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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보다홍차 Sep 06. 2021

시간, 관계, 꿈. 잡히지 않는 것들에 대한 회고

영화 '자유의 언덕', 2014, 홍상수


대학 시절, 영화개론 수업을 들으며 적었던 리포트를 다시 발견했다. 하단의 글은 당시 적었던 리포트의 간략한 요약 및 재편집이다.


*스포일러가 담겨있을 수 있으니 주의바랍니다.




줄거리 : 몸이 아파 일상을 포기해야 했던 권(權)(서영화)이라는 어학원 강사가 있다. 산에 들어가 요양을 한 후 몸이 회복되어 서울로 돌아오게 된 날, 그녀는 전에 일하던 어학원에 들린다. 거기에 그녀에게 보내진 두툼한 편지 봉투 하나가 맡겨져 있었다.


이년 전 모리(카세 료)라는 일본인 강사가 어느 날 그녀에게 결혼 신청을 한 적이 있다. 권은 생각할 말미를 달라고 했고, 그 다음날 거절했다. 모리는 그 직후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한국에 다시 돌아와 그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모리의 편지를 어학원 로비에서 한 장 읽었고, 읽고 난 후 갑자기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졌다. 어학원 계단을 내려오다가 머리가 핑 돌아 쓰러졌고, 그때 손에 들고 있던 편지들이 계단 밑으로 떨어졌다. 흩어진 편지들을 거두어들이면서 권은 편지들에 날짜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편지들이 쓰인 순서를 정확히 알 도리가 없게 됐다.





  주인공 모리가 연모하는 한 여인, '권'을 찾아 무작정 온 한국. 이 영화는 그의 한국에서의 한시적인 삶을 그려내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관계의 영역들을 계속 확장하고 또 확장한다. 긴 쇼트, 친숙한 느낌의 배우, 일상적인 소재, 쉽게 갈 수 있는 동네. 이런 특징들을 보면 표면적으로 이 영화는 굉장히 현실적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굉장히 몽환적이다. 언젠가 한 번쯤은 마주칠 법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나,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곱씹어 볼수록 현실의 경계는 더욱 불분명해지고 어떤 내면의 세계, 혹은 무의식의 세계를 건드리는 듯하다.



#시간

▲주인공 모리는 계속해서 「시간」이라는 책을 읽는다.

       

  일단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누구든 거절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영화를 시간 순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권이 편지를 떨어뜨려 뒤섞여버린 순서. 게다가 잃어버린 한 장. 이 때문에 영화 역시 앞뒤 없는 이야기가 등장하곤 한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영화에서 나오면, 언제 저 얘기를 나에게 해주었는지 곱씹어 보게 되는데, 그 후에 나오는 에피소드와 짜깁기 하면서 머릿속으로 계속 시간을 재배치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시간 순으로 배치했다면 지루했을 내용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호기심을 계속 자극하면서 그 영화를 추리하며 보게 만든다.


 주인공 모리는 모든 씬마다 「시간」이라는 책을 들고 나오며, 그 책을 계속 읽는다. 또, 권이 편지를 읽는 시점은 우편 소인 날짜보다 일주일의 간격이 있었다거나, 게스트 하우스 주인과에 대화에서도 시간에 관한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모리와 게스트하우스 주인과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모리는 자신의 ‘행복’에 대해 논할 때, 삶의 두려움을 승화하는 순간이 ‘시간의 개입을 탈출하는 것’에서 찾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역행적 구성과 더불어 영화 전체적으로 시간에 대해 묘사하고, 관념으로서의 시간보다 개인에게 다가오는 시간의 의미를 고민해보도록 한다.


  장소는 같으나 과거, 현재, 미래를 지나면서 각각 다른 사건이 벌어지는 시공간의 장난은 또 우리를 어딘가 불편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모리가 영선과 두 번째로 관계를 맺었을 때 나눈 둘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그 둘이 누워있는 침대 위에서 그녀의 남자친구인 지광현과 다른 여자가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가 관객으로 하여금 한 번 시간과 공간의 마찰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자유의 언덕’이라는 카페 역시 권과 모리가 공간적으로는 겹치지만, 시간적으로는 엇갈리는 장소 중 하나이다. 권은 그곳에서 편지를 통해 일주일 전의 모리와 재회한다. 이 영화의 제목이 ‘자유의 언덕’인 것에 비추어볼 때, 시간과 공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언덕에서 과거의 모리와 현재의 권이 재회한 것이다.

  

#관계와 정체성

▲ “착하고 예의바르고 깨끗한 것은 그걸로 끝이죠, 그것으로 누군가를 존경하게 되거나 사랑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타지에서 낯선 이방인인 모리는 흑백으로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Why are you here? Business or pleasure? 반복되는 질문 속에 그는 제 3의 신분을 내놓는다. 그가 택한 자신의 정체성은 ‘누군가를 찾는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권을 찾는 사람.’ 그는 자신이 택한 정체성에 걸맞게 계속해서 권을 찾는다. 하지만 그는 찾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심지어 그는 영선과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면서, 새로운 정체성 앞에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제 당신은 내 애인인가요?”


  관계란, 정체성을 규명하는 일이다. 내가 만나고 대화하는 사람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낯선 여행지에 도착해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설레는 것은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꼭 설레는 감정으로 찾아오는 것만은 아니다. 모리가 느꼈듯이 그는 '권'의 애인이라는 정체성,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누군가를 찾는 사람'으로 확장된다. '자유의 언덕'에서 그는 정체성의 '자유'를 얻게 된다.



 #꿈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영화 곳곳에 담겨있다

     

 영화 초반에 모리가 했던 노력은 어떤 개연성 있는 사건으로 연결되지 않고 권의 등장으로 ‘허무한’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이동진 평론가는 아마도 잃어버린 편지 한 장에 마지막 엔딩이 들어있지 않을까 평했다. 엔딩으로 보이는 2개의 이야기들이 있지만 둘 다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히려 엔딩을 없앰으로서 관객이 더 각자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라는 의도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편지 안에 적힌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관객을 꿈과 현실의 경계선으로 초대한다.


  영선이 잃어버렸던 강아지 꾸미(꿈)는 모리와 가까워지는 계기이자, 이 영화의 숨은 의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대개 꿈을 꾸다보면 식당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학교이거나, 주인공이 나 인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었다거나 하는 등의 공간적, 사건적 도약이 많이 발생한다. 뒤섞여버린 편지를 통해서 꿈과 같은 에피소드의 진행을 보여준다. 이렇듯 영화는 모리가 꿈 속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애인 권에 대한 마음, 한국이라는 이국 땅을 돌아다니며 헤매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다양한 기법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어로 진행되는 대화 속에서도 “Dream”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현실과 닿아있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모리의 '꿈'은, 자유의 언덕이란 공간에서 꾸미(꿈)를 찾아주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인상적이었던 단편적 부분들


인물 간의 배치가 인상적이다. 모리가 마음을 붙이는 사람들은 대개 수평으로 배치가 되어있다. 상원과의 대화나, 주인아주머니와의 대화, 또 외국인과의 대화에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영선과의 저녁식사 씬의 경우 모리가 조금 더 대각선 위쪽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영선이 모리에게 먼저 마음을 빼앗기는 것으로 보아 사랑에 있어서 불균형을 보여주고 있다.




 롱테이크 쇼트, 그리고 기괴하다싶을 정도의 줌 인과 줌 아웃이 사용되고있다. 계속해서 카메라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처럼, 어떤 인물의 시점으로 흘러가지 않고, 계속해서 제 3의 눈을 의식하도록 한다. 어떤 전능자가 마치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영화가 전체적으로 권이 편지를 읽는 순서대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권이 편지 속 사건들 위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나오며.


영화가 어려워서 대여섯번 정도 봤다. 리포트를 적어야하다보니 조금 글이 무거워진 것은 사실이다. 가볍게 보려면 가볍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만날 수 없는 애인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하고자 한국으로 떠난 모리, 그치만 역시나 만날 수 없었음. 여행 온 김에 주변 사람들하고도 친해짐. 애인에게 편지를 적어놓고 다시 돌아감. 다시 글을 정리하다보니, 뭐야 이거 사실은 모든게 아..꿈.. 결말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났다ㅋㅋ. 어쨌든 모리는 자유의 언덕을 통해서 어떤 자유이든지간에 얻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사랑할 자유, 애인에 대한 그리움을 승화하는 자유. 시간과, 관계와, 꿈에 대한 자유를 말이다.


자유의 언덕이라는 카페가 있다고 한다. 조만간에 여유를 갖고 방문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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