로 공부가 그 개념이 담고 있는 상식적인 활동이 아닌 것을 가리키는 경우이다. 무언가를 알려고 일부러 노력하는 행위가 아닌 것을 공부라고 지칭하고 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었다. “학생은 안으로 들어가서는 효도를 하고, 밖으로 나와서는 동생노릇을 하며, 주의깊게 행동하고, 신의를 지킬 것이며, 널리 많은 사람을 아끼고, 인 仁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러고도 남은 힘이 있다면, 그것으로 글을 공부한다.” 子曰:「弟子入則孝,出則弟,謹而信,汎愛眾,而親仁。行有餘力,則以學文。」 (1-6)


이 문장에서 공자의 발화가 가리키는 것은 공부의 중요성이 아니라 오히려 상식적인 의미의 공부, 즉 ‘배우는 행위’를 인간적 도리를 실천하는 것에 비해 뒷전으로 밀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적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오히려 공부를 금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주희의 선생격인 정자는 도리를 실천하기 전에 하는 글공부는, 공부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공자의 중요한 가르침을 위배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을 爲己之學이라 한다. 정자의 말도 주희와 마찬가지로 ‘학’을 글공부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라도 글공부는 인간의 도리를 실천하는 것에 우선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드러내는 글이다. 이 문장에서 [논어]의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학문 學文이란 구문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공부, 즉 지식의 습득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는 다른 곳에서 모두 ‘학’이었는데, 여기서는 학 學을 동사로 그리고 그 목적어로 글 文을 배치하여 ‘글공부 하다’라는 구문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장의 앞쪽에 기술된 도리의 실천은 그 자체로 학 이거나 학의 실천인 셈이고, ‘남는 힘이 있다면’ 글공부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자하가 말하였다: “현인을 대하기를 여색을 옮긴 듯하고, 부모를 봉양하는데 그 힘을 끝까지 다하고, 임금을 섬기기를 그 몸을 다 사용하며, 친구와 교제하는데 말에 신의가 있다면, 그 사람이 혹여 공부한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것들이야말로 ‘공부’라고 하겠다” 子夏曰:「賢賢易色,事父母能竭其力,事君能致其身,與朋友交言而有信。雖曰未學,吾必謂之學矣。」 (1-7)


자하는 좀더 적극적으로 사람이 도리를 갖추었다면 공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앞의 문장에서 도리의 행위를 하다가 남는 힘이, 아마도 남는 시간, 있으면 공부를 하라는 말과 함께 생각해보면, 도리를 행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면 공부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 된다. 물론 주자의 설명에서 강조된 공부하는 그 자체가 제공하는 즐거움의 의미는 경험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안타깝게도 위의 두 문장을 보아도 주자의 해석은 [논어]텍스트에서 검증되기 어려운 자신만의 생각인 듯하다. [논어]의 컨텍스트에서는 공부의 의미가 도리의 실천과 분리된 상태의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설명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이 논리를 뒤집어 진술하면, 공부는 도리를 행하기 위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된다. 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적절히 실천할 것이니까 말이다. 사실 공자의 무리들에게 ‘학’이란 도덕, 합리, 인간성 등을 이해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수학이나 과학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철학이나 종교, 문학과 예술과 같은 인문학을 학으로 정의하는 셈이다. 그들에게 학은 도리를 갖추기 위한 과정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고 도리를 갖추었다면 굳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다만 남는 힘, 또는 시간이 있다면 글공부를 하는 것이 도리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란 의미만이 성립한다. 공자의 무리들에게 ‘학’이란 단순히 모든 종류의 지식의 습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공자가 마음 속에 그린 어떤 이상적인 인격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만 그 가치를 드러내는 셈이다. 따라서 글을 통해 공부하든지, 남의 말을 들어 공부가 되든지, 실천을 통한 경험에서 모종의 자기만의 결론을 얻든지 공자의 이상에 부합하는 인격을 갖춘다면 글을 읽을 줄 모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공부라는 고유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글을 많이 읽고 남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지식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런 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공부’의 의미겠지만, 만약 인격적 차원에서 발전적 의미가 없다면, 또는 글공부를 통해 얻어진 지식 때문에 타고난 인격이 가진 긍정적 요소까지 오히려 상실된다면, 이런 경우 매우 흔하다, 이것은 공부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공자의 무리에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용어인 소위 ‘배운 사람’ learned person 이란 어려운 글공부를 통해 남보다 많은 지식을 축적한 사람이란 의미가 아니라 그 축적을 통해 자신을 바람직한 인격으로 개조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파악된 학의 의미를 다시 “學而時習之,不亦說乎”에 대입해 보면 좀더 명확한 문장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위의 문장들에서 내보이는 바와 같이, ‘학’은 인격적 완성을 위한 수련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수행하는 적절한 방식의 실천으로 그 가치를 완성하게 된다. 만약 도리를 말로 설명할 수만 있고 일상의 행동방식이 그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도리의 실천을 목적으로 습득한 지식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공자는 말과 행동이 다른 경우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한 경우가 있는데, 글에 등장하는 재여라는 인물은 공자의 중요 제자 중 한 사람이다. 마땅히 많은 공부를 하였고, 공자의 뜻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하지만 공자에게 발견된 그의 행동은 도리와 반대되는 것들이었던 모양이다. 이것은 실천하지 않는 지식에 대한 공자의 극단적인 혐오의 피력이다.


재여가 낮에 잠을 잤는데, 선생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썩은 나무는 조각을 할 수 없고 똥이 섞인 흙으로 지은 담장에는 흙손이 먹지 않는 법이다. 내가 재여한테 무슨 꾸지람을 하겠는가?” 선생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처음엔 내가 사람들을 볼 때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가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을 볼 때 사람의 말을 듣으면, 그 행동을 관찰하게 되었다. 재여를 보고 이렇게 바뀌었다.”  宰予晝寢。子曰:「朽木不可雕也,糞土之牆不可杇也,於予與何誅。」子曰:「始吾於人也,聽其言而信其行;今吾於人也,聽其言而觀其行。於予與改是。」 (5:10)


공자에게 있어서 실천하지 않는 말뿐인 지식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식을 추구하는 그 차체에 의미를 두는 철학의 전통과는 상당히 구별되는 자세이다. 필로소피 philosophy라는 말의 어근을 분석하면 ‘지혜를 사랑하다’의 의미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볼 일이다. 실용성을 반드시 요구하지 않는 지식 그 자체를 추구하는 욕구, 혹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공자의 사상 속에서 찾기 어렵다. 고대 희랍철학이나 인도의 우파니샤드 등의 전통과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일 뿐만 아니라 [노자도덕경]이나 [장자]에 등장하는 그런 논의들과도 구별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 구별이 공자의 사상이 가진 어떤 부재에 의해 판단되는 것은 어쩌면 안타까운 일일 수도 있다. 공자는 그런 지식들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꺼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평가해 보면 사변 speculation이 부재한 것이 공자사상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공자가 그런 대화를 꺼렸다는 것은 그는 그런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그런 지식을 포함시키는 것에 비해  고유의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더 유익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오늘날 무지한 것이 병이 아니라 너무 많은 지식을 동시에 고려해서 경제적 이득을 만들어야 하는 의무를 전세계 인류가 공통으로 지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특히 그 과정 속에서 상식적으로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인간적 가치가 상실되는 것을 보면, 공자의 ‘사변금지’는 어쩌면 통찰력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도리는 가르치되 사변은 가르치지 말라! 경제적으로 풍요해서 불행하다면 경제적으로 풍요할 필요가 없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나? 공자사상이 가진 사변의 부재는 어쩌면 인간의 사고가 고도로 발전하는 것을 스스로 차단하는 절박한 행위였을까? (이 부분은 각자의 생각에 일단 맡기도록 하겠음. 플라톤에게서도 그런 말들이 있는데, 알면 병이 되니 모르는 편이 낫다는 논리에 나는 여전히 동감이 안된다). 어쨌든 상기된 사항들을 고려할 때, 공자에게 있어서 ‘학’을 해서 지식을 습득했다면 그것은 반드시 ‘실천’ put it into practice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실천이란 당연히 도리의 실천을 가리키며, 학이란 실천을 목적으로 한 도리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리가 실천되었다면 인격이 제고 또는 완성되었음을 자동으로 가리키게 되어 있으므로 학은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學而時習之 에서 학은 도리에 대한 이해가 되고, 습은 그것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해된 도리는 실천과 짝을 이룰 때만 비로소 ‘학’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며, 그렇지 않다면 학은 그저 머릿속의 활동으로 머무르고, 인간성의 제고와 관련없는 활동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열 說’은 ‘기쁘다’ 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말씀이나 설명이란 의미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공자가 사변적 지식이 무의미하다고 여긴 것을 고려해 보면 그에게 있어서 실천없이 말로만 설명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일이니 그런 주장은 곧장 퇴장시킬 수 있다. 게다가 두 번째 문장의 즐거움(락 樂)과 댓구를 이루기도 어렵다. ‘열’과 ‘락’은 모두 즐거운 긍정적 감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떤 것이 더욱 강력하고 결정적인 즐거움인지는 고민해 보아야 하지만 ‘열’이 먼저 등장하는 것을 고려해 보면 ‘락’보다는 ‘열’이 좀 더 우월한 개념이며 더욱 결정적인 행복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강렬한 쾌락 또는 행복감은 學과 그것을 時에 習하는 데에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시 時에 대한 고증학적 연구는 이 단어가 ‘때 맞추어’라는 의미임을 밝혀내었다. 주자가 ‘때때로 시간 될 때마다” 혹은 ‘언제라도 반복적으로’라는 의미로 이해하려 한 것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 영어로 번역하자면 timely라는 형용사 또는 부사이다. 영어에서 적시에 때맞추어 오는 비를 가리킬 때 timely rai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시우 時雨라는 중국어 표현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時는 좋은 타이밍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자의 말을 따르려 해도 학을 해서 적시에 복습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복습을 하는데 따로 적당한 때가 있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아도 習은 그래서 ‘실천하다’, ‘실행에 옮기다’로 이해하는 것은 심지어 불가피하다.


도리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적절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실행에 옮기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쾌락이 된다는 말이다. 전투기 조종사가 공중돌기를 배워서 미사일을 피하는 법을 습득하는 것을 상상해 보면 쉽다. 대부분의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이런 기술은 반복적 훈련하여 잘 습득하였어도 실제로는 평생 한 번도 써먹어 본 적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 기술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의 상황에서 자신이 그런 기술을 사용하면 좋을 상황을 맞이했을 그 때, 마침 적절히 그 기술을 실천하여 위험을 빠져나왔다면 그 쾌락은 어느 만큼의 기쁨이겠는가? 이것은 단순히 죽을 뻔 하다가 살아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감정과는 구별되는 성격의 양질의 기쁨이다. 자신이 습득한 지식이 화석처럼 뇌에 저장되어 있는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에서 생산적인 어떤 활동으로 바뀌었을 때에만 느껴지는, 또한 자신이 관념적인 지식을 살아 숨쉬는 것으로 수행해 내었다는 성취감, 생명을 얻은 지식이 자아내는 박동을 자신의 심장으로 느끼는 성취감이 가득한 쾌감이다. 학이시습지로 느껴지는 절정의 맛이다. 그 절정의 맛이란 이 세상 그 어떤 쾌락과 견주어도 짝이 없는 그런 것이다.


이런 희열은 종교적 윤리의 실천에서도 왕왕 경험된다. 우리가 도덕적 행위를 자신있게 권유할 수 이유도 마찬가지의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도덕적 행위는 쾌락이 목적이 아니지만 결국 도덕의 수행자에게 양질의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곤경에 빠진 타인을 구제했을 때의 뿌듯한 성취감은, 특히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었다면, 아무런 이득이 획득되지 않아도 느껴지고야 마는, 그야말로 가슴을 가득 채우는 강렬한 쾌감이다. 이것은 오로지 지식을 습득해서 적절하게 현실로 구현했을 때만 느껴질 수 있는 쾌락이다. 맹자가 측은지심 惻隱之心이 발휘되는 순간에 대한 예로 우물로 기어가는 어린아이를 구하는 경우를 설명하는데, 그 대목에서 맹자는 그 사람이 아이를 구한 이유가 그 부모와 교제하기 위한 목적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며, 아이를 본체만체 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도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그 어떤 보상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이타적 행위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와 유사한 설명을 하면서 이것을 ‘선의지’라고 개념화하였다. 아울러 오로지 이런 경우만이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라고도 말하였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업장을 소멸하고 왕생극락을 위해 공덕을 쌓느라고 보시를 한다고 하지만, 대부분 동의하지 않겠지만, 사실 보시 또한 마찬가지 방법이어야 의미를 가진다. 자신이 보상을 받을 목적으로 행하는 보시는 공덕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의식에서 기도의 마지막에는 항상 회향이란 결심을 선언한다. 자신이 기도를 통해 얻은 불보살의 도움조차 자신에게 오도록 하않고 다른 부족한 사람에게 돌려주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자신의 공적이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만드는 최소한의 장치이다. 이렇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다른 어떤 의도도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순수하게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제공하여 그 사람을 곤경에서 구해냈을 때 얻어지는 영혼의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진정한 업장소멸의 공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얻으려 하면 얻어지지 않고 의식하지 않아야만 얻어지는 쾌락이기 때문에 이런 조건을 갖추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니 실로 얻기 어려운 쾌락인 것은 분명하다.


공자는 칸트의 선의지나 불교의 보시에서 보는 바와 유사한 행위로 學을 時習하는 것, 즉 도리를 배워서 적절한 상황에서 실천하는 것을 최고의 쾌락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를 봉양하는데 그 힘을 끝까지 다하고, 임금을 섬기기를 그 몸을 다 사용하며, 친구와 교제하는데 말에 신의를 다하는 학을 시습하는 생활방식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에게 얻어지는 어떤 이득이 없다 하더라도, 심지어 이런 행위를 통해 온갖 손해와 박해 혹은 오해와 추방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가 누리는 삶을 채우는 것은 고통이 아닌 쾌락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쩌면 이것들은 그다지 좋은 예가 아니다. 예로서 적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어려움 속에서 쾌락을 이어간 사람이 [논어]에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학을 시습하고 자신의 삶을 행복으로 가득 채운 인물, 바로 공자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공자의 도를 잘 이해하고 실천한 자로 기억되고 있는 안회 顔回이다.


안회는 바보처럼 모든 것을 견디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불이익으로 여기는 것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지만 그는 쾌락을 얻은 것으로는 단연코 으뜸인 것이다. 공자의 기억 속에서 안회는 자신의 가르침을 듣고 언제나 기쁨에 젖는(說)사람이었으며, 한마디도 딴지를 거는 법도 없었지만, 한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법도 없었어서, 자신의 말을 알아듣고 저러는지 알아듣지 못해서 저러는지 걱정스러워 보이는 사람이기도 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었다: “회는 절대 나에게 도움되는 사람이 아니다. 내 말을 듣고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 법이 없다.”  子曰:「回也非助我者也,於吾言無所不說。」(11:4)
선생께서 말씀하시었다: “내가 회와 함께 말을 나누기를 종일토록 하였으나 한마디도 거역하지 않는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인 듯했다. 나중에 그가 혼자 있을 때 하는 행동을 살펴보니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역시나 회는 어리석지 않았다.”  子曰:「吾與回言終日,不違如愚。退而省其私,亦足以發。回也,不愚。」 (2:9)


그래서,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사람이 결국 도착하게 되는 자연스런 귀결에 안회도 도착하였다. 관직도 없고, 재산도 없는 영락없는 거지의 신세가 되었다. [숫타니파타]를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싯다를타의 처지와 비슷한 이미지이다.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그렇지만, 아니 그래서 그 쾌락이 멈추지 않는 무소유의 수행자의 진면목을 안연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선생께서 말씀하시었다: “회는 참으로 현명하도다! 밥 한덩어리하고 물 한 병만 가지고 지저분한 골목에서 기거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할 것인데, 회만은 그 즐거움을 놓지 않으니, 회는 참으로 현명하도다!”  子曰:「賢哉回也!一簞食,一瓢飲,在陋巷。人不堪其憂,回也不改其樂。賢哉回也!」 (6:11)


여기서 안회가 잃어버리지 않는 쾌락은 독특한 종류의 쾌락으로서 앞서 논의한 보시나 선의지에서 얻어지는 기쁨과 유사한 성격의 쾌락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주이상스 jouissance 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다른 언어에서는 찾기 어려운, 오로지 불어에만 존재한다는, 독특한 쾌락을 정의하는 개념이다. 주이상스는 통상적인 쾌락의 원칙을 벗어난 어떤 특별한 쾌락을 가리키는 말로서 통상 고통 속에서의 쾌락을 가리키며, 금지된 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긴장감 속의 강렬한 쾌락을 일컫는데 주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이 쾌락은 ‘쾌락을 넘어선 쾌락’ 또는 ‘고통이 수반된 상황 속에서만 성립하는 쾌락’을 가리킨다. 주이상스에 대한 논의를 하고자 이 개념을 들먹이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어찌 안회라고 해서 가난과 비루함을 쾌락을 목적으로 선택하겠는가? 그러니 두번째로 정신분석학적인 의미에서의 주이상스와 안회의 선택을 일치시키는 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따른다. 특히나 대부분의 경우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주이상스는 대체로 도덕의 실천이 아니라 도덕의 위배에서 얻어지는 것이라 안회의 그것과는 정면으로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다. (물론 반드시 그렇지는 않고 대체로 그렇다는 의미이며 도덕적인 것도 포함할 수는 있다.) 심지어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문제이다. 세번째로, 나는 정신분석학적으로 파악했을 때, 주이상스라는 개념을 안회의 쾌락에 적용하였을 때, 안연을 주이상스에 중독되어 쾌락을 추구하는 심리학적 인간으로 타락시켜 규정할 것에 대한 두려움, 즉 종교적 가치의  몰락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주이상스라는 심리적 현상은 의도적으로 추구했을 때는 얻어지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금지된 것을 욕망하더라도 그 짜릿한 쾌감을 의도하고 금지를 깨뜨리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문제는 이것이 무의식적으로 선택된다는 데에 있는데, 앞에서 보시와 선의지에 대한 설명을 재고해보면, 무의식은 어차피 순수하게 자신에게 돌아올 어떤 보상을 기대하거나 하는 기능을 가질 수 없으므로, 또는 그 의도를 무의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어떤 자주적 의도도 세울 수 없다는 말이다. 누군가 의도한다면 의도할 수 있는 것은 도덕적이거나 합리적인 행동결정 뿐이다. 따라서, 모든 도덕적 행위는 필수적으로 고통을 수반하지만, 이를 통해 귀결되는 쾌락의 감정은 오히려 고통을 선택했기 때문에 얻어지는 예기치 못한 선물 같은 것이다. 쾌락이 목적이 아니라 선행이 목적이었지만 그 결과로 얻어지는 어떤 것, 나로서는 결론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질다른 어떤 것, 하지만 쾌락임이 분명한 어떤 것이다.


공자가 표현한 열 說은 단순한 기쁨 혹은 쾌락이 아니라 학과 습이란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만 감지할 수 있는 질적으로 구별되는 독특한 느낌의 쾌락, 즉 상식적으로는 쾌락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감정들의 복합으로 성립하는 여타의 쾌락과는 질적으로 다른 하지만 고차원적인 주이상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장에서 보면, ‘학’이라는 통상적인 감각에서는 고통스런 과정, 그리고 실천이라는 어려움, 두려움, 어색함 그리고 올바른 타이밍에 대한 현명함의 부족 등으로, 이 또한 고통이어서, 學而時習之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립시키기 어려운 일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정의하는 주이상스와 얼핏 유사한,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매우 얻기 어려운 수준의 양질의 주이상스일 것이다. 그렇다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이교도에게 목을 베이는 순교자가 느끼는 감정은 억울함이 아니라 오히려 양질의 쾌락이라는 말이 된다. 순교자의 죽음은 그가 공부를 통해 형성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실천하다가 얻은 것이니까 말이다. 이를 통해 얻은 열 說, 즉 쾌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고차원적인 주이상스인 것이다. 이토오 히루부미를 저격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감옥에 갖혀 사형을 기다리는 안중근의 심리를 상상해보라. 감옥에서 자신이 심각하게 공부한 [논어]의 가르침을 되뇌이는 행위를 서예작품으로 남기며 (학), 그리고 도의를 실행에 옮긴 성취감 속에서 (습), 학과 습이 일치된 최고조의 양질의 주이상스 속에서 떳떳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겠나?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쾌락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논어]에서 발견되는 안회에 대한 기록에서 이미 뚜렷하게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공자에게 제자 중에서 누가 가장 공부 즉 學을 좋아하는지, 즐기는 지 물어보았을 때 공자는 단연코 안회를 들어 말하였다. 누구보다 더 행복한 쾌락의 삶을 살았던 안회는 결국 그 누구보다 '공부'에 뛰어난 자였다는 말이다. 공자의 수제자는 의심할 바 없이 공자 사상의 가장 중요한 파트인 "학이시습지"를 그 누구보다 잘 실천한 사람이었다는 결론이다.  

 

계강자가 물었다: "제자들 중에서 누가 공부를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안회라는 자가 있어서 호학하였는데, 불행이도 명이 짧아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없습니다."季康子問:「弟子孰為好學?」孔子對曰:「有顏回者好學,不幸短命死矣!今也則亡。」(11:7)


공자는 흥미롭게도 안회가 죽고 없으니 이제 공부를 좋아하는 (好學)하는 제자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자신이 깨달아 알고 있는 주이상스를 누리는 자가 없다는 말도 된다. 공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자신만큼 호학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도 했다. 아주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공자에게 있어서 학을 이해하는 사람이, 즉 학과 습을 일치시켰을 때만 얻어지는 행복을 이해하는 사람이 자신 말고는 안회가 유일했다는 고백도 된다. 누구도 안회처럼 세간의 그 어떤 가치도 좇지 않고 도리를 실천하는 원칙을 철저히 지킨 자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 주변에 흔하게 목격하는 출세하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 물건을 팔기 위해 아부하는 상인, 환자를 등쳐먹으려는 의사, 남들의 눈이 두려워서 효도하는 척하는 자식들은 이런 주이상스를 경험하지 못한다. 절을 차려놓고 값비싼 의식을 권유하는 승려나, 헌금을 장려하고 그 돈을 사유화하는 성직자들도 어차피 이런 주이상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공맹을 공부하고도 남 앞에서 지식을 자랑하는데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사람들, 자기보다 나은 해석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든 추방하는 사람들, 교수가 되고 싶어서 온갖 낯 뜨거운 작업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늘어 놓음으로써 대중의 인기를 받고 싶어서 안달이 난 유학자들도 이런 주이상스를 경험한 적이 없을 것이다. 


안회가 누렸던 그 쾌락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논어]에 기록된 공자의 다른 어떤 가르침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실천적 측면에서 보면 공자의 가르침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다. 공자의 제자를 자처하는 유학자라면 마땅히 안회의 주이상스를 최소한 이해는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주장이 아니라 위의 인용문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공자도 함께 증언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상을 고려하여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는 이렇게 번역하면 좋을 것이다.


공부하여 그것을 적절한 상황에서 실천한다면
마땅히 비교할 수 없는 쾌락이 느껴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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