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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준원 Oct 22. 2019

잡설

브런치를 둘러보다가 인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글을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는데, 거기서 성균관대학교의 문과비하 현수막 사건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덕분에 이 글을 읽고 상경계열이 아닌 문과를 '비상경'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는 사실도 새로 알게되었다. 저자가 소개하는 비상경 계열을 전공으로 선택하려는 사람을 '비상식'으로 평가절하하는 인터넷상의 대화는 알고 있었던 듯이 놀라웠다. 이 우스꽝스런 표현의 의미는 조금 놀란 기분이 들었으나, 사실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곧장 깨달았다는 말이다. 


비상경을 선택하려는 어떤 학생의 고민에 대해,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을 그 이유만으로 아예 매우 별종의 외계인 취급을 하는 공유된 상식은 점잖은 시대정신으로 평가하자면 인종차별적이며 폭력적이다. 지금 대학에서 문학이나 역사, 철학 등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외계적 가치관을 가진 이민족들이거나 아니면 그냥 어쩔 수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그런 전공에 배정된 루저들이라는 의미가 성립된다. 그런 토속적인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가치관은 자신들의 인문학도를 합법적으로 왕따시키면서 그 부당함을 감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일상에서 감지할 수 있는 우리사회의 상징질서이며 구성된 의미체계이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모두 그런 폭력적인 구조를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가 소개한 인문학의 위기, 인간성 상실에 대한 우려에 대한 외침에 크게 공감이 가지만, 그것에 공감하는 나의 감정이나 저자의 주장은 오래된 그리고 익숙한 클리셰로 느껴졌다. 언제나 있어왔던 외침 그리고 언제나 느끼는 감동 하지만 그것의 무한반복이 주는 지루한 느낌은 나 또한 무의식적으로 시대적 상식의 참여자가 아닌가 하는 절망감도 경험해야 했다.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나같은 인문학자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인문학의 중요성을 애써 외면하고 그런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차 합의된 의견이다. 인문학 학습에 대한 꺼림과 인문학적으로 긍정적인 라이프스타일의 부재가 그들이 그런 가치 마저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니라는 말이다. 심지어 '비상경'의 전공을 선택하는 사람을 외계인 취급했던 학생조차도 이에 대해서 공감할 것이다. 말 그대로 공감만 한다. 문제는 공감이 동의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동의는 실천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점잖은 외침과 토속적 외면이라는 모순적 의미의 차연이 형성시킨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이런 외침과 외면이 진부한 형태로 되풀이되는 이유는 그 자명한 말이 이 세상에 넘치도록 많아서, 그에 대한 대중적 내성도 마찬가지 레벨로 강해졌기 때문은 아닐까? 텔레비젼에 그리고 인터넷에 넘쳐나는 인문학 콘텐츠는 인문학을 잘 느끼도록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말들에 무감각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대중들은 '인문학적 가치'에 대한 절박한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동의하지만, 그들은, 특히나 지식인들은, 이런 자극에 너무 노출된 나머지 웬만해서는 감동하지 않는 피조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안보불감증 같은 것이랄까? 우리는 인간성 상실의 아슬아슬한 땅을 딛고 서서는 '히어앤나우'를 외치며, 그럼에도 불구하는 낙원으로 여기는데 아주 능숙해졌다. 인문학의 위기나 인간성의 위기는 우려스럽기는 하지만, 우려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 듯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이곳은 그래서 대중들의 인식 속에는 인문학적 라이프스타일이 희박한 위기의 장소이자 인문학적 담론들이 물리도록 넘쳐나는 낙원인 것이다. 인문학자들이 놓아대는 몰핀도 한몫을 한다. 그들은 위기의 인간성을 말하면서 항상 희망적인 메시지로 이야기를 끝내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청중들은 사랑, 공감, 나눔 이런 말만 나오면 이해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들은 언제나 강연장을 나가서 딱히 해야 할 일이 특별히 없는 무노동의 낙원으로 인도된다.


사실 사망하는 것은 인문학도 아니고 필요한대로 수정되고 새로 정의될 수 있는 인간성이 아니라 개인적 주체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아름다운 것의 사라짐을 안타까워하는 차원이 아니라, 존재자 스스로의 주체의 위기이고 자아 포기의 위기이다. 인간성이 주체가 상실된 상태로 상식화 되면 - 이것은 분명 주체성의 상실이 아니라 주체 그 자체의 상실이다 - 몰핀을 꽂은 주체는 계속 안락한 침대에 누워만 있지 기능하지 않는다. 주체가 제거된 올바른 인간들은 주체가 아닌 것을 자아로 착각하면서 힘겹게 남같은 형제자매들과 애정같은 것을 나누는 관계를 연속해서 수행한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 Andrew Lloydd Webber의 뮤지컬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 Starlight Express의 등장인물은 모두 의인화된 기관차인데, 웨버가 어렸을 적 끼고 살았던 토마스 기차 장난감에서 유래한 스토리이다. 각국에서 참가한 기차들이 경주를 벌이는 내용이다. 여기서 부정적 인물 negative personage 에 속하는 디젤기관차는 엘비스 프레슬리 풍의 록큰롤 리듬에 맞추어 "I try to build my body, but try to lose my mind!"라는 라인을 읇는다. 자기는 몸을 키우는데 전력을 다하고 마음을 없애는데 전력을 다한다는 것이다. 인문학을 전공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사회라는 정글 속에서 자신의 몸을, 즉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스토리는 따뜻한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증기기관차의 승리로 끝난다, 최소한 그 뮤지컬에서는 그렇다.


웨버의 의도와는 달리 관객들는 극장 밖의 현실에서 증기기관차의 따뜻한 마음을 흉내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스토리 라인은 관객들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진부한 것이다. 스토리라는 것이 늘상 언제나 그렇기 마련 아니었던가? 그들의 현실적 선택은 오히려 인간성을 갖추지 못하고 머릿속이 비어보이는 디젤기관차 것이다. 우리는 이미 노골적으로 인간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바보취급하는데 스스럼이 없다. 대학의 상경계열은 인문학과는 어쩌면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개개인에게 '주체'가 있다면 대부분의 경영학 이론은 개연성을 잃을 것이다. 사회 속의 인간들이 주체가 없으므로 그쪽 사람들은 언제나 개연성의 승리를 거머쥔다. 뮤지컬과는 정반대이다. 뮤지컬에서 디젤기관차의 오류는 사실 몸을 발달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동시에 마음을 없애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상계열은 개인적 주체의 부재를 딛고, 개개인의 주체를 지속적으로 부정함으로 인해 언제나 승리한다.


진정으로 부정적인 인물은 관람자의 자리에 위치한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회 대중의 가치관이다. 상경계열을 공부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인문학을 없애버리고 있는 성대 현수막 사건을 관람한 위기의 관객들이 자신들의 현실에서 주체를 찾으려 하지 않을 것 같은 지루함이 또다시 몰려 온다. 이것은 분명 매우 익숙한 클리셰이다.


주여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조금 살아남은 인문학자나 자발적 인문학 전공 선택자는 희귀종이 될 것이다. 영어로는 endangered spieces라고 한다. 멸종위기동물. 인문학자들은 이미 특이한 것을 외치는, 주변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희귀종이 되었다. 남을 가르치기는 커녕 구경꾼들에게 입장료를 받고 인문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비슷한 쇼같은 것을 한다. 조련된 원숭이나 돌고래처럼 말이다. 강연의 의미보다는 강연이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데에서 핵심적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문학도를 사회의 비주류로 소외시키고 상경계열의 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의 상식은 나중에 돈과 권력으로 아예 대놓고 이 희귀종 인간들의 야수성 wildness을 구경할 수 있는 사파리를 만들어 새로운 인간성이 희롱할 구경거리로 만들어 돈을 버는 것은 아닐지, 4차 산업혁명은 인문학도로서는 참으로 동의하지 못할 대타자의 파괴적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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