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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숟가락 Feb 02. 2024

오키나와 여행 전 알아두면 좋은 오키나와 역사 1

전근대 오키나와-한반도

일본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


오키나와 여행 계획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일본 여행을 왜 가냐는 반응을 종종 듣는다. 그들은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현재 한일 관계를 부정적으로 생각해 일본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입장을 바꾸게 된 중요한 경험이 있었다.


역사교사가 되고 나서 수요집회에 홀로 찾아갔었다. 집회 중간쯤 노신사가 연단에 올라갔다. 그는 일본어로 일본 제국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사과했고, 그 의미는 통역을 통해 나에게 전달되었다. 그의 진심이 담긴 사과를 들으면서 일본 전체를 비난했던 생각에 균열이 생겼다. 이제까지 나는 일본을 균질적인 섬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일본인 노신사의 말을 들은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과거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해야지 무작정 일본, 일본인을 감정적으로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한국인들은 일본 자민당 정치인의 행위, 우익으로 치우친 일본 언론의 보도 등을 토대로 일본을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일본에는 자민당만 있지 않고 민주당, 공산당 등 다양한 정치 세력이 존재하고, 우리나라처럼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공존한다.

일본 오키나와 나하시에서 발견한 일본공산당 건물이다.


오키나와는 일본에 편입된 지 200년이 채 안 되는 지역이다. 1910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처럼, 우리보다 먼저 1879년에, 500년 가까이 존재한 류큐 왕국이 일본에 편입되었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서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것처럼, 류큐도 일본의 강제 편입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 우리는 다행히 광복을 맞이했지만, 나라를 되찾지 못한 류큐인의 후손들은 어쩌면 일본 식민 통치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역사를 살펴보면 오키나와는 우리나라와 닮은 구석이 많다. 일본 여행을 가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 사람들도 오키나와 역사를 알면 가야 할 이유가 생길 것이다. 당연히 오키나와행 비행 티켓을 끊은 사람이라면 여행이 더 풍부해질 테고.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오키나와 역사를 되짚어보자.


삼별초가 오키나와에 있었다고?


학창 시절 고려 시대를 배웠다면 삼별초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몽골의 침입 때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근거리를 옮겨 가며 끝까지 항전한 부대가 바로 삼별초이다. 삼별초는 단순한 군사 집단을 넘어서, 행정 조직 체계를 갖추면서 몽골에 항복한 고려 정부를 대신해 새로운 정부임을 표방했다. 진도 용장산성 유적지에는 삼별초가 세운 성곽과 건물터가 남아있다. 여몽 연합군에 쫓긴 삼별초는 1273년 제주도에서 항복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발견된다. 1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삼별초를 따라 강화도에서 떠났는데, 고려 개경으로 돌아온 숫자는 1,300여 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쟁을 치르면서 죽었다고 하더라도 숫자가 많이 적은데, 아마 제주도에서 항전하던 사람들은 잡히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많은 이들이 다른 곳으로 도망쳤을 것이라는 가설이 성립한다.


그들의 흔적이 발견된 곳이 오키나와의 우라소에 성터다. 이곳에서 ‘계유년 고려장인와장조’라는 글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된다. 계유년은 1273년으로 추정되고, 고려 장인이 와서 만들었다는 내용을 굳이 썼다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했던 사람인 것이다. 게다가 수막새 모양이 용장산성터에서 발견된 것과 굉장히 유사하다.


진도와 우라소에에서 발견된 수막새 문양. 출처는 역사추적, <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갔는가> 영상


이러한 흔적을 토대로 '삼별초에 소속된 기와 장인이 여몽 연합군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도망쳐서 오키나와에 도착해 산성 건축에 도움을 주었다'라는 이야기로 엮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고려인의 입장에서만 서술한 것이고, 오키나와 원주민의 입장에서 고려인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있어야 설득력이 있다.


오키나와 지역의 발전은 대륙보다 많이 늦었다. 12세기까지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하는 사회였고, 13세기 들어서 권력을 가진 유력자들이 섬 곳곳에 성(구스쿠)을 짓고 지역을 통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전된 기술을 가진 고려 장인이 왔다면 초대하지 않았더라도 환영할 수밖에 없다. 역사 흔적을 통해 만든 이 이야기가 연구를 통해 사실로 밝혀진다면, 오키나와는 국가 형태가 갖춰지는 시기부터 한반도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오키나와에는 지방 유력자들이 만든 성들이 곳곳에 존재한다. 이 사진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나카구스쿠 성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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