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면서 답하죠?
개그맨 김국진은 라디오스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은 몰라요. 냄비 뚜껑 열어보면 다 끓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한 가지 원칙을 세웠는데, 절대 타인에게 “행복해 보인다.”, “착하다.”라는 평가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내가 듣고 말았다.
“한영 쌤은 사람이 착해. 화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 있잖아, 화 낼 때 되게 조리 있게 또박또박 화내는 사람. 그런 사람들 보면 부럽더라. 한영 쌤는 그런 거 못하지?”
그 이야기를 듣고 멋쩍게 웃었는데 전 직장 동료이자 현 직장 동료이며, 곧 결혼하는 전 여자 친구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한영 쌤 전 직장에서 화나면 메일 보내는 사람이었어요. 사람들 앞에서 말을 안 할 뿐이지 화나면 또박또박 다 따지는 사람이에요.”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무서운 사람이었네~”
내가 사회생활을 정말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에게 화를 낸다는 의미는 다시는 그 사람을 안 본다는 손절을 뜻한다. 그래서 타인의 무례에 화를 내지 않고 말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대부분 그냥 삭히고 넘긴다.
최근에도 팀 점심시간 때마다 무슨 말만 하면 머리 좀 자르라고 내 외모를 평가하는 여직원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 꼭 팀원들 다 있는 곳에서만 그런다.
“그러니깐 일단 머리부터 자르라니까~ 남자가 깔끔하게 하고 다녀야지!”
마치 아줌마 주책처럼 A to Z 모두 대화 끝에 머리를 자르라 나를 놀리며 내 헤어스타일을 계속 걸고넘어지는데 마음 같아서는 남직원이 여직원의 헤어스타일에 왈가왈부하면 넘어갈 수 있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침묵.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괜히 팀 식사 분위기를 망치기 싫어서였다. 따로 불러내서 말을 해볼까 했는데 그 생각을 하니 상대의 기분은 안 나쁘게 어떻게 내 의사를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다. 분명히 따로 말을 하면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사내에 소문이 돌 텐데... 결국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며 뒷담화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여기에 “어차피 퇴사 할 거니까.” 라는 자기합리화를 더했다.
생각해보니까 처음 회사생활을 시작한 2017년 전후로 출판계에서는 “할 말은 한다.”라는 주제의 에세이 서적이 유행처럼 출간되었다. 간혹 요즘 “MZ세대”라며 거침없이 말하는 신입사원들의 놀라운 패기에 관한 증언들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데 어쩌면 이들이 그 당시 그 책들을 보고 공부 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그 자리에서 말을 할 수 없으니까 책으로나마 대리만족을 하고 싶어서, 혹은 정말 완곡하게 거절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서 시작한 그 유행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것을 보면 할 말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건 고금을 막론한 문제인 듯하다. 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까지 할 말을 참아야하는지 이유를 생각해보면 괜히 말했다가 유별난 사람 취급을 받기 때문인 것 같다. 보통 할 말을 다하고 살면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저러니까 저 나이 먹도록 결혼을 못하고 혼자 살지.”
그리고 뒤에서 이런 소리까지 듣게 된다. 부끄럽지만 나도 예민한 사람을 두고 똑같이 저렇게 말을 해버렸다. 공동생활을 하는데 그 정도의 불편을 못 참느냐며, 사람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도 듣지 않고 화부터 낸다며 뒤에서 욕을 했다. 결국 그 말이 오늘의 내게 정조준 되어 내 이마에 빨갛게 박힌 레이저 포인트가 수 십 개다. “저러니까 저 나이 먹고 도태한남이 됐지.” 이 말을 들을 까봐 화를 못 내고 있기도 하다.
대부분 할 말을 하고 사는 사람은 본인이 할 말을 해도 될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내 경우는 교수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테뉴어를 받은 교수들이 할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들은 뭐 애초에 협업이라는 게 필요 없이 개쌍마이웨이로 살 수 있으니까. 그래서 모 교수가 말하길 “교수들은 단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들이 성공한 케이스다.” 라고 농을 던졌다.
30년 넘게 살면서 갑의 위치가 아님에도 딱 5명 정도가 기분 나쁘지 않게 할 말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기품이 넘쳤고, 카리스마가 있었으며, 쉽게 대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 선 넘으셨는데요!”
이 표현을 정말 기분 나쁘지 않도록 부드럽게 넘어가는 사람들. 이들 중에 글을 좀 쓰는 사람들이 책을 내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거겠지. 그런데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작가들의 글을 읽어보면 갑에게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때 침묵하지 않고 투사처럼 맞서 싸웠다고 서술 되어 있는데 실제 내가 본 다섯 명은 그 정도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도 눈치라는 게 있기 때문에 해볼 만한 사람들한테나 웃으면서 자기표현을 할 뿐 상사에게는 침묵했다. 다만 상사의 기분 나쁜 소리를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바로 흘려보냈다.
“어차피 말 안 통하는 사람(상사)이니까 그 말에 크게 의미 두지 말아요. 계속 갖고 있으면 쌤이 스스로 을이 되는 거예요.”
맞는 말이지만 자기애가 확고하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생각했다. 사회생활에서 할 말을 하고 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이렇게 마음에 두지 말고 흘려보내야 한다. 그런데 할 말도 못하면서 마음에 담아두고만 있으니 나는 아직도 어른이 되긴 멀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