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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든지 Nov 09. 2020

헛똑똑이가 벗어던진 돋보기

“어이구 백날천날 공부 잘하면 뭐해, 헛똑똑이면!”

우리 집 여사님, 꽉 찬 캡슐 통을 먼저 비울 생각 없이 힘으로 커피 머신 레버를 잡아당기려던 내게 하신 말.

나름 가방끈을 양껏 늘려 지금은 어엿한 일인분의 밥벌이를 하고 있는데, 어째 우리 엄니는  행동 하나하나를 불안해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이상하게  손안에 들어온 기계들은 주인 잘못 만나 쉽게 고장 나기 일쑤다. 이쯤 되면 나는 심각한 마이너스의 손이다. 당장  앞의 문제 해결에 급급하느라 충분히 광의의 what how 고민하지 않은 탓이다. 헛똑똑이에서 ‘ 자를 지우는  똑똑이가 되는 것보다 어려운  하다.

공부머리와 일머리가 다른 것처럼, 답이 명료하게 정해진 수학 문제와 일상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감정의 일반을 고찰하고 나에게 맞는 답을 내가 스스로 찾아가는 마음문제는 확연히 다르다. 당장 주어진 과제는 오기로 밤을 새워서라도 끝내야 직성이 풀리는데, 헛똑똑이가 자기 마음 하나 돌보는 건 어찌나 어렵던지, 관계에서 오는 여러 감정들에 주석 달듯 꼬리표를 붙여 분류하는 것은 어쩌면 일생이 걸리는 지난한 작업일 테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교복 입던 시절의 감상과 서류가방을 들고 출퇴근하는 지금의 감상이 사뭇 다르듯, 축적된 경험에 따라 자아는 변주된다. 예컨대 ‘슬픔’이라는 단어를 브레인스토밍 하듯 여러 갈래로 펼쳐보면 내가 평소에 이렇게 슬픈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꽤나 다양한 전제의 상황과 순간들 속에서 다양한 종류의 슬픔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해진 과목만 죽어라 패다 보면 원리가 보이던 때와 달리, 스스로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 흐르는 대로 살다 보면 으메, 이 산이 아닌가벼-의 어이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답을 정해주지 않는 것이 곧 사람과 일과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마음가짐이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헛똑똑이가 된다.

헛똑똑이로 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들어 초원을 사유한다. 가는 핀라이트 하나에 의존해서 한 점만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면 마음의 시력도 안 좋아지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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