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은 유부남!
“너는 결혼이 성공의 기준이냐?”
“응. 나는 결혼만 하면 될 거 같아.”
“야, 결혼은 또 다른 시작이다.”
“알아. 그냥 도태되진 않았단 소리잖아.”
한 달 전에 막 혼인신고를 한 친구가 이해할 수 없단 뜻으로 말했다. 연봉 5,000 만원에 워라벨 좋은 일본 기업에 다니니까 그 기준에서 보면 결혼은 선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연봉 2800 만원의 직장을 다니는 내게 결혼은 도태한남에서 벗어났다는 인증마크가 된다. <우주의 개미구멍#8>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심연 속 괴물과 마주한 후 반드시 결혼을 해야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생각해보니 결혼하고 싶단 생각이 처음은 아니다. 어쨌거나 연애를 할 때마다 결혼을 상상하긴 했었으니까. 24살 때, 32살의 여자를 만났는데 그 사람은 연애를 하고 싶었지만 나는 사귀기기도 전인데 결혼부터 걱정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현실적으로 결혼적령기인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여자는 기다릴 수 있다고 하는데 남자가 자신이 없었다. 실은 여자는 선보라는 압박을 느끼고 있었고 남자가 잡아주길 바랐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지만 연인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1년 후, 여자는 다른 이와 결혼을 했다. 결혼사진 촬영 중에 남자는 그날 세상에서 가장 예쁜 신부의 뒷모습을 보며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깨달았다. 촬영이 끝나고 모두 해산할 때쯤 신부는 남자만 따로 불러 둘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짧은 시간 동안 둘은 나란히 서서 못다 한 인연을 정리했다. 얼마나 자책을 했는지 정말 서럽게 울었다.
“꼭 좋은 사람 만나서 나보다 행복하길 바랄게.”
29살 때, 처음으로 내게 기대는 아이를 만났다. 부끄럽지만 그동안 나의 연애는 상대에게 의존하는 연애뿐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의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그랬는지 모르겠다만....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다는 감정을 처음 느꼈다. 그 아이는 나와 똑같이 어릴 적에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아버지와 살고 있었다. 그 경험이 어떤지 알기 때문에 나는 여자친구보다 그녀의 어머니를 더 챙겨드렸다. 몸에 좋은 영양제나 사소한 먹을 거라도 전부 어머님 챙겨드리라고 늘 보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고 무리해서 집을 구해 동거부터 시작 했다. 가구와 전자기기를 사면서 집을 꾸미며 동거를 즐겼다. 그런데 그때 바로 결혼을 했어야 했는데, 실수로 내가 대학원에 가고 말았고 그만큼 결혼을 미루게 되었다.
변기에 오줌이 묻는 거로 싸우는 것도 지칠 만큼 서로를 미워하다가 우리는 서로 딱 그만큼의 거리를 찾았다. 헌신은 연애에서만 가능했던 것이지 24시간을 헌신 할 순 없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결혼하고 알아야 했는데 그 전에 알아버린 우리는 이별 직전까지 싸우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물건을 집어 던지고 말았다. 역시 그 핏줄 무시 못 한다고 쇠파이프로 아들 때리던 아버지를 아들이 그대로 이어 받았다. 우리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아이는 폭력적인 남자와 결혼해도 될지 싶을지 걱정했고 나도 그 핏줄 때문에 또 안 그런단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쉬웠다. 이후 우리는 헤어진 게 다행이라고 할 만큼 매일 싸우다 끝이 났다. 단순한 이별이 아니었기에 어떻게 가족들에게 이별을 알려야할지 너무 막막했다. 그리고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 따르는지 알고 나니까 결혼할 자신이 없었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제도라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보았다.
32살이 되었다. 그녀는 내가 논문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자기 돈까지 빌려주는 사람이었다. 과분할 정도로 너무 많은 것을 받아서 늘 고맙고 미안했다. 솔직하게 그녀에게 이성적인 끌림은 이전 연애보다 덜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3년 연애동안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개그코드가 잘 맞아서 밥을 먹는 것 자체만으로 웃음이 나는 사이였다.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서로가 서로에게 솔직한 그대로의 모습 자체만으로도 연애가 되었다. 진짜로 그녀는 내게 소울메이트였다.
그녀는 내가 논문을 낼 수 있도록 헌신했고 나 역시 논문만 쓰면 모든 것을 보상 받아서 그녀에게 보답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논문을 내고나니 기대조차 사라질 만큼 내 현실은 처참해졌다. 결혼은커녕 학자금 대출 5,000 만원도 갚을 수가 없었다. 올 초 그녀는 내게 헤어지자고 말했고 곧바로 교회에서 선을 봐서 만난 남자와 11월에 결혼할 예정이다.
이 정도면 내게 결혼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될까. 코로나로 열흘 동안 혼자 지내면서 지난 연애가 전부 스쳐지나갔다. 결혼 반드시 해야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결혼을 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건 고소득, 최소 연봉 4,000 만원을 벌어야 한다. 학자금 대출금 5,000 만원은 뒤로 미룬다고 쳐도 지금 받는 연봉으로는 도저히 결혼 생활을 할 수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초직장은 미래가 없다. 내가 일하고 있는 산학협력단의 남자직원은 모두 본교에서 넘어온 파견 교직원이다. 산학협력단 소속 남자직원은 오직 나 혼자밖에 없다. 이유는 돈이다. 1호봉에 10만원씩 월급이 오르는데 실수령 300 만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기서 10년을 일해야 한다. 미친 보수다. 여자야 남편(가장)이 번 돈의 +@라는 개념이기 때문에 이곳에 다닐 수 있지만 한국 사회가 남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한다면 여기서 일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여기 있어도 결혼을 못한다면 다시 강사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당장 돈 걱정에 스트레스겠지만 최소한 거긴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기대라도 있다. 강사를 해도 산단 직원을 해도 결혼을 못 한다면 다시 도전해야 한다. 무엇보다 여기에 있으면 결국 아빠와 다를 바가 없다. 35살, 연봉 2800 만원, 학자금 대출금 –5000 만원. 가만히 있어도 말라죽는 거라면 그냥 발악하다 죽어야겠다. 그것이 아빠의 유전자를 잘라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기필코 결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