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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숟가락 Feb 06. 2024

오키나와 여행 전 알아두면 좋은 오키나와 역사 3

오키나와 전투와 기억

제2차 세계대전 최후의 미-일 지상전 오키나와 전투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오키나와는 역사의 중요한 지역으로 등장한다.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국은 일본이 지배한 남태평양의 섬을 하나씩 점령해 갔고,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5년, 일본 본토에서 가까운 오키나와가 결전의 장소가 된다. 오키나와 전투에 참여했던 미해병대원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L중대 소속이던 톰 마틴이라는 친구가 상기된 얼굴로 우리 막사로 달려와서는 내셔널지오그랙픽에 실린 북태평양 지도를 보여 주었다. 그 지도에 우리가 훈련 때 보던 이상한 형태의 섬이 실려 있었다. 일본 본토 가장 남쪽에 있는 규슈에서 다시 남쪽으로 520킬로미터 떨어진 오키나와라는 이름의 섬이었다. 이 섬이 일본 본토에 가깝다는 데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전투는 치열하고 처절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일본군은 그 어떤 섬도 호락호락하게 내주지 않았다. 그때까지의 전쟁 양상으로 볼 때, 우리의 공격 대상이 일본 본토에 가까워질수록 전투는 점점 더 치열했다. 그리고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에서 한층 더 가까운 지점이었다.
                                                   유진. B. 슬레지해머, 태평양 전쟁: 펠렐리우 · 오키나와 전투 참전기


오키나와 전투는 미-일이 가장 치열하게 벌인 지상전으로, 미군은 이 섬을 점령하기 위해 엄청난 포격과 폭격을 가해 이 전투를 ‘철의 폭풍(typhoon of steel)’이라고 부른다. 1945년 3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전투는 6월 말까지 3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어떤 역사학자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이 쉽게 항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미국은 일본 본토에 원자폭탄 투하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어느 전쟁이든 생명의 희생을 피할 수 없지만,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특히 심했다. 민간인 12만 명, 군인 8만 명 등 약 2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는데,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다.


일본군에 의한 오키나와 주민 학살


이 전투가 더욱 비극적인 것은 '집단자결'로 표현되는 강제집단사가 곳곳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당시 일본군의 임무는 오키나와 주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미군이 일본 본토까지 들어가는 시간을 늦추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전력화해야 할 것'이라는 명령과 함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쟁에 동원했다.


오키나와 전투에는 주민이 총동원되었다. 다음 사진은 일본인 포로로 왼쪽부터 나이는 75세, 16세, 15세이다. 출처는 U.S.National Archives


전투가 벌어지자 일본군은 주민들이 미군의 포로가 될 경우 군사기밀이 누설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자결'을 명령한다. 천황을 위해 희생하라는 황민화 교육을 바탕으로 미군에게 잡히면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라고 공포심을 자극하여 군부는 자살을 강요했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가족과 주민이 동굴에 함께 지내면서 낫, 칼을 사용해 서로를 찔렀고, 수류탄을 터트려 같이 죽었다.


전황이 미국에 유리해지자 일본군은 남쪽으로 내려가거나 산속에 숨어야 했다. 마을로 침투한 일본군은 미군에게 정보를 넘겨줄 수 있다는 이유로 주민을 스파이로 몰아 처형하고, 일본군에 대한 곡식 보급을 확보하기 위해 강제로 주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오키나와인들은 자신들이 본토보다 낮은 지위의 일본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조선인들이 '조센징'이라고 불렸던 것처럼, 오키나와인들은 '리키징'이라고 불리며 일본 본토인들은 그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했다.


일본 군부는 패색이 짙어지면 군인, 주민을 구분하지 않고 자결을 명령했다. 사진은 오키나와 도미시로에 있는 구 해군사령부호에서 찍은 자결할 때 생긴 총탄 자국이다.


오키나와가 오키나와 전투를 기억하는 방식


현재 일본에 소속된 한 개의 현으로 오키나와는 전쟁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영토가 파괴되고 수십만 명의 주민이 희생된 피해 지역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적인 위치는 일본 본토와 다른 역사관을 갖게 하였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한 역사교과서 서술을 지운 것처럼 오키나와의 집단자결 사건을 숨기려고 하였다. 2007년 문부과학성은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이 주민의 집단자결을 강요했다는 고교 역사교과서 내용을 수정하도록 했고, 오키나와현 주민들은 이에 반발했다. 11만여 명이 참여하여 '오키나와 현민 궐기 대회'를 개최하며 역사 왜곡에 강한 분노를 표출했고, 국가주의 성향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계열의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서는 일본 정부가 아닌 오키나와 사람들이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알 수 있다. 공원 안에 있는 자료관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솔직한 서술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자료관에서 읽은 오키나와 위안소 설명. 위안부 대부분이 조선에서 강제로 끌려온 여성이라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평화의 초석'은 오키나와 전투의 희생자와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오키나와 주민의 이름을 새겼다. 여기에는 조선인 464명의 이름이 있고, 공원 한쪽에서 한국인 위령탑도 볼 수 있다.


오키나와 전투의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인, 미국인, 조선인 등 24만 명의 이름이 공원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오키나와 전투의 유산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군은 오키나와에서 떠나지 않는다. 1972년 일본에 귀환되기 전까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군은 입법, 행정, 사법의 권한을 장악하고 오키나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미군은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오키나와를 후방기지로 활용하였고, 반환 후 현재까지 미군은 기지 사용에 대한 권한이 제한받지 않아 오키나와에는 일본 내 미군기지 시설 중 74.6퍼센트가 집중되어 있다.


여행을 계획할 때 검색한 여러 블로그에서 오키나와에서 꼭 가봐야 할 장소로 '아메리칸 빌리지'를 꼽았다. 아메리칸 빌리지는 음식이 맛있고, 볼거리가 많고, 일본에서 미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니 반드시 가야 한다고 소개된다. 나도 여러 카페 중 고르고 골라 풍경 좋고, 맛있는 브런치가 있는 곳에서 자리를 잡아서 여유를 즐기려는 순간,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전투기 비행 소리가 평화로운 분위기를 망쳤다. 이 소음은 여행의 즐거움 덕분에 잊었던 사실, 오키나와는 80년 전 참혹한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오키나와 아메리칸 빌리지에서 브런치를 먹기 위해 풍경 좋은 카페 앉았지만 사진에 표현할 수 없는 전투기 비행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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