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왕국의 성립과 멸망
삼산 통일과 류큐 왕국
밀린 숙제를 한 번에 하듯이 오키나와 사람들은 대륙보다 1,000년 가량 늦게 시작한 국가의 형성을 100년 만에 빠르게 끝냈다. 13세기 고려의 호족 같은 지방 유력자들이 성을 쌓으면서 자신만의 권력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분산된 권력은 한 곳으로 모이게 마련이다. 14세기 들어서 오키나와 지역은 남부의 난잔, 중부의 츄잔, 북부의 호쿠잔의 3개의 나라가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와 비슷한 이 시기를 ‘산잔시대’라고 부른다. 삼국시대가 신라에 의해 통일이 되었듯이, 산잔시대는 츄잔이 호쿠잔, 난잔을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1429년 통일이 완성된다.
츄잔은 슈리성을 왕궁으로 삼아 통일왕국에 걸맞는 '류큐'라는 새로운 국가명을 만들고, 자신의 존재를 중국, 일본, 한국 등 주변에 알린다. 류큐국은 명과 일본 사이 교역에 중간 역할을 하였고 대만, 베트남, 인도네시아와 교역하면서 해상왕국의 지위를 갖고 발전했다. 당시 동아시아 국가 간의 교역은 조공 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류큐도 독립국으로 그 질서에 편입되어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아 500년 동안 역사를 이어간다.
임진왜란 때 류큐는 일본 편이 아니었다
평화가 유지될 때는 별 문제가 없지만, 전쟁이 발생하면 서로 편을 나눠야 한다. 한중일 삼국이 개입한 동아시아 전쟁인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에 류큐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임진왜란을 계획하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류큐에게 쌀, 황금 등의 보급품을 요구했다. 그러나 류큐왕은 그의 요청을 거부하면서 반대로 일본의 조선침략 계획을 명나라에게 알렸다. 전쟁이 시작되고 위급해진 일본은 다시 한 번 지원을 요구했지만, 류큐는 그것마저 거부하였고 일본은 앙심을 품게 된다.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고 일본 본토에 세워진 에도 막부는 임진왜란 때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609년 류큐국을 공격한다. 일본의 파상공세에 패배한 류큐는 나라 이름만 유지한 채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고려가 몽골의 지배를 받던 때를 비교하면 쉽다. 일본은 류큐가 중국과 조공무역을 통해 얻는 물품들을 착취하기 위해 류큐가 일본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겼다.
일본이 류큐라는 이름을 완전히 지워버린 건 1879년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영토 확대에 나섰고, 두 번의 ‘류큐 처분’이라는 명령을 발표하여 류큐국을 ‘오키나와현’이라는 일본의 한 지역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러한 일본의 지배에 반대한 사람들이 청나라로 건너가 독립 운동을 하기도 했는데,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독립은 이루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