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부터 시작해 삼십대 초반을 함께, 10년째 지지고 볶고 있는 여섯 여자 이야기.
우리는 얼추 10년을 함께 보냈다.
우리 중엔 정말 함께 산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서로의 공간을 편히 오가며 시간을 쌓았다. 서로의 집을 마구 드나드는 우리를 보고 누구는 "집단 생활 하냐?"고 하기도 했다. 우린 다 각자 이상한 여섯 명쯤이 주요 멤버인 무리인데, 이 중 나를 포함한 네 명이 12년 전 쯤에 알게 됐고, 한 명은 그보다 몇 년 후, 한 명은 그보다도 늦게 끼어들었다. 근데 하필(?) 이놈이 원년 멤버의 동생이었던 탓에 계산이 애매하다. 실은 다들 이런 줄 세기식 역사에 별 관심 없으니 대충 10년으로 퉁 친다. 나이는 878889년생.. 대충 다 친구 먹었다. 언니라고 했다가, 야라고 했다가, 이 새끼(…)라고 했다가. 내키면 존댓말도 쓰는데 딱히 반말과 늬앙스의 차이는 쓰는 자와 듣는 자 모두에게 없는 것 같다. 우리 중 친자매의 동생도 딱히 언니라고는 안 한다. 서로들 존댓말이 나오면 그저 10년 전의 촌스런 말투를 아무 생각 없이 쓰나보다, 하…기도 하는데 실은 다들 남이 떠들 때 안 들어서 자기를 뭐라 부르는지 모르는 건지도 모른다.
‘관심이 없다’ 이건 진짜다. 모이면 다들 진짜 자기 얘기만 한다. 그렇다고 누가 삐지거나 싸우는 일도 없다. 왜냐면 남이 자기 얘기만 하는지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 원래부터 남한테 별 관심 없는 애들 여섯이서 낄낄거리고 놀다 보니 그냥 대충 그렇게 굴러간다. 진짜 심각한 얘기 할 때는 손을 든다. “야, 지금은 진짜(?)야. 좀 들어봐.” 2분 정도 듣다가 또 딴 얘기로 퍼진다. 왜냐면 듣다가 생각난 자기 얘기를 해야 되니까(…).
그래도 10년을 돌아보니 우리가 이래서 지금껏 이어졌나 싶다. 타인에게 애정은 있지만 딱히 관심은 없고, 친구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제일 중요한 사람들이 모이니 항상 시끄러운데 어딘가 평화롭다. “니 인생 니가 제일 잘 알겠거니”하며 지켜보다보니 서로를 가십거리로 만드는 일도 없다. “엥 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줄곧 서로에게 반대하는데 거기에도 역시 자기 의견을 뱉는 거라, 내가 평가당한다는 기분이 없다. “야, 나 살 좀 빠지지 않았냐?” 하면 “빠졌냐?” 한다. “나 10키로 쪘다” 하면 “쪘냐?”한다. 쌍커플 수술 정도는 해줘야 관심을 받을 수 있다. (그건 나다. 그땐 됸됸이 머리도 감겨줬다. 그건 고맙.) 관심이 좀 있는 거라면 다들 각양각색인 취향 정도인데, 이것도 오로지 비웃기 위해서만 관심을 둔다. “이 헐벗은 옷, 니 거네.” “꽃무늬 니 스타일 아니냐?” “시꺼먼게 닌이 거네” 물론 딱히 불쾌하진 않다. 니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로들 관심 없기 때문이다(…).
어찌저찌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지 서로의 역사를 (신기하게도) 기억하고 있다. 다들 귀찮다고 하면서도 누가 해외에서 왔다갔다 하거나, 누가 슬프고 기쁜 일이 있거나, 누가 그냥 심심하거나(…) 한 날마다 모였다. 물론 모여서 다른 귀여운 사람들처럼 귀여운 짓은 별로 안 했다. 대충 누구는 와인, 누구는 케이크, 누구는 요리하고, 누구는 집을 내주고, 하는 식으로 대애충 모여서 대충 떠들다가 갈 사람 가고 잘 사람(주로 나)은 자는 식이다. 예쁘게 사진 찍고 이런 거...없다. 대부분 후줄근한 얼굴로 모여서 바닥에 누워있거나 낄낄거리는 사진만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얘들을 생각하면 이상한 신뢰가 밑바탕에 있다는 게 느껴진다. 이미 볼꼴 못 볼꼴 다 봐서 그런가, 나한테 관심이 없어 그런가. 내가 남이나 나를 해치지 않는 이상 어떤 모양이어도 버리진 않을 것 같다. 버리는 것도 에너지가 드는 일이라 관심이 있어야 할 수 있는데 그러기엔 자기 살기 너무 바빠(...). 그러니까, 우리는 끈적끈적이라기보다는 툭, 툭, 쌓인 관계라고나 할까. 툭, 툭 쌓여 10년이니 그 빈 공간 사이사이로 씨앗이 떨어져 분명 어딘가에서 꽃이 피고 나무가 된 것 같다.
아, 근데 얘들을 두고 좋은 얘기를 쓰려니까 몸에서 두드러기가 나는 것 같다. 어쨌거나, 얘들 얘기는 매일 웃겨서. 솔직히, 이 ‘느슨하고 서로에게 관심 없는 우정(…이라고 쓰고 싶지 않은 기분)’, 아니 관계, 이걸 복기하는 게 참 재밌어서 쓴다. 언젠가 몸이나 마음이 늙은 날에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이십대를 각자 알아서, 근데 지나고 보니 함께 살아왔던 여자들에 대해 쓰기로 했다. 이 글을 본 걔들의 반응은 좀 궁금하긴 하다.
등장인물
쩡려. 정자매즈 중 언니. 닝겐이라고도 불린다. 동생인 됸됸이 언닝겐, 언닝겐 하다보니 우리 모두 가끔 닝겐이라고 따라한다. 파키스탄에 가 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귀찮아서 자기 집 베란다에 숨어 사는 것 같다는 의혹이 있다. 한식을 너무 잘 해먹고, 배경이 맨날 실내다. 코로나19 핑계 대지만 우린 다 알 수 있숴(…). 예술가인 파트너 요요진님과 열애 중인 비혼주의자. 덩어리 고기는 안 먹는다. 해산물은 포기할 수 없었다. 건강식 좋아한다. 웹소설 작가로 대박 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근데 현재 최고연봉자다.
됸됸. 정자매즈 중 동생. 제일 시끄럽다. 그냥 시끄럽다. 너무 나댄다. 헐벗고 다닌다. 회사엔 레깅스와 츄리닝, 쌩얼로 간다. “뭣하러 거기 가는데 돈하고 시간을 써?” 약간 생활의 달인 면모가 있다. (칭찬해주기 싫어서 약간이라고 썼다). 약간 사교성이 제일 좋다(역시 칭찬해주기 싫어서 약간이라고 씀). 우리 중에 제일 빨리 결혼할 인물인데, 꿈이 자기 결혼식날에 트월킹 추는 거라고 했다. 결혼할 남자친구 의견은 아직 못 들은 걸로 안다. 친구가 많다. 개발자다. 잘 싸운다. 못된 사람 참교육 전문가. 회사와 일상에서의 분노 표출이 남들의 반대로 돼있다. 회사에서 참지 않는다. 회사에서 일 못하고 됸됸 건드리면 아주 그냥 죽는 거여. 관종이라 맨날 인스타 라이브 방송(“님들 하이염~”)하고 트위터도 하는데, 트위터 팔로워는 3명이고 인스타 라방엔 맨날 우리만 있다. 모여서 틀면 거기서 바로 팔로워 정모다. 그냥 말로 해.....
오슈방. 소식가. 적은 양을 느리게 먹어서, 밥 먹을 땐 ‘주토피아’에 나오는 나무늘보같다. 이 사람의 명언은 “하루 칼로리 다 챙겨 먹기 너무 힘들어”. “오슈방 한효주 닮은 것 같아”라고 하면 “나 조인성 닮았단 말은 들어봤는데”로 대답하는 사람이다. 종잇장처럼 얇은 몸으로 나름 춤도 잘 춘다. 공연도 했다. 티거 닮았다. 부연 설명을 핵심 내용보다 길게 말하는 ‘만연체’ 병에 걸렸다. 올해 독립했다.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회사에서 일하다 최근 자신의 삶을 이롭게 하기 위해 퇴사하고 데이터 관련 공부를 한다(고 한다). 근데 뭔지 몰라서 설명은 패스. 사진을 잘 찍는다. 우리 중 유일한 힙스터다 (그나마).
닌이. 면 덕후, 영화 덕후. 면주라고도 한다. 프로 참석러. 맨날 “바빠, 싫어, 집에 갈 거야”라고 하는데 부르면 오고 집에 가지 말라면 안 간다. 무채색 옷을 좋아한다. 한때 댄스 동아리도 했었다(팝핀인가, 미안.) 예전 별명은 흰둥이였다. 국내 유수의 기업만 거친 나름(?) 엘리트 개발자다. 10년 전 내가 길거리캐스팅했다. 진짜다. 인사도 안 하는 사람이 많은 인간 바글바글한 동아리 모임에서 혼자 내적 친밀감을 느껴서 10년 베프처럼 대했더니 10년째 놀고 있다. 닌이는 이걸 ‘독재자식 우정’이라고 했지만, “너 나랑 놀자”한다고 따라온 네가 바로 프로참석러인걸. 어른들이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카용. 제일 조용한데 제일 크게 사고 친다. 말하는 것만 보면 세상 똑똑해 보이는데 세상 허당이다. 만지는 것마다 부수고 망가뜨리는 마이너스의 손이다. 그래도 착하다. 해외봉사 경력만 5년. 네팔에 마음을 두고 왔다. 나름 박사과정 2년차. 인상만 보면 제일 조용한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제일 끝없이 말한다. 조용조용 술도 끝없이 먹는다. 소주파. 나머지가 입만 살아서 나불나불 다 죽이고 다 뿌시고 떠들고 다 잊어버리고선 헤헤거린다면 카용은 조용히 큰 사고를 친다. 그리고 나중에 알려준다. 갑자기 박사과정 관두고 네팔엘 간다던가, 정신 차려보면 귀국해 있다던가(…).
그리고 나. 춈푸. 겉으론 친화력이 있어 보이지만 실은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한다. 오늘 퇴근하면서 내일 퇴근하고 싶다고 말한다. 심각한 비염으로 콧소리를 내서 본의 아니게 애교를 부릴 때가 있는데 속은 아재다. 힘은 제일 세다. (나름 자부심이 있다.) 맨날 놀자고 하면서 열 두시만 되면 잔다. 근육 부자다. 베이킹, 요가, 독서, 백패킹… 취미 부자. 자꾸 쏘다녀서 춈길동이라 불린다. 그리고 또…뭐가 있을까. 흠흠. 지만 좋게 쓴다고 욕 먹을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 메롱. (애들한테 공유했더니 나 이상한 걸 자꾸 쓰라고 한다. 안 쓴다. 바보냐?)
+그리고 또 다른 인물들
요요진. 닝겐의 연인. 스님처럼 깎은 머리에 사시사철 골무를 낀다. 신기하고 재밌는 전시를 하는 훌륭한 예술가다. 웬만한 남자들은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는 우리의 시끄러움과 거침없음을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는다. 잘 참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요요진은 우리랑 잘 논다. 어쩌면 요요진도 우리만큼 남에게 관심이 없어서 우리가 뭐라 떠드는지 하나도 안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굿수진. 김해에서 태어난 하와이안. 남에게 관심 없기로는 우리 모두를 합한 정도다. 나의 친한 친구였다가 아무래도 나대는 폼이 됸됸이랑 비슷해 보여서 초대했다. 됸됸이랑 둘이 소울메이트니 뭐니 같이 나대서 소개해준 걸 좀 후회했다. 아무때나 우리랑 놀아도 위화감이 없지만 그러기엔 너무 자기 놀기 바쁘다.
혜쁘니. 됸됸 친구. 가끔 함께한다. 작고 귀여운 혜쁘니는 도도하고 새침해보이는데, 막상 우리가 이상한 짓 할 때 제일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물구나무 서기라던가, 손 뻗어 멀리 있는 음식 막 먹기라던가….조용히 애쓰고 있다. 귀엽다. 서로 만나면 비웃거나 비난하거나 지 얘기만 하거나인 우리가 유일하게 ‘혜정이는 건드리지 말자’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모든 인물들. 우리 중 누군가를 괴롭히면 안간힘을 써서 함께 씹어준다. “오늘도 그새끼가…” 누가 하나 시작하면 “죽여버려?” 한다. 가끔은 구체적인 이야기 듣기가 귀찮아서 대충 넘기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튼. 주된 등장인물은 우리를 화나게 하는 뉴스와 일상 속의 세균들이다. 특히, 우리는 차별주의자를 가장 신랄하게 씹어준다. 식성, 패션 취향…뭐 하나 의견 통일 안 되는 우리가 대동단결할 때다. 우리는 힘도 세고 욕도 잘 하는데 힘은 쓸 수가 없으니 욕으로 푼다. 와그작와그작.
*여섯 여자에게 초고를 검토 받고 업로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