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댄스는 추지 않을 거야
만약 게임처럼 상태창이 보인다면 나의 운 능력치는 D급 정도라 생각한다. 나는 굴러 떨어져서 여기까지 온 인생이다. 어떤 상황이냐면 열심히 해서 암벽을 등반하는 것이 아니라 절벽에서 계속 굴러 떨어지다 더 떨어지지 않게 버티는 삶이다.
가정사야 몇 번 썼으니까 넘어가고 수능부터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자퇴 후 엄마 따라 서울에 올라와서 도서관에 다니면서 혼자 공부를 했다. 그런데 노력에 비해 성적이 좋지 않았다. 특히 영어듣기가 마지막까지 안 늘어서 듣기에서 망치고 지문을 다 맞추는 기행을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3수를 하려고 했는데 간염보균이 활동성으로 바뀔 정도로 건강이 나빠져서 결국 재수에서 대학을 가게 되었다.
공익근무 중에는 공익 요원들을 모아 독립영화를 찍었다. 그런데 주인공인 남자 공익요원이 3일 동안 근무지 이탈로 출근을 안 하게 되었다. 공모전 마감은 다가오고 결국 주인공이 빠진 채 작품을 내긴 했는데 전혀 생각도 못한 방향이었다. 떨어진 것도 떨어졌지만 최선이 아닌 작품이라 너무 아쉬웠다.
대학교 졸업반 때는 웹툰을 그렸다. 시나리오와 콘티가 있어서 게임 일러스트레이터 하겠다는 대학 동기를 꼬드겨 연재를 시작했다. 바이러스에 관한 내용 있는데 마침 그쯤 메르스가 유행하면서 작품이 인기를 끌었다. 지금은 유명해진 연재처에서 연락이 올 정도였지만 당시엔 너무 페이가 적었다. 그저 우리 둘은 빨리 네이버에서 납치해가길 기대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기를 끌수록 그림 작가의 부담이 커져갔다. 액션 만화였고 그 친구의 그림체가 마음에 들어서 최대한 작화가가 돋보일 수 있도록 쇼잉 연출을 했는데 그게 초보 작화가에는 큰 부담이 되었다. 그는 매일 손목이 아프다고 작화가 안 나온다고 힘들어했다. 그리고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스토리와 연출인 내 영역에 말없이 손을 대기 시작했고 다툼 끝에 우리는 1달 정도 연재를 쉬면서 손목치료에 전념하자고 했다. 하지만 손목이 아파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그는 쉬는 동안 나 몰래 혼자 작품을 새로 하고 이름 없는 곳에서 데뷔를 했다. 나는 작화가를 구할 수 없었으니 더 이상 원래 작품을 할 수 없었다. 마치 이혼 때문에 생이별한 자식 보듯 미련만 쌓였고 그게 어떻게 튄 건지 대학원에 진학해서 웹툰을 연구하게 되었다.
석사과정 중에 결혼이 하고 싶어서 나름 있는 중소출판사에 취직을 했다. 영화와 만화라는 전공에 맞게 입사 전 알려준 내 업무는 자사 책을 홍보할 MCN사업과 학습만화 개발이었다. 그런데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그 모든 업무를 지원 없이 나 혼자 할 줄 누가 알았나? 신입사원한테 맨땅에 헤딩을 하라는데 무슨 성과라는 것이 있겠는가. 대차게 말아먹고 나는 출판 기획으로 배속되었다. 그래도 당시 회사에 페미니즘 에세이가 50만부가 넘게 팔리는 초대박을 눈앞에서 보면서 욕심이 생겼고 나도 기획이라는 흉내를 내보았다. 그러나 내 기획안 작성 실력이 부족했는지 작가가 기분 상한 정도로 편집부에서 리젝 되었고, 나는 작가에게 미안하다며 같이 기획 했지만 다른 곳에서 기회가 있으면 꼭 책으로 내시라고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 원고가 훗날 4대 출판사에서 출간 되어 5쇄까지 찍혔다. 인생 진짜...
박사논문도 결국 쓰긴 썼는데 할 말이 참 많다. 우선 석박통합과정이라 8학기면 조기 수료가 되는데 후배이자 조교가 내 사인을 대필해서 조기수료를 포기한다는 서류를 내게 말도 없이 통과시켜버렸다. 학과 후배라 엎어버릴 수도 없고 책임은 학부장이 지어야 하는데 학부장이 모교 교수님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 안고 가는 것으로 해서 500만원 등록금을 더 냈다. 또 논문을 쓰던 와중엔 엄마가 수면제 자살기도를 했다. 통화를 하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엄마가 사는 집에 들이닥쳐서 다행히 일찍 엄마를 발견하게 되었다. 박사학위만 받으면 호강시켜드린다고 제발 삶을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응급실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논문을 집중하는데 결정적인 사건 하나가 터졌다. 외부 심사위원 한 분이 갑자기 내 논문이 마음에 안 든다며 마감 15일 전에 논문을 엎어버렸다. 논문 가제본을 1달 전에 보냈고 본인도 인준도장을 찍으라고 오라고 한 날이었다. (높은 확률로 논문을 그제야 본 것 같다.)
“솔직히 뭐랄까? 논문이 석사 수준도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가니까 논문이 마음에 안 든다고 도장을 찍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수정사항을 받아 적었다. 점입가경으로 논문 마감 1주일이 남았던 날, 외부 심사위원은 갑자기 논문 차례를 바꾸라고 했다. 이는 말만 안했을 뿐 논문을 엎으란 소리였다.
*관행을 부연하자면 실질적으로 학위논문은 지도교수와 과정생이 쓰는 것이다. 외부 심사위원은 프로포잘(논문발표) 이후에는 논문의 세부사항에 대해 지적할 뿐, 차례를 엎는 것은 지도교수의 의견에 반하는 것이다.
박사학위만 받으면 내 모든 노고를 보상 받을 것인데 어떻게 여기서 그만 두겠는가. 게다가 어쨌든 외부 심사위원은 절대 그 입에서 논문 도장을 안 찍어주겠다고 말을 하진 않았다. (아마도 지도교수와 직접적으로 싸우긴 싫었기 때문으로 추측 된다. 왜냐하면 그 외부 심사위원은 다른 내부 심사위원의 지인으로 나와 내 지도 교수와는 연이 없었다.) 지도 교수님은 한참을 생각하시다가 다 맞춰주라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이마에 핸드폰을 올려놓고 하루에 2시간 씩 잠자며 논문을 썼다. 한 6차까지 논문을 고치고 마감이 4일 남았을 때부터는 그 외부 심사위원이 바쁘다며 연락이 두절됐다. 정말 얼마나 처절했었는지 인쇄소 사장님께서 밤을 새서라도 논문 찍어 줄 테니까 당일 새벽에라도 도장을 받아오라고 하셨다. 결국 만 26시간을 남기고 도장이 찍었다. 뉴코아 백화점 버거킹 안에서 1시간을 기다리고 도장을 받았다.
“정말~ 너무 고생 많이 했어요. 논문이 이제야 논문답네요. 다 잘 되라고 한 거 알죠? 축하해요. 박사님.”
그는 가장 천사보다 따듯한 미소로 내게 수고했다고 말했다. 논문 도장 찍어주기 싫어서 난도질을 해놓고... 인쇄를 맡기고 방전되어 하루 종일 잠을 잤고 바로 다음날 논문을 제출했다. 그리고 참아왔던 모멸감이 쓰나미처럼 나를 덮쳤다. 제자리에 서서 15분 동안 미친 듯 울기만 했다.
뭐하나 순탄한 게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더러운 운명을 타고 났다. 하지만 나는 참고 버텨냈고 박사가 되었다. 이제 사는 의미가 없다는 엄마께 남 부러워할 아들역할을 할 수 있고 나를 위해 헌신한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박사가 되니까 월 60만원 시간강사와 편의점 알바생 인생이었다. 정신이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그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잉여인간의 실체다.
하지만 유부남이 되는 것을 목포로 했으니 다시 일어나야 한다. 이번 10화를 쓰면서 나는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이젠 넘어지면 그냥 넘어질 것이다. 마지막 기회 따위에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다. 서술하진 않았지만 나의 수많은 실패 사이에 내 정신건강은 약을 먹어야할 정도로 갈려나갔다. 정신과가 익숙해질 만큼 좌절과 심연 속에서 허우적댔는데 그게 점점 나아지기는커녕 이젠 더 상처의 기간이 길어진다. 솔직히 또 다시 쓰러지면 이젠 정말 못 일어설 것 같아서 걱정이다. 그래서 다시는 마지막 기회에 오기를 부리지 않을 것이다. 이젠 슬픈 영화는 보기 싫다.
“그냥 운이 D급이라서 또 빠그라졌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