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r Wife?'라고 말하는 한국 문화 이해하기
한국 사회에서 흔히 쓰는 표현 중에 직역하기 어려운 표현이 있다. 그 하나가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우리 아이' 같은 말이다. 이를 Our Wife 라고 번역하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직역을 하면 매우 어색한 표현이 된다. 이처럼 특이하게도 한국인은 ‘나’ 대신 ‘우리’라는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그리고 많이 사용한다. 말의 주어가 내가 아닌 우리가 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 언뜻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 표현 속에는 한국적 관계 의식, 곧 ‘우리’라는 존재 방식이 깊게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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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에서 ‘우리’는 단순한 집단 대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징한다. 너와 내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고 함께 살아가야만 내가 존재한다는 통찰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보다는 '우리'가 앞선다. ‘너와 나’라는 말처럼 상대를 먼저 두는 이 어순 속에는 “너 없이는 내가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또한 연인이나 가까운 사람을 “자기”라고 부르는 호칭 역시 흥미롭다. 본래 ‘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건네며 “너와 내가 하나다”라는 감각을 공유한다. 처음 간 식당의 주인이나 일하시는 분을 '이모'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문화의 연속선 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의식은 한국 현대사의 기적을 가능케 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산업화·민주화·정보화를 불과 반세기 만에 압축적으로 이룬 것은, 단순히 경제적 노력 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세계적으로도 이 처럼 짧은 기간에 대전환을 연속적으로 성공한 사례를 찾기가 힘들다는 점도 무언가 다른 원동력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잘 되어야 내가 잘 되는 것이라는 관계적 존재의식이 있었기에 다수가 동의하는 전환의 방향이 만들어지면 모두가 힘을 합쳐 이루어내는 저력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한번 발동이 걸리면 엄청난 괴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대강 알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간을 거치지만 합의가 이루어지면 그 방향으로 치고나가는 속도와 에너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바로 우리의 힘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살리는 것이 곧 나를 살리는 일이기 때문에 나의 일처럼 최선을 다하는 관계적 존재로의 의식이 발휘된 것이다. 새마을운동, 민주화운동, IMF 외환위기 때 금을 모아 나라를 살린 일, 코로나19 시기에 자발적 마스크 착용과 방역 협조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일 모두, ‘나의’가 아니라 ‘우리의’라는 의식의 산물이었다.
물론 다른 민족과 문화권에도 이와 비슷한 공동체적 의식은 존재한다. 인도네시아에는 ‘고똥 로용(Gotong Royong)’이라 불리는 상부상조 문화가 있어,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집을 짓고 농사를 돕는다. 중국의 공동체 의식은 전통적으로 국가 권위와 위계질서의 영향을 받는 측면이 강하지만, 민간 차원의 자발적 협력 문화도 존재한다. 다만 근대 이후 국가 주도의 집단주의가 더 부각되면서 한국의 수평적 '우리' 의식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일본의 '와' 문화는 조화와 합의를 중시하는 가치 체계로서,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특성이 강하다. 이는 한국처럼 갈등을 공개적으로 표출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더 큰 공동체로 통합되는 역동적 과정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보인다. 아프리카에도 ‘우분투(Ubuntu)’라는 개념이 있어 “내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철학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 문화와 한국의 ‘우리’는 결이 다르다. 한국처럼 갈등을 드러내면서도 더 큰 ‘우리’로 수렴되는 역동성은 부족하다. 아프리카의 우분투는 철학적 울림이 크지만, 국가적·역사적 차원에서 현대화와 결합하는 힘은 아직 제한적이다.
반면 한국의 ‘우리’는 수천 년 전통 속에서 ‘살림’ 문화로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근대 이후의 전쟁·가난·산업화·민주화 같은 극한의 전환기를 거치면서도 오히려 더 강한 힘으로 작동해 왔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적 ‘우리’는 독특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물론이고, 불과 70년만에 최빈국에서 선진국이 되는 데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의 '우리' 의식이 항상 긍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우리 편'과 '남의 편'으로 나뉘는 극단적인 편 가르기,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하고 집단 내 동조압력을 강화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특히 학연, 지연, 혈연과 같은 연고주의는 '우리'의 범위를 사적 이익 집단으로 축소시켜 사회 전체의 통합을 저해하는 고질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우리’와 ‘살림’은 단순한 전통문화가 아니라, 전쟁과 가난, 식민지 경험을 넘어 압축적 산업화와 민주화, 디지털 전환까지 겪어온 과정에서 형성된 생존의 지혜이자 사회적 자산이라는 점이 매우 놀라운 점이다. 미국이 개인의 자유, 프랑스가 권력에 맞서는 저항, 일본이 위계적 순응을 중시한다면, 한국은 갈등이 첨예해도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이라는 더 큰 우리로 수렴하는 힘이 작동하는데 이는 단순한 힘의 논리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고 공동체를 지키는 살림의 철학 속에서 자연스럽게 극단적이지 않은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의 ‘우리’ 의식이 위계적 복종이나 개인적 권리의 논리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음을 보여준다. 특히 촛불집회나 태극기집회로 대변되는 대규모 시위가 한 곳에서 동시에 개최되어 첨예하게 대립되는 주장을 하지만 이것이 극단적 폭력으로 치닫는 경우가 드물다. 그 배경에는 그들의 ‘우리’를 뛰어넘는 더 큰 우리인 대한민국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힘의 논리가 아니라 우리의 논리다. 이와 같이 한국적 ‘우리’와 ‘살림’의 철학은 위기를 극복하는 집단적 에너지이자, 변화의 순간마다 사회를 무너뜨리지 않고 새 길을 열어온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우리' 의식은 일상생활 속에서 '살림 문화'로 드러난다. 타자를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 일이 곧 나를 살리는 일이라는 사고방식이 바로 살림문화다. 농촌의 품앗이, 김장 나눔, 온돌의 지혜는 ‘우리의 삶’을 지키는 전통적인 실천이었다. 오늘날에는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제로 웨이스트 운동, 기업의 ESG 경영, 지역사회와 연대하는 사회적 경제, 그리고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기후변화 대응 노력 등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화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러한 우리 민족의 살림과 우리 문화를 전 세계로 확장하여 지구촌 전체를 우리 안에 품어야 하는 상황이다. 자본주의가 촉발한 기후위기와 불평등은 국경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기후위기나 양극화 문제도 결국 우리 안에 지구촌 모두를 포함하지 못한다면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기술 혁신으로 불거지는 기술윤리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구촌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 구성원임을 자각하지 못하면 기술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우리는 이제 수천 년간 축적된 '우리'와 '살림'의 지혜를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대내적으로는 자주적 발전의 기반을 다지고 대외적으로는 인류 공동체의 번영에 기여해야 할 때다. 이는 곧 지배와 경쟁의 논리를 넘어, 살림, 풍요, 윤리의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인류의 로직, 즉 K로직을 전 세계에 제시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