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만큼 불편한 관계에 대하여
14년 전 이야기다. 지난 회에 이어서 나는 대학에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 겉돌았다. 변명 없는 내 처신이 문제였다. 그 당시 나는 스스로 거대한 운명을 거스를 만큼 대단한 존재라 착각했었다. 그렇게 싸가지 없던 내게 처음으로 밥을 같이 먹자고 했던 사람은 지도 교수님이었다.
그는 국문과 출신의 영화평론가였고, 마흔이 되기 전인 그 해 전임교수가 되었다. 내 히스토리에 꽤 관심이 많았던 지도교수님은 글을 쓰면 잘 쓸 것 같다고 말하셨다.
“너처럼 사연 많은 애가 글 쓰면 잘 쓸 거다. 나도 시골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부모님 밭 일군 돈으로 공부 했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글이 나올 거다.”
대충 이런 내용의 말이었다. 첫 제자였고 첫 스승으로 우리는 서로가 처음이었다. 그때부터 지도교수님을 사사했고 나는 글로 벌어먹고 살아야겠다는 장래설정을 끝냈다. 영화평론가가 되어서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돌이켜보면 글 쓰는 것이 되게 쉽다고 생각했었다. 롤모델을 만났으니 나의 싸가지 없음은 글쓰기로 이어졌고 글에 대한 자부심과 열등감이 용암처럼 솟아올랐다.
하지만 14년이 지나고 우리 관계는 누구보다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지도 교수님께서 아시면 정말 섭섭해 하시겠지만, 지도교수님만 빼고 다른 학부 교수님들은 눈치 없을 정도로 월 1회는 만나고 있다. 하루는 모 교수님께서 물어보셨다.
“한영 박사는 지도교수님하고 자주 만나고 있니?”
“아뇨... 연락 안 드리고 있어요.”
“왜?”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해서요.”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했기 때문에 기대가 컸던 것 같다. 그를 좇아 나는 결국 평론가가 되었고 박사가 되었지만 결과는 너무 달랐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야 지도교수님이 천운을 타고났다고 인정해야 했다. 그러니까 8x 학번들이 개룡남의 막차였다는 걸 10년이 넘어서 알게 된 것이다. 교수님은 교수님대로 맘이 편치 않으셨다. 자기를 보고 글 쓰겠다며 학석박을 사사했는데 그 결과가 계약직 교직원이니까 말이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소원해진 것은 학위를 받은 직후 이야기다. 지도교수님은 당신 강의를 떼어 제자에게 나눠주셨다. 그렇지만 월 60만원 가지고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자에게 당신 친구가 운영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주셨다. 갓 박사가 된 제자는 낮에는 강의를 했고 밤에는 근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쪽팔렸지만 지도교수의 마음 잘 알았기에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료 박사와 다른 교수들에게 소문이 퍼져나갔고 제자는 다른 교수님의 도움으로 편의점보다는 나은 연구소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스승과 제자는 소원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직감했다. 제자는 스승을 뵙게 부끄러웠고, 스승은 제자를 마주보기 미안했다. 그냥 연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념일에 연락만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후로 글쓰기의 열망이 사그라졌다. 좋은 문장을 읽으며 더 잘 쓰고 싶은 열등감도 없고 잘 나가는 작가를 보며 부럽거나 동기가 부여되지도 않는다. 그냥 배운 게 도둑질이라 여기에 취미 삼아 글을 쓸 뿐이었다. 다만 청탁이 오면 받은 만큼 원고를 쓰긴 한다. 그건 약속이니까. 하지만 글에 대한 고민으로 잠 못 이루는 예술가의 고뇌보다 딱 비즈니스로서 마인드다. 패배주의적 글쓰기가 이런 걸까.
선생님, 저는 당신이 되기엔 부족한 사람입니다. 차라리 다른 길을 걸었더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편하고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을텐데요. 사람의 연이라는 건 참 복잡합니다.
요즘 나는 글의 대한 마지막 불씨마저 꺼졌기를 바라며 나무 막대기로 쓰윽 잿가루를 뒤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