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리끼리”는 어쩌면 최선일지 몰라.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주인공 염창희는 마음에 안 드는 직원을 보며 “끼리끼리는 과학이다.” 그래서 상대하면 똑같아진다고 참을 때마다 내뱉었다. 꽤 오래된 말이라고 하던데 2022년 내가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고 어느 순간 인생의 모토삼아서 매일 외치고 있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다.”
뒷담화를 좀 하자면 유독 나한테만 화를 내는 여직원 A가 있다. 다른 여직원 다섯에게는 언제나 웃는 사람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지만 오직 남직원인 나한테만은 끔찍이도 하대하는 사람이다. 화가 나면 남들 다 들으라는 의도로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고 혼낸다. 처음에는 내가 업무실수를 해서 본인 업무에 지장을 끼치니까 화를 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일은 달랐다. 사실 나와 전혀 관련 없는 업무였으나 다른 직원 B가 A에게 그 업무를 내가 했다고 착각하고 말을 했는데 A는 그 사실을 내게 확인조차 하지 않고 화를 낸 것이다. 결국 그러긴 싫었으나 A와 B는 진실공방으로 다퉜고 B는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런데 A는 내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명백하게 본인이 잘못했지만 A는 내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한테 계속 화가 난 것도 내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A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A는 나를 깔보고 있던 거였다. A는 나를 우리 팀에서 가장 낮은 존재로 보고 있었다. 퇴근을 하고 계속 곡 씹을수록 몹시 기분이 나쁜 이유는 A가 나를 괄시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나는 “끼리끼리”에 어울리기 싫어서 억울해도 참았다. 화가 날 때마다 언제나 내 대답은 “죄송합니다.”였다. 또한 내게 다가오는 사람도 의도적으로 피했다. 다이어트를 핑계로 점심도 같이 먹지 않았고 업무 외 사담도 나눈 적이 없다. 나는 이 직장에서 조용히 있다가 나갈, 그냥 어떤 의미로든 “끼리끼리”가 싫었다. 그렇게 내가 침묵하고 있던 사이에 나는 화를 낼 줄 모르는 바보가 되었고 우리 팀에서 가장 서열이 낮은 존재 취급을 받았다.
그렇다고 내가 “끼리끼리”에서 탈출을 했는가? 나는 여전히 9개월 째 “끼리끼리”에 어울리기 싫다면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머리로는 고작 계약직끼리 유치하게 서열놀이 한다지만 그건 정말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남들이 보는 나, 그러니까 객관적인 나의 평가는 “끼리끼리” 수준 이하였다.
많은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끼리끼리” 탈출을 외치며 이곳에서 나가는 희망을 가져야 할까. 아니면 현실을 깨닫고 “끼리끼리”에서 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걸까. 이 이야기가 영화라면 주인공은 비범한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남들보다 뛰어난 일을 하겠지만 나의 이력서는 오늘도 연락이 없다. 연봉 3,000도 주기 싫은 시장의 논리가 내 위치였다.
어항 속 금붕어가 어항 천장까지 차오른 물 위로 입을 뻐끔거리고 있다. “끼리끼리”라는 어항을 박차고 바다로 뛰쳐나가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그 어항이 어쩌면 나의 최선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끼리끼리”에 끼지도 못하는 사람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