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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은하수 Sep 04. 2022

우주의 개미구멍#6

못된 것만 배워서 그래

 나는 집단생활이 정말 어렵다. 물론 집단생활이 쉽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만, 피해망상이 심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인지 사람에게 실망을 너무 많이 한다. 정말 유치하게도 이 나이를 먹을 때까지 속으로 ‘내 사람’이라는 경계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여기서 궤변이 시작된다. 


‘그럴 수 있어.’


 라고 넘어갈 수 있는 사이는 ‘내 사람’이 아닌 관계에서만 유효하다. '내 사람'은 내게 그래서는 안 된다. ‘내 사람’이 내게 실수를 하면 나는 가차 없이 사람을 차단시킨다. 상대에게 경고를 하지도 않고 변명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날 이후 모든 연락을 차단하다고 거리를 둔다. 이따위로 살았으니 곁에 누가 남아있겠는가. 주말에도 집안에만 처박혀 사는 인생이다. 스스로 자초한 외로움이다. 


 하지만 ‘내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내가 엄청난 ‘인싸’인줄 알고 있다. 나는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주도하고 싫은 기색 없이 모든 것을 맞춰줄 정도로 모난 구석이 없으며 늘 웃고 있기 때문에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힘든 것 없이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으로 오해를 산다. 다소 억울한 시샘을 풀기 위해 조금 친해지면 나는 내 가정사의 단편을 꺼내서 설명을 해야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당시 나는 무리에서 좀 나서는 입장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그렇다고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찐따’에 가까운 무리였는데 그 중에서 그나마 공부를 잘했고, 덩치고 컸다. 그래서 친구가 맞고 오면 대신 나서서 싸워주는 역할이었다.

 하루는 노래방에 뒤늦게 갔는데 친구들 표정이 어두웠다. 이유를 물으니 바로 옆방에서 일진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내 친구들이 벽을 쿵쿵 쳐서 걔네가 한마디 하고 갔단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래방 벽이 얼마나 얇았으면 의자에 앉으면서 등을 대는 것만으로도 벽이 흔들렸을까. 그런데 걔네들도 똑같이 벽을 치면서 우리도 피해를 받았다. 나서길 좋아하는 내가 자리를 박차고 옆방에 갔다.


 “야, 우리도 조심할 테니까 너네도 벽치는 거 하지 마.” 


 6명의 일진이 노래를 중단하고 나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상대 6명, 우리도 5명이었으니 할 만한 싸움이었다. 노래방 뒤에서 말싸움을 주고받다가 선빵필승이라 했으니 상대 턱에 3방을 내가 먼저 쳤다. 어떻게든 내가 두 명만 잡으면 할 만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의리는 만화책에만 존재했다. 내가 선빵을 친 사이에 내 친구들은 뒤에서 겁먹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량을 일삼는 일진은 자기 친구가 맞으니까 반사적으로 나를 공격했다. 실망감도 느낄 새 없이 살기 위해 도망쳤다. 동네를 뛰어다니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지만 토요일 오후에 그 많은 동네 사람들 중에 6명에게 쫓기는 나를 보고 돕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일진들에게 붙잡혀서 뒷산으로 끌려갔고 얻어맞았다. 2명은 망을 봤고 4명은 나를 마구 때렸다. 그러다 니킥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으면서 치아가 부러지고 눈 뼈에 금이 갔다. 안와골절이었다. 복시 때문에 구역질이 났다. 얼마나 맞았을까. 때리는 애들도 내 상태가 심상치 않은 걸 알고 때리길 멈췄다. 

 그 사이 친구들은 어떻게 할지 발만 동동 굴리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싸움 잘하는 친구에게 나를 구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싸움 잘하는 친구가 현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폭행이 끝났다.

 상처는 감출 수 없을 정도였다. 3주간 입원하고 수술을 했다. 폭행은 당연히 검찰에 넘어갔다. 가해자는 부모님과 함께 우리 집에 와서 선처를 부탁했다. 여기까진 당연했다. 그런데 가해자들은 매일 내가 하교하는 시간에 맞춰서 말없이 우리 집까지 쫒아왔다. 다른 동네 일진들은 나를 볼 때마다 고소를 취하하라고 했다. 심지어 학교도 그렇게까지 크게 만들 필요가 있냐며 나를 종용했다. 그리고


 “그냥 넘어가지 왜 굳이 일을 크게 만들었어...”    


 이게 그날 노래방에 같이 있던 친구가 내게 한 말이었다. 친구도, 학교도, 동네도 하나 같이 썩어버린 곳이었다. 심지어 그 타이밍에 아버지는 재혼을 하겠다며 새 여자를 데리고 왔다.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그때 한 가지 꿈이 있었는데 나처럼 버림받은 사람이 나타나면 꼭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위치에서 나처럼 되지 않게 돕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남을 돕는다는 목표의식은 있었지만 그 동안 나를 돌보진 못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배신에 대해 과민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퇴를 한 후 공부가 싫었던 건 아니었으니 재수를 하고 대학에 갔다. 2년 넘게 사람들과 대화를 단절한 채 히키코모리가 되어 대학을 준비했다. 그렇게 대학에 갔으니 사람 사귀는 것이 너무나 서툴렀다. 나의 말투는 날이 서있었고, 상대의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20살 먹고 왕따는 유치하니까 학과에서 은따가 되었다. 묘하게 학과 활동에서 나만 빠져 있고, 연락처에는 나만 없는... 내가 봐도 내가 재수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을 내편 아니면 적이었고 내편도 늘 의심해야만 했다. 늘 적이라고 생각하는 인간 관계 뿐이었다. 그래서 뒤늦게 그런 건 아니라며 조금씩 연습을 했다. 모든 사람이 나를 공격하는 게 아니다. 나의 말투는 가시가 있으니까 살갑게 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요즘 주말에 술 한 잔 마시자고 연락할 친구가 없는 스스로가 가끔 너무 한심하다. 그나마 있던 친구들도 결혼을 해서 불러내기도 힘들었다. 방에 혼자 누워 있다 가끔 상상을 한다. 어쩌면 내가 '그 사건'을 겪지 않았으면 지금과는 다른 삻을 살지 않았을까? 나는 원래 무척 밝고 살가운 사람이다. 다만 '그 사건' 때문에 내 안에 깊은 흉터가 있어서 뒤틀린 것 뿐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무엇을 탓하기엔 다 커버린 나이가 되었고, 그 뒤틀린 나도 내 모습이라고 보듬어주면서 아집 많은 꼰대가 되어간다. 그냥 살면서 못된 것만 배워서 외로운 놈이 되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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